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18:1-5, 히브리서 13:1-2, 사도행전 6:1-7 -

나그네 환대
(Photo : ⓒ 이화대학교회)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살면서 천사를 만나본 적이 있으신지요? 한자로 '천사'(天使)란 하늘[天]의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내진[使] 존재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존재이자, 신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messenger)입니다. 그런데 세속화의 격랑 속에서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천사들이 요즘 각종 문학과 예술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작가 공지영 씨도 『천사』(오픈하우스, 2008)라는 책을 냈더군요. 세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의 마음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쓴 성서 속 인물 소개의 첫 번째 이야기로 말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루시엘,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들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루시엘이 타락하여 루시퍼가 되었는지, 그리고 미니멜이라 불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작은 천사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천사를 그리는 신부님으로 잘 알려진 조광호 신부의 그림과 어우러진 이 책은 요즘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의 교육자료로 쓰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오늘 이 설교의 본문 중 하나인 히브리서 13장 2절의 말씀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대 추상화의 시초라 불리는 독일 국적의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입니다(<그림 1>).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예술관을 가진 클레는 육체의 질병으로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부터 열심히 천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는 겨우 5살이 되던 해부터 천사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읽어주신 동화를 듣고 <아기 예수와 장난감 기차가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라는 그림을 그리더니, 그 다음 해 6살이 되었을 때는 (<그림 2>) 보시는 바와 같이 <노란 날개 달린 아기 예수>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컬러가 아니어서 노란 날개인 줄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꼬마 클레가 그린 두 그림에서 아기 예수님은 모두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천사 예수님인거지요.

클레는 하늘을 날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직 환상 속에서만 그것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림 3>)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 1920>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자세히 보면 천사가 날개를 달고 있다기보다는 양팔을 활짝 펼쳐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날개 끝은 사람의 손가락처럼 보이는데 모두 5개입니다. 이렇게 인간적 특징을 보여주는 상체와 달리 하체에서는 새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체는 마치 새의 뒷 꽁지처럼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고, 가늘게 일직선으로 뻗은 다리에 아래는 세 마디로 갈라진 발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새로운' 천사는 도무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림 4>) 히틀러가 집권하자 박해를 피해 고향으로 돌아간 클레는 <깨어있는 천사> 혹은 <수호천사 Wachsamer Engel, 1939>를 그립니다. 어두운 배경 속을 질주하는 뚜렷한 빛의 선으로 묘사된 이 작품은 전쟁의 먹구름으로 어둠이 지배하던 혼란의 세상에 한 줄기 빛을 비춰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 5>) 그리고 <전투적인 천사 Anlelus Militans, 1940>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전투하는 천사는 미카엘 대천사입니다. 클레는 나치가 몰고 온 죽음의 기운과 맞서려는 희망을 여기에 담았습니다.

이후 클레는 죽음 앞두고 익살스럽고 다정한 모습의 천사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 6>) <방울 천사, 1939>입니다. 천사가 아기처럼 방울을 달고 있습니다. (<그림 7>) <울고 있는 천사, 1939>입니다. 우는 사람을 달래줘야 할 천사는 무엇이 슬픈지 한심하게도 자기가 울고 있습니다. (<그림 8>) <못난이 천사 Haesslicher Engel, 1939>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못생겼는데 밉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클레의 천사는 인간적인 약점과 결점을 그대로 지닌 존재입니다. (<그림 9>) <건망증이 심한 천사, 1939>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천사 그림입니다. 천사는 무언가를 깜빡 잊어버렸는데 매우 미안해하고 겸연쩍어 하면서 자신의 무안함을 숨기려고 두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난만한지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 듯합니다. 이렇게 순진무구하고 맑은 영혼의 천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림 10>) 그 다음은 <가엾은 천사, 1939>입니다.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면도 없지 않으나, 가만히 보다보면 왠지 동정심을 유발케 하는 천사입니다. (<그림 11>)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완성의 천사, 1939>입니다. 마치 부화하기 전 알 속의 미숙한 병아리 같습니다. 천사도 인간처럼 생성 중에 있고 또 성장하는 존재라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이 파울 클레의 천사는 인간의 한계와 비극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는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상의 것을 얻으려 노력하나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겸손의 상징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지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인간의 삶에서 천사들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그네 환대
(Photo : ⓒ 이화대학교회)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교인 수 1만 명이 넘는 미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국내 한 일간지에도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국민일보 2013.7.29. "노숙인이 된 목사"). 주일 아침 이 큰 교회의 주변을 노숙자 한 사람이 어슬렁거렸습니다. 허름한 행색의 이 노숙자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배가 고프니 잔돈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노숙자는 교회당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곧바로 예배위원들이 달려와 제지하였고 그는 교인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로 밀려났습니다. 광고시간이 되었습니다. 인도자가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 부임하시는 예레미야 스티펙 목사님을 소개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기대에 찬 시선으로 새로 부임하는 목사를 찾아 일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맨 뒷자리의 앉아 있던 바로 그 노숙자가 강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이날부터 이 교회에 새로 부임하게 된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 위로 올라갔고 곧장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회중은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표정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설교를 이어갑니다. "오늘 아침에 많은 교인들이 여기에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교인들은 많으나 제자들은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는 자신의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이웃 옆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1-15절)에는 초대교회가 일곱 대표를 선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열심히 빈민 구제 사업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헤브라이우스'였고 다른 하나는 '헬레니스톤'이었습니다. 헤브라이우스는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말합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계속 살아온 유대인들입니다. 열 두 사도가 다 여기 속합니다. 이와 달리 헬레니스톤은 역(易)이민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 외국을 유랑하다가 돌아온 소위 디아스포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교포 2세들이었습니다.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세계어인 그리스어만 알았고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몰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예출신으로 빈손 귀국했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6장 1절에 헬레니스톤 교인들이 불평을 터뜨린 이유가 나옵니다. "매일 구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네 과부들이 소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열 두 사도가 일곱 사람의 구제 전담자를 두기로 결정합니다.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인 선출방법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그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5천 명 이상이나 되는 교인들 중에서 겨우 7명을 뽑는 것이었으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이 뽑혔습니다. 이들의 대표인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집사'라는 직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교회의 집사 선출과정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대표로 뽑힌 일곱 명의 이름입니다. 5절에 나온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겠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어떤 사람들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습니까? 놀랍게도 일곱 명 전부의 이름이 모두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헬레니스톤,' 즉 헬라파 유대인들만 뽑은 것입니다. 당시 교회의 주류라 할 수 있는 본토의 '헤브라이우스,' 즉 히브리파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 디아스포라 역이민자 출신만 뽑은 것입니다. 게다가 맨 마지막 인물인 '니골라'는 심지어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성서는 그를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안디옥 출신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5천 명의 교인 중에서 뽑힌 7명의 대표는 정말로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모두 소수자에게 맡겼습니다. 나그네와 같이 타국에서 오래 살다 돌아온 2~3세들에게, 게다가 모국어도 잘 못하고 문화양식도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의 살림과 구제를 맡긴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인들이 얼마나 넓은 포용력과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었을까요? 망했을까요? 6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한마디로 대(大)부흥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모습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셨는데, 그 중에서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의 큰 잔치 비유'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내용은 잘 알다시피, 한 주인이 성대한 잔치를 열고 손님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된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모두 불참합니다. 화가 난 잔치집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누가 14:13)을 특별히 지목하면서 그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잔칫집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님 시대에 유대 정결법에 의해 소위 '죄인'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과격하게 위반하면서 그 경계선 밖에 버려지고 배제된 사람들을 과감하게 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추방된 사람들에게 열린 큰 잔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그네 환대
(Photo : ⓒ 이화대학교회)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오늘 읽은 창세기 18장에는 천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북방 마므레(Mamre)라는 곳에서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 장막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같이 더운 어느 날 그가 장막 문 앞에 앉아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낯선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성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군지 모른 채 바로 달려가 그들을 환영하고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로 빵을 굽게 하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대접했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한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을 정성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광야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은 자기들도 언제든지 낯선 땅에서 나그네 신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생활화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나그네 환대는 지극정성이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손님들은 아래 사라에게 아들이 생길 거라는 축복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천사들을 환대하고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림 12>) 마크 샤갈(Marc Chagall)의 그림 <아브라함과 세 천사 Abraham et les trois anges, 1960>입니다. 파울 클레의 천사들과 달리 여기 나오는 천사들은 모두 번듯한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 두 천사는 흰 날개를 하고 있고, 나머지 한 천사는 노란 날개를 하고 있는데 그의 머리 위에 노란 선으로 그려진 후광을 갖고 있습니다. 이 파란색 옷을 입은 천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온 하나님이라고 샤갈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세히 보면 가운데에 앉아있는 천사가 한쪽 신발만 신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이 퉁퉁 부을 만큼 먼 길을 여행했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비잔틴 전통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늘 위대한 힘과 위엄 있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모습을 샤갈은 맨발과 신을 신은 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이 세 천사를 기독교적 삼위일체의 예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림 13>) 사실 세 천사를 삼위일체의 예시로 해석하는 전통은 교회 안에 오래 있어 왔는데, 14세기에 템페라가 그린 <아브라함의 환대>와 그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천사가 입은 붉은색 옷과 바닥의 녹색 그리고 배경의 황금색은 각각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림 14>) '빛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아브라함과 세 천사, 1646>입니다. 세 천사가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이 나무는 마치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회오리쳐 오르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에는 환하게 빛나는 흰옷을 입은 천사가 있는데, 그 천사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마치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그 천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흰 옷을 입은 천사는 한 발을 내밀고 있고,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듯이 천사의 발을 씻깁니다. 또 다른 천사가 음식을 입에 넣고 먹고 있는데 이 장면은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킵니다. 렘브란트는 지금 아브라함이 세 천사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들, 즉 모세의 부르심과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밝게 빛나는 천사의 오른 손이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 쪽 문 뒤에서 이 나그네들을 대접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사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을 거라는 복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과 같이,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 늙도록 자식이 없어 서럽게 울던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겁니다. 실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즉]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아니 하나님을] 대접하였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환대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나그네를 환영하는 공동체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환대라는 뜻의 단어는 '필로제니아'(philoxenia)인데 이는 '낯선 자를 사랑함'이라는 뜻입니다. 그 반대말은 '제노포비아'(xenophobia)인데 '낯선 자를 미워함'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 말이 '이방인에 대한 혐오현상'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환대의 반대는 냉대입니다. 환대의 반대는 혐오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혐오가 아니라 환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환대는 단순히 예배 후의 '차와 다과'가 아니라, 자선이나 시혜가 아니라 우리가 '이방인' 혹은 '타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들이라"(로마서 15:7)고 강력히 권면합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환대를 명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이방인들이었고, 낯선 자들이었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장 18-1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어찌 보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이란 대체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그네, 즉 낯선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피부 색깔도 다르고, 신앙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정한 도전이 됩니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발 그대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 그대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살면서 천사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통한 상상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제의 삶에서 천사들을 만나고 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의 모습으로,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천사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환대'를 베풀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여 큰 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낯선 이방인들을 환대하다 하나님의 만나고 복을 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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