오피니언

[기고]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 (1)

김승진 목사 (침례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편집자 주]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앙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실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충성스러운 봉사와 헌신적인 사역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야심이나 열심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면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I. 들어가면서

김승진
(Photo : ⓒ 침신대)
▲김승진 교수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사 명예교수)

바울 사도는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먼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구분하고, 영에 속한 사람을 세분하여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로 나누고 있다(John F. MacArthur, The First Corinthians,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Chicago: Moody Press, 1984], 64, 69-72).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거나 알더라도 아직 믿지 않은 자,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혹은 성령뱁티즘을 받지 않은 자), 쉽게 말해서 불신자(unbeliever), 즉 자연인(natural man)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 즉 신자(believer, 성령을 받은 자, 성령뱁티즘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 영적인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신자를 "육신에 속한 자"(carnal man, 고전 3:1b-3)라고 하였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신자를 "신령한 자"(spiritual man, 고전 2:15, 3:1a)라고 하였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유독 책망을 많이 들은 교회는 고린도교회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많았던 교회였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역시 예수를 믿고 성령을 모신 신자들의 공동체(Believers' Church)이기는 했어도, 아담의 속성을 가진 옛 사람을 제대로 벗어버리지 못한 영적인 어린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서 젖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전 3:2-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모셨고 성령뱁티즘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었지만(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교회는 시기와 분쟁 등 신앙과 삶에 있어서 미성숙함과 부도덕함을 적지 않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성령의 은사들(Gifts of the Holy Spirit)은 풍성했지만(고전 12장, 14장) 무르익은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Holy Spirit)는 별로 많이 맺지 못하고 있었다(Ibid., 311-3). 필자는 사도 바울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고린도교회를 타산지석으로 삼도록 하기 위해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그들의 삶을 통해 아름답고 맛있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고린도전서를 기록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명령들과 권면들 가운데서 "(너희는-필자 주)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b,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는 명령이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령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성령을 모셨고 성령뱁티즘을 받았다고 해서, 물론 그 신분은 죄인으로부터 의인으로 바뀌었지만, 신앙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충성스러운 봉사와 헌신적인 사역이 인간적인 노력이나 야심이나 열심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충만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II.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서는 성령뱁티즘(Spirit Baptism, 성령세례 혹은 성령침례)의 개념과 성령충만(Spirit Filling)의 개념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상호 교차적으로 혼용하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전에 쓴 글("성경이 말하는 성령뱁티즘," www.veritas.kr에서 <뉴스검색> 란에 필자의 이름을 치고 클릭하면 본문을 확인할 수 있다)에서 밝힌 대로, 신약성경에 의하면 이 양자의 개념은 확연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신앙체험이다.

1. 수동태 미래시제 진술형 문장과 수동태 현재시제 명령형 문장

첫째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말은 한 번도 명령형의 문장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데 반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말은 명령형 문장으로 되어 있다(W. A. Criswell, The Baptism, Filling & Gifts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3], 22). 전자는 수동태 미래시제 진술형 문장이다("너희가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말에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는다"는 동사단어 자체는 능동형이다. 그래서 원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을 한다면 "(너희는-필자 주) 성령으로 '뱁타이즈'될 것이다"(wi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가 된다. 그 동사가 수동태이기 때문에 인간이 능동적으로 성령뱁티즘을 받기 위해(방언 등의 은사를 체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뱁티즘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이고, 죄인인 인간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수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서 5장 18절은 "(너희는-필자 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로 번역이 되어 있다. 여기서도 우리나라 말로는 "받으라"는 단어가 명령형이면서 능동태이다. 보다 정확한 번역은 "(너희는-필자 주)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라"(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다. 이 문장의 희랍어 동사(plerousthe, 플레루스테)는 수동태이고 현재시제이며 명령형이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성령충만의 상태를 이루어 주시는 궁극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명령형이기 때문에 인간은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랍어 동사가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은 "계속적이고 반복적인"(constant and repetitive)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너희는-필자 주)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라"(constantly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혹은 keep being filled with the Holy Spirit)는 뜻이다. 성령뱁티즘은 수동태 미래시제 진술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반하여, 성령충만은 수동태 현재시제 명령형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개념은 동일할 수도 없고 유사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단회적인 사건과 반복적인 사건

둘째로, 성령뱁티즘은 신자의 생애 가운데 "단회적으로"(once-for-all)으로 경험하는 사건이다(Ibid., 23).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회심(Conversion, 개종)할 때, 즉 중생(Regeneration, 거듭남)할 때 성령뱁티즘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성령뱁티즘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복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출생이 여러 번 일어날 수 없듯이 영적인 출생 역시도 여러 번 일어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희랍어 동사 abaptisthemen(아바프티스테멘)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대과거시제(aorist tense)이다. 과거에 있었던 "단 한 번의 경험"(once-for-all experience)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반복적(repetitive)이다. "성령으로 뱁타이즈된 자"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뱁티즘이 단회적이라면 성령충만은 다회적이다(one Spirit Baptism, multiple Spirit Fillings). 예수님을 믿은 신자가 성령뱁티즘을 단회적으로 받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고전 12:13). 한번 성령뱁티즘을 받은 신자는 여러 번 다회적으로 성령뱁티즘을 받지 않는다. 성령뱁티즘을 받는 즉시 영적인 출생(spiritual birth)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adoption)이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령충만은 신자가 일생 동안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받아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항상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성령충만의 상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은 점차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인 성화(Christian Sanctification)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기 위해서 일평생 계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엎치락뒤치락의 과정(up-and-down process)이다.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게 될 때까지, 즉 영화(Glorification) 되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인은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몸부림을 쳐야 한다.

3. 위치적 성격과 경험적 성격

셋째로, 성령뱁티즘은 위치적(positional)인데 비해 성령충만은 경험적(experiential)이다(Ibid., 23-4).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게 된다"는 것은 죄인의 신분을 가졌던 자가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어 신분의 위치적 변화(positional change of status)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그 신자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다. 성령뱁티즘을 받음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게 되고(요 20:28,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또한 이미 예수님을 믿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된다(엡 2:19, "이제부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의인의 신분을 가지게 된 하나님의 자녀가 그 신분에 걸맞는 행동과 삶을 경험적으로(experientially) 실천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권능을 덧입게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도 되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도 되는 것이다.

4. 보편적인 체험과 선택적인 체험

넷째로, 성령뱁티즘은 "보편적인"(universal) 체험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선택적인"(selective) 체험이다(Gregg R. Allison, "Baptism with and Filling of the Holy Spirit," 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 16.4 [2012]: 15).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말은 예수 믿은 신자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모두 성령뱁티즘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성령뱁티즘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믿은 신자를 가리키고, 성령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사람이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누구나 받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충만은 "선택적인" 것이다.

5. 개인적인 체험과 공동체적인 체험

다섯째로, 성령뱁티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서 "성령으로 뱁티즘을 받아"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individual-oriented) 체험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에베소교회("너희는"-필자 주)에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인"(community-oriented) 체험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성령충만을 받는 면도 간과할 수 없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역교회 공동체 자체가 성령충만의 영적인 상태를 견지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의하면 성령뱁티즘과 성령충만은 확연히 구별되는 별개의 신앙체험이다. 이 두 용어를 혼동해서도 안 되고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해서도 안 된다. 사도행전에는 성령뱁티즘에 관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말씀으로 두 번(행 1:4-5, 행 11:16) 언급이 되어 있는데 비해서, 성령충만에 관해서는 사도들의 계속된 사역들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 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4:8-9)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6:3-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3:9-10)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행 13:51-52)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확실히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었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담대하게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간 이야기이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구절들에서는 사도행전 2장 1-4절을 제외하고는, 성령충만함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역사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던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말을 했다거나, 신체적인 진동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요즈음 일부 능력사역자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행위들이 있었다는 표현도 전혀 등장하고 있지 않다.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사도들을 통해서 인격적인 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계속)

이인기 ihnklee@veritas.kr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5]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터전을 마련한, 아우구스티누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보다는 출발이 좀 늦었으나 곧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주축이 되어 착실하게 발전해갔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알쓸신학 4] 카르타고 학파의 거침없는 변증과 교회론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프리아누스의 신학을 오늘날 살피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이들의 신학은 현실적이고 참여적이고 실존적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