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사람다운 사람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22:21-27, 갈라디아서 3:26-28, 마태복음 5:3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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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기독교의 박애(博愛)정신을 가장 잘 말해주는 구절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마태 5:39-41,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은 내심 이것이 비현실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따라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보다 더 깊고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네 복음서 가운데 마태와 누가에만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장의 내용과 사뭇 다릅니다.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누가 6:29, 새번역).

먼저 누가는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라고 했습니다. 어느 쪽 뺨이 먼저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와 달리 마태는 매우 정교하게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고 말합니다. 누가가 막연히 '한쪽 뺨, 다른 쪽 뺨'이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마태는 '오른쪽 뺨, 왼쪽 뺨'이라고 순서를 특정하고 있습니다. 이 순서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옆 사람과 짝이 되어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쳐보겠습니다. 살살 치셔야 합니다. 그런데 왼손으로 치면 안 됩니다. 오른손으로 치십시오. 예수님 시대는 철저한 오른손 문화의 시대였습니다. 왠지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의 오른쪽 뺨은 내 오른손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치려면 손목을 꺾어야 합니다. 결국 오른손의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뺨을 올려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쿼바디스>와 같은 옛날 기독교 영화를 보면 주인이 노예를 칠 때 오른손 손등으로 얼굴을 후려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 손등으로 상대의 따귀를 때리는 것은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와 같이 대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노예와 주인과 같이 종속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손등으로 뺨을 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구전(口傳) 토라를 기록한 한 <미슈나>(Baba Kamma)를 보면, 주먹으로 동료를 때리면 그 배상으로 하루치의 일당(4 zuz)을 물어주어야 하고,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 50일치의 일당(200 zuz)을, 그런데 손등으로 때리면 무려 100일치의 일당(400 zuz)을 물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을 인간을 가장 경멸하는 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것은 오직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그리고 로마 군인이 유대인에게 허용되었습니다. 이른바 '상전'들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뺨을 얻어맞을 경우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반응합니까? 침묵합니다. 굴종합니다. 그저 상전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왼쪽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다시 짝을 지어 상대의 뺨을 쳐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살살 치셔야 합니다. 진짜 때리진 마시고 시늉만 해보십시오. 이제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쪽 뺨을 때려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아까보다는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왼쪽 뺨은 내 오른손과 같은 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마저 돌려대고 있는데 그는 무언가 강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이쪽도 때리십시오. 하지만 이번에는 한 가지 알고 때리셔야 합니다. 나도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때리십시오. 당신과 나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고 해서 당신의 나의 인간됨마저 부인할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육체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정신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저항의 표시입니다. 확실한 '인권선언'입니다. 물론 이 경우 가혹한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습니다. 채찍에 맞는 사람은 더 이상 때리면 맞기만 하는 짐승이 아니라 채찍을 때리는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40)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누가 6:29)고 했습니다.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라'는데 누가복음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라'고 합니다. 순서가 도치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태는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조건절을 앞에 붙입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마태는 지금 상황이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문제라는 것을 매우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겠다는 맹세의 표시로 겉옷을 벗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너를 고발하여"라는 말을 명시함으로 지금 사건의 무대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마을 법정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채무자가 더 이상 빚을 갚을 능력이 없게 되자 채권자는 그를 걸어 고소하여 마을 사람들 앞에 세워 그의 옷을 차압하려 합니다. 그 상황에서 마태가 말하는 순서가 흥미롭습니다. 통상적으로 채권자는 채무자의 '겉옷'을 요구하는데, 마태는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말합니다. 일부러 비틀었습니다. 속옷을 달라는 채권자가 있겠나 싶지만, 만약 속옷을 달라는 데 겉옷까지 벗어주면 그 사람은 어떤 상태가 됩니까?

과거 우리나라에서 마을에 역질(疫疾), 그러니까 돌림병이 돌면 여러 방법을 다 쓰다가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최후로 온 마을의 부녀자들이 알몸으로 북을 치며 마을을 돌았던 전통이 있습니다. '역질 귀신아, 썩 나와라. 우리 자식과 지아비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아직 모자라느냐? 어디 썩 나와 보거라!' 이런 메시지를 던지며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알몸을 드러낸 부녀자들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게 된 역질 귀신이 창피해서 도망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데 겉옷까지 내주면 그 사람은 알몸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반전(反轉)되었습니다. 채권자의 손에는 한 쪽에 속옷이, 다른 쪽에 겉옷이 들려 있습니다. 채무자는 알몸으로 걸어 나가는데 사람들은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알몸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은 지금 이런 메시지를 던지게 됩니다. '나의 속옷까지 달라고 했습니까? 자 여기 겉옷까지 다 가져가십시오. 이제 당신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져갔습니다. 남은 것이 이 몸밖에 없는데, 이것마저 가져가시렵니까?'

지금 부끄러운 사람은 맨몸으로 걸어 나가는 채무자가 아니라 그를 그렇게 만든 채권자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처사에 마을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사채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는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갚게 되자 그의 살을 베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재판관 포샤가 '살만 1파운드, 피는 흘리지 않게' 떼어가라는 판결을 내려 샤일록은 큰 부끄러움을 당하고 맙니다. 물론 나체가 되는 것은 유대교에서 절대로 금기하는 사항입니다. 그들의 문화도 우리의 문화와 비슷하게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권에서는 발가벗은 사람보다 발가벗게 한 사람이나 남이 발가벗은 것을 보게 되는 사람이 더 큰 수치심을 느낍니다.

설마 점잖으신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하라고 하였겠느냐고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이것은 낯선 행동이 아닙니다. 구약성서 이사야 20장에는 인류 최초의 '나체 시위' 장면이 나옵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앗시리아 왕 사르곤이 보낸 다르단 장군이 아스돗으로 와서, 아스돗을 점령하였다." 때는 기원전 711년이었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최초의 제국(帝國)을 이룬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BC 721~705 재위)가 이스라엘에 쳐들어와 호세아 왕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아스돗이라는 곳은 앗시리아에서 이집트로 가는 요로였기 때문에 앗시리아는 이집트를 경계하려는 목적으로 이곳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그 때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허리에 두른 베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대로, 옷을 벗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후 무려 3년 동안이나 온 이스라엘을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면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음을 시위(示威)했습니다. 옷이 없어서도 아니고 신발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옷도 벗고 신발도 벗은 흉한 모습으로 거리를 쓸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으면 끝내 이런 처참한 모습의 포로가 되어 강대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이사야는 온 몸으로 설교했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의 이 기행(奇行)은 강력한 '시청각 설교'였습니다.

지금 마을 법정에서 다 벗은 모습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무언으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6-27입니다.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뿐이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데,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자애로운 나는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새번역). 그는 지금 무자비한 채권자가 아니라 '자애로운 하나님' 앞에 온 몸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내어주란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자선(慈善)행위를 하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라는 도덕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경제가 몰락했습니다. 우리나라의 97년 외환위기 이후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에도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채를 갚지 못하고 살인적인 추심(推尋)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체 포기각서까지 쓰고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채무자라고 인간으로서의 권리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죄)진 자를 탕감(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 빚(죄)을 탕감(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빚에 눌린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인간임을 주장하라 가르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마태 5:41)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아예 이 구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유명한 구절은 성서 전체에서 마태에만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도 그저 남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예수님의 권고 정도로 이해해왔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당시 누구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로마 병사들뿐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되던 강제 부역이라는 상황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역'(賦役)이란 국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지우는 노역(勞役)을 가리킵니다. 당시 정복전쟁을 위해 수없이 이동해야 했던 로마 군인들은 무거운 무기를 빼고도 평균 30~40킬로그램의 짐을 직접 졌는데, 이외 나머지 엄청난 짐들은 모두 민간인들을 강제로 차출하여 날랐습니다. 그 부역이 어찌나 무겁고 고통스러웠던지 당시 로마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의 주민들은 몽땅 산 속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이 도처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들의 횡포가 극에 달해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성이 높아지자 로마 군대는 할 수 없이 일정한 규율을 만들어 지나친 부역을 부과하는 군인들을 처벌하게 됩니다. 처벌의 종류에는 맨 발로 공공장소에 하루 종일 서 있게 하는 것부터 채찍질까지 다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병사들은 지나친 부역을 요구했을 때 자신이 처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부담과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 군인이 '그래 잘 됐다. 요즘 사람 부려먹기도 힘든데 너는 참 착한 놈이다' 할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아니, 이 자가 왜 이러지? 뭘 잘 못 먹었나? 어디서 처벌 규정을 주워들은 모양인데, 잘못했다간 내가 이 놈 때문에 봉변을 당하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무엇이 달라집니까? 이제까지 로마 병사들은 유대인들을 짐승처럼 부려먹으면서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닙니다. 한 번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유대인이 '아니 겨우 오 리라니요. 섭섭합니다. 십 리는 가야지요'하고 제 손으로 덥석 로마 군인의 짐을 어깨에 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그 뒤를 로마 군인이 졸졸 따르면서 제발 자기 짐을 돌려달라고 통사정하는 장면을 말입니다. 이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6.25를 경험한 제 아버님은 전쟁 중에 죽음보다도 싫은 것이 부역이었다고 회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죽음보다 싫다는 강제부역을 말 한마디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 아닙니까? 또 다른 반전(反轉)입니다.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교훈의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람들의 폭압과 계략에 침묵으로 따르지 말라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

교우 여러분, 이제까지 본 것처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서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착한 사람이 되어라'는 도덕론이 아닙니다. 고상한 인격과 가치를 추구하라는 윤리적 충고도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반성적으로 실피고[存心], 본성을 기르며[養性],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신중히 하라[愼獨, 戒懼]고 가르쳤지요. 하지만 그렇게 자기를 수양한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게 목표라면 이제라도 예수님보다 공자님을 따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누가 너를 때리고, 법정에 세우고, 강제 노역을 지우더라도 결코 너의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누가 너의 인간됨을 부인하고, 능욕하고, 또 말살하려 들더라도 그것을 겁내거나, 침묵하거나, 굴종하지 말고 그들 앞에서 네가 그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임을 당당히 선언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비극 중에서 최악의 비극은 젊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일흔 다섯까지 살아도 한 번도 진정으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그는 겨우 39세의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아니라 사는 동안 얼마나 사람답게 사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존엄함과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요한 10:10)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성(humanity)'입니다(칼 바르트). 지상에서 우리의 삶은 단지 내세를 준비하는 과도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신 생명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만끽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넌 아무 것도 아니야'(You are nobody)라고 할 때 우리는 '아니,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No, I am somebody)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확증합니다(창세기 1:16, 9:6).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천부적인 존엄을 지닌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인권을 침해하면 그것은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또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린도전서 12:13, 갈라디아서 3:28)고 가르칩니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동등하게 불가침의 신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이 원칙은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가장 소중한 공헌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그 사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많은 서러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대한 성서의 유산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서 앞장서 실천해 사회에 정착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볼프강 후버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그 신앙의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인권을 위한 선한 싸움에서 비켜나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성서가 이렇게 확증합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9). 오늘 하루도, 이번 한 주도 우리를 존귀하게 지으신 그 분 안에서 사람답게, 아름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8.9.16.)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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