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Jun 04, 2018 01:40 PM KST

- 창세기 3:1-9, 고린도후서 5:17-19, 요한복음 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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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매년 6월 5일은 UN이 제정한 '환경의 날'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오늘을 '환경주일'로 지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좁은 의미의 '환경'이라는 말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환경(環境, environment)은 '인간이나 동식물 따위의 생존이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 조건이나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통 '자연'(自然, nature)이라고도 부르는 이 환경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Creation)입니다. 환경이란 말 속에는 자연이 인간을 위한 배경이나 무대장치 혹은 자원 정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창조세계'란 말은 자연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질서로 다시 보게 합니다. 자연을 피카소의 작품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는 것, 그것을 '생태적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두 번째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의 회심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마가 1:15) 그 회심이고, 두 번째의 회심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맘대로 약탈하고 파괴한, 지금까지의 자기파멸적 삶으로부터의 돌아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God's Creation)가 지금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지구 곳곳에서 기상 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사하라 사막에 38cm의 폭설이 내렸습니다. 인도에 강한 모래 폭풍이 불어 14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미국 워싱턴의 가을 기온이 영하 38도를 기록했습니다. 파키스탄의 한 남부 도시의 기온은 섭씨 50.2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지구는 더 이상 '건강한 지구'가 아닙니다. "인류가 지구 온난화를 되돌릴 수 없는 시점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경고를 더 이상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고(故) 스티븐 호킹 박사는 현재 우리들의 지금 병든 지구가 보내는 이 간절한 호소들을 무시하면 앞으로의 지구는 "섭씨 460도의 고온 속에서 황산비가 내리는 금성처럼 변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중앙일보, 2018.3.20).

오늘은 물과 강의 문제에 집중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앞서 부른 찬송가 78장 '참 아름다워라'의 3절의 가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 듯 하도다." 흐르는 시냇물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이 작사자는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소유자였을까요. 우리도 그 사람처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큰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사실 지구도 '물의 행성'입니다.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으니까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라 해야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이 수구가 가진 물의 97% 이상은 바닷물이며, 태양은 매년 막대한 양 물을 바다로부터 증발시켰다가 비와 눈의 형태로 땅으로 보내줍니다. 바로 이러한 강수(降水)가 전 세계 민물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 현상은 바로 이 물의 순환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물이 흐름으로써 생명이 일어납니다. 흐름이 끊기면 생명이라는 하나의 긴 실은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다와 육지 사이의 물의 순환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담당하는 존재는 바로 강(江)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는 어릴 적에 강에서 미역을 감고 뛰놀던 기억이 생생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저는 세계적인 생태학자 샌드라 포스텔(Sandra Postel)과 브라이언 릭터(Brian Richter)가 지은 『생명의 강』(Rivers for Life)이라는 책을 통해 저 자신이 얼마나 강에 대해 무지했던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강에는 항상 일정한 수심 이상의 물이 고정적으로 유지되어야 좋은 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하상(河床), 즉 강바닥이 높아 비가 오면 홍수가 범람하고, 사계절마다 강물 수위의 차이가 있는 강은 '죽은 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준설(浚渫)을 해서 강바닥을 낮추고 계절이 변해도 수위의 차이가 없는 강을 만드는 것이 강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의 저자들은 '계절과 기후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강'이 사실은 '건강한 강'이라고 말합니다. 강에는 홍수기도 필요하고 극단적인 저수위의 갈수기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강은 홍수기에 많은 물이 흐르고, 갈수기에는 모래톱과 얕은 물의 생물서식지가 드러나는 강입니다. 강의 저수위 기간에는 유속이 느리고 조용하기 때문에 각종 수생동물들이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간혹 극단적인 저수위 기간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낙우송과 같은 특정한 수종의 번식에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나무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뿌리와 밑동이 물에 잠긴 채 살아가는데, 극심한 가뭄이 들어 범람원 토양이 충분히 건조해질 때에만 비로소 씨앗을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강에는 고수위도 필요합니다. 봄철 고수위는 하천의 생물들에게 생애주기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라고 알려주는 환경의 신호, 혹은 자명종 소리와 같습니다. 강에는 심지어 홍수도 필요합니다. 홍수기가 있어야 하천의 여러 생물들은 저수위 때 가지 못하던 다양한 서식지로 나아가 생명활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홍수기는 강에서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강은 단순히 물이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신비한 생명 활동을 수행하는 복잡한 생태계 시스템입니다. 이런 강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구불구불 흐르는 것"입니다. 강은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야 합니다. 그래야 물살이 빠른 데와 느린 데가 나타나고, 침식되는 곳과 퇴적되는 곳이 생겨나며, 그에 따라 수심이 깊은 웅덩이와 얕은 여울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여울이 강의 생명이며 나아가 강의 성소(聖所)와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들이 알을 낳는 곳은 유속이 느리고 산소가 많으며 물이 맑은 여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을 직선화, 획일화, 균질화하면, 즉 단순히 물이 지나가는 통로로 만들면 여울과 낮은 수심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더 이상 강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는 우리 인간이 지난 100여 년 동안 만든 약 80만개나 되는 크고 작은 댐들이 하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 인간은 무려 하루에 두 개 꼴로 대형 댐을 건설했는데, 그 결과 역동적인 생명의 장이던 강들이 균일하고 획일적인 수로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실로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편익을 위해 지구 민물의 자연적인 흐름과 리듬을 강제로 변경한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공황 시절에 거대한 후버댐을 지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한 수리분야 보좌관(W.J. McGee)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에 대한 통제는 인간이 자연의 통제자가 되기 위하여 넘어야 할 마지막 단계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지금 자연에 대한 최후의 통제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대강 사업이 한창일 때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순례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가는 그 험한 고역을 감당하면서 스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눈으로는 더 넓게 더 멀리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으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반대로 무릎을 굽히고, 팔꿈치를 꺾고, 머리를 숙여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서 가고자 한다." 직립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했고, 인간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게 했음을 그는 간파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간이 유일하게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만물의 폭군'이 되었음을 그는 개탄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 특히 창세기 1:28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지구에 대한 인간의 약탈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땅을 '정복하고(kabas)' '다스리라(rada)'는 말은 자연을 착취하고 지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원적으로 볼 때 그것은 '일하고 봉사하고, 지키고 돌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서에 있는 두 번째의 창조 이야기, 즉 에덴동산의 이야기(창 2:4-3:24)를 보면, 인간은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땅을 경작하는 겸손한 농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담'(Adam), 즉 인간을 '아다마'(Adama), 곧 흙을 재료로 창조하십니다. 우리는 이 '아다마'를 '농토'로 번역할 수 있고 따라서 '아담'을 '농부'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농토에서 농부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농부로서의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다스리고 정복하라'가 아니라 '지키고 경작하라'(abad, 창 2:15)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땅에 대한 인간의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돌봄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의 주인이 아니라 겸손한 참여자요 관리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고 싶은 대로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런 금지명령을 내렸을까요?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아담이 그것을 따먹을 줄을 미리 몰랐을까요? 어느 주일학교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혹시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으라고 '덫'을 놓으신 것은 아닐까요? 모든 것이 허용되었지만 한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마치 '제왕 같은' 인간에게 단 한 가지 금기가 주어졌습니다. 그 금기는 동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시하는 '경계석'과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뱀의 유혹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읽은 성서본문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유혹의 핵심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신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맘대로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는 그 동산의 주인이 아담이 아니며, 아담은 그 동산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표지와 같았습니다. 인간으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 혹은 '한계선'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그 선을 넘어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위에 신처럼 군림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원죄'(原罪, Original Sin)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과 이 타락의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분의 얼굴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주인이 아닌 것이 주인인 체하려는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요. 하나님은 그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물으십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질문은 성서를 통틀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던진 최초의 질문입니다. 지정학적 장소나 물리적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있어야 할 '신학적 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연과 신과의 관계에서 견지했어야 할 '관계적 자리'를 물은 것입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신이 되고자 했던, 소유주가 되고자 했던 탐욕의 인간에게 그가 본래 있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의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것입니다.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창 2:15)는 명령을 버리고 도시로, 문명의 한복판을 향해 내달리며 안락과 물질적 풍요만을 좇아 떠나버린 아담(사람)에게 자신의 원래 자리가 어디냐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똑같은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십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자연을 통제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지배자요 또 소유주인 줄로 착각하고 끝도 없이 오만해진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동일한 질문을 지금도 던지고 계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새로운 신학과 실천이 요구됩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은 인간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서 가는 천당만 가르치니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도, 매일 100가지가 넘는 생물종이 멸종해도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횟수에 비례해 교인들의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반증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잘못된 종말론까지 가세합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제임스 와트라는 내무장관은 "왜 레이건 행정부에 환경정책이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데 왜 그런 정책이 필요한가"라고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학이, 잘못된 세계관이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신실하고 책임 있는 청지기로 살아가려는 훌륭한 전통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인간만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만물의 갱신과 변혁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성경구절의 하나인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신 '세상'은 원어로 '코스모스'(cosmos)인데, 그것은 우주만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진정 사랑한 대상은 인간만이, 영혼만이 아니라 코스모스, 즉 온 우주만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포함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누구든지' 안에 인간만 포함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의 교부 이레네우스는 이 '누구든지'를 인간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인간을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모든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입니다.

토마스 베리(Thomas Berry) 신부의 말입니다. 그는 오늘 우리 인간의 문제를 '자폐증'의 문제로 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는 말하면서도, 강물과는 이야기할 줄 모르며, 강물의 말도 들을 줄 모른다. 우리는 고귀한 대화를 상실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주를 상실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좋아하는 사람들과 종종 강변을 찾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릴 적 강에서 놀던 추억도 떠올려보시고, 강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수변 생명체들에게 눈길도 주고 말도 걸어보십시오.

다시 한 번 오늘 공동기도문으로 함께 읽은 이현주님의 기도 시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를 읽어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 죽어서 흙 될 일 생각 말고 /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 말없이 품 열고 받아들여 / 오래 견디는 참 사랑 /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 온갖 좋은 것 살아 있는 것 / 여린 싹으로 토해내어 / 마침내 열매 맺히도록 /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흙'이라는 뜻입니다. 전혀 슬기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인은 우리 인간이 '슬기로운 흙'이 아니라 '거룩한 흙'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죽어서 흙이 되길 기다리지 말고 살아서 흙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라는 뜻의 영어 "human"(휴먼)은 라틴어 "humus"(후무스), 즉 '흙'에서 나왔습니다. 이 "humus"에서 "humble"(험블), 즉 '겸손한'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인간'과 '겸손'이 한 뿌리입니다. 이 겸손을 잃어버린 인간이 지금 문제입니다. '거룩한 흙'은 '겸손한 흙'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겸손한 존재가 거룩한 흙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종(種)의 차원에서 통시적으로 고찰한 이스라엘의 저명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bal Harari)는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는 이제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호모 사피엔스는 과학을 통해 자연선택을 지적설계로 대체하고 유기체가 아닌 생명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 인간 사회와 경제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 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이라 그는 예상합니다. 심지어 죽음조차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오늘날 호모사피엔스는 더 이상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과학이 죽음에도 모종의 기술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한 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러한 위험한 존재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오늘도 신이 되려는 원죄의 유혹 앞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무책임한 신들'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아담아(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신처럼 군림하려 드는 이 오만한 인간을 향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물었던 바로 그 질문을 다시 물으십니다. "사람아(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0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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