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일상으로의 초대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Nov 05, 2018 04:56 AM KST

- 전도서 5:18-20, 로마서 12:9-15, 마태복음 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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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가톨릭 성당은 시각적 예술로 넘쳐납니다. 마리아 상이 있고, 성당 내부 양쪽 벽면에는 거의 예외 없이 십자가 고난의 길 14처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중앙 제단에는 십자가 책형상이 있고, 창은 스테인드글라스입니다. 반면 개신교 교회는 별다른 장식도 상징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만이 상징 아이콘으로 본당 정면에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인이자 가톨릭 사제인 R.S.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 - 예술의 교묘한 거세자... 당신은 따뜻한 세상에 오직 영혼의 끔찍한 무감각만을 남겨놓는다." 사실 개신교회는 주로 복음의 '언어적' 소통에 의존합니다. 대신 비언어적 상징물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청교도들과 개혁교회는 풍금을 파괴하고 스테인드글라스를 깨뜨렸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실질적으로는 '제3의 성상파괴운동'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과연 개신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시각예술을 거부하는 종교일까요?

분명 루터는 성상(icon)이 우상숭배로 기우는 것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급진적인 성상파괴자들과 맞서 성상을 두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프로테스탄트적인 시각예술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오히려 루터는 시각예술이 성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훌륭한 수단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1522년 9월에 <9월 성경>이라 불리는 그의 첫 번째 독일어 신약성서 번역판을 낼 때, 그는 거기에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설명하는 21개의 목판화를 포함시켰습니다. 이 성서는 12번이나 인쇄를 거듭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종교개혁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다음해에 루터는 구약성서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판화가 실렸습니다.

루터보다 26살 어린 장 칼뱅(Jean Calvin)은 종교개혁 2세대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인데, 흔히 우리에게는 성상반대론자로, 그리고 예술에 대해 무지한 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사실 칼뱅은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시적으로 표상하거나 표현할 때 생겨났던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간파했던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강요> 제1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놓고 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권능 역시 그 형상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아둔하여 하나님을 형상으로 지어놓은 곳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며, 그러니 숭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아름다움이 이 세계의 형태와 빛을 통해 나타나며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성화를 제외한 미술을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 결과 개혁교회가 뿌리내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바로크 미술이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이 루터의 종교개혁 501주년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종교개혁이 시각예술 특히 미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루터와 연관이 있는 당대 대표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그 가운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자 했던 종교개혁 신앙의 정수를 찾아가보고자 합니다.

먼저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입니다. '독일 미술의 아버지,' 혹은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도 불리는 뒤러는 그뤼네발트, 크라나흐와 함께 독일의 3대 화가로 꼽힙니다. 뒤러는 루터의 개혁을 지지한 인문주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루터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뉘른베르크는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비텐베르크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뒤러는 루터의 개혁의 의미와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우리는 뒤러의 그림 가운데 저 <기도하는 손>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러는 판화라는 매체를 즐겨 다뤘습니다. 뒤러의 판화는 어느 판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그 자체로 독립된 미술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멜랑콜리>라는 작품에서 저 천사는 왜 저렇게 우울할까요. 얼굴 표정이 생생합니다. 성서의 내용을 몇 개의 키워드와 함께 시각적으로 요약한 판화는 성서의 메시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을 감당했습니다. 게다가 판화는 가격이 저렴했고 손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장점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성상숭배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검은 잉크로 종이에 찍힌 이미지는 화려한 색채와 금박으로 장식된 장엄한 성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뒤러가 1498년에 제작한 <네 기사>라는 작품입니다. 말을 탄 네 기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상징들을 손에 들고 화면을 가로질러 질주합니다. 전염병 페스트의 기사, 칼을 든 전쟁의 기사, 천칭을 든 기아의 기사, 그리고 늙은 말을 타고 달리는 피골이 상접한 죽음의 기사입니다. 말발굽 아래 쓰러져있는 사람들 중에 교황의 모자를 쓴 인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지옥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약 20년 전에 그려진 이 판화에서 뒤러는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식을 보여주었습니다.

1526년 작 <네 사도>입니다. 등장인물은 요한과 베드로, 그리고 바울과 마가입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에서 중심이 되는 사도는 항상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요한이 더 중요한 사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복음서를 쓴 마가보다도 바울이 더 중요한 인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루터는 바울을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적 교부로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도가 모두 성서를 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써 뒤러는 '오직 성서'를 강조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그림 속에 내포된 종교개혁의 정신은 <무성한 풀 한 포기〉라는 작품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자연사박물관의 사진이 아닙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사실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묘사는 뒤러가 얼마나 이 세상의 만물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 종교개혁 신앙의 소유자였는지 보여줍니다. <새의 날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넘은 1512년의 작품인데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 같습니다. <토끼>나 <부엉이>의 묘사도 세밀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만물 속에서, 즉 사소해 보이는 풀 한 포기나 작은 새 한 마리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뜻을 음미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가 드러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예술의지고 감성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의 화가'라 불리는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종교개혁의 현장을 캔버스에 옮긴 화가'로도 불리는 크라나흐는 뒤러와 함께 '독일의 3대 화가'로 손꼽히는 화가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도시인 비텐베르크의 시의원과 시장을 역임했는데, 루터와 깊은 친분을 쌓았고 그의 종교개혁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루터와 크라나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두 사람이 각각 상대의 자녀의 대부(代父)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루터는 크라나흐의 딸 안나의 대부였고, 크라나흐는 루터의 첫 아들 한스의 대부였습니다. 이렇게 루터의 집안과 가까운 크라나흐는 루터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을 뛰어난 초상화로 남겼습니다. 크라나흐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루터와 그의 가족들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라나흐는 통해 루터는 교황에 도전한 깡마르고 진지한 수도사로, 바르트부르크 요새에 숨어 지내던 융커 외르그라는 가명의 인물로, 학식 있는 교수로, 그리고 카타리나 폰 보라의 남편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죽음 모습도 그렸습니다. 평생 선한 싸움 다하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루터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크라나흐의 그림 중에서 <아담과 이브>를 많이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당시 궁정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아담과 이브였기 때문에, 크라나흐는 평생 동안 이 주제로 약 50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크라나흐의 그림 중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그림은 아담과 이브 시리즈가 아니라 1529년에 그가 그린 <율법과 은총>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은 중앙에 서있는 나무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누어집니다. 왼쪽에 죽음과 죄로 귀결되는 율법의 세계와, 오른쪽에 믿음과 구원이 이뤄지는 은총시대로 선명하게 나뉩니다. 왼편에서는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음과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해골 모습의 죽음과 사탄에 의해 지옥불로 쫓겨 가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 판을 가리키는 모세의 행동은 인간에게 죄가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실로 냉엄한 심판과 엄격한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오른편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은총과 구원의 새 시대가 열립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 경배하고 있는 인물은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받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지고 다른 누군가의 중재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됨을 나타냅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값없이 주어진다는 루터의 칭의(稱義)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547년 작 <주님의 만찬>입니다. 루터의 '성만찬 신학'을 잘 보여주는 이 그림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텐베르크 성당으로 가보아야 합니다. '루터의 도시'라 불리는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입니다. 여기에는 루터의 생가와 기념비가 있습니다. 뒤로 '종교개혁의 모(母)교회'라 불리는 성마리엔(St. Marien) 교회가 보입니다. 교회 앞 광장에는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루터는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으며, 여기서 폰 보라와 결혼했고, 이 교회에서 6명의 자녀들을 세례받게 했습니다. 루터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이 역사적인 교회의 한 중앙 종교개혁제단(Reformation Altar) 앞에 바로 크라나흐가 그린 <주님의 만찬> 그림이 있습니다. 모두 3단화인데 중앙에 있는 것이 <주님의 만찬>입니다. 루터가 사도들과 함께 앉아 있는데 포도주 잔을 받아 관람자와 회중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성찬식에 대한 공격으로, 주님의 만찬에 평신도도 떡만이 아니라 잔에 참여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 그림 아래에는 크라나흐의 또 다른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루터>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가장 잘 표현된 그림으로 평가됩니다. 설교를 하는 루터는 한 손으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루터가 아니라 루터가 가리키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기초입니다. 이와 같이 루터의 친구 크라나흐는 미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횃불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새로운 신앙을 사람들이 알기 쉬운 시각 이미지로 번역해주었기에 루터의 신학과 사상은 널리 퍼져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hias Grünewald, 1470년경 - 1528년)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만나보려 합니다. 뒤러와 크라나흐 그리고 그뤼네발트는 독일을 대표하는 3대 화가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이 그림은 1512년과 1515년 사이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루터가 제시한 '십자가 신학'이 정확히 표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변에는 집도 없고 군인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좌우에 달려 있던 두 강도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배경은 아주 진한 어둠으로 덮여 있습니다. 루터가 말한 '숨어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빈 공간에 서 있는 커다란 십자가보다 이것을, 즉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는 루터의 신학을 더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니 다듬지 않은 거친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십자가는 거기에 달리신 분의 무게 때문에 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비참하고 참혹하게 묘사한 작품은 이전에 없었습니다. 정말로 이사야 53장이 묘사하는 "아름다울 것도 [하나] 없는" 모습입니다. 오른편에서 아주 긴 손가락을 가진 세례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가리킵니다. 그의 손가락 위에는 라틴어로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 아래 작은 양과 작은 포도주 잔이 보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는 말씀의 선포가 성만찬보다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그뤼네발트의 이 그림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완벽하게 시각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음으로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홀바인은 다빈치와 이탈리아 천재들이 활동하던 르네상스 전성기를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출판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인문주의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하면서 종교개혁에 일익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대의 종교를 통쾌하게 비판한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일하던 홀바인은 글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글 옆 여백에 삽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이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무지한 신앙을 예리하게 비판한 에라스무스의 지성적인 글쓰기에 천재 화가 홀바인의 삽화가 더해지자 종교개혁의 메시지가 역동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후 홀바인은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친구이며 유명한 저서 <유토피아>의 작가인 토머스 모어는 그가 영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해주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홀바인은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국정화가가 됩니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모습입니다. 당시 국왕은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불화 중에 있었습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첫 번째 왕비인 스페인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새로 결혼하고자 했습니다. 홀바인이 그린 <앤 불린>의 모습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어머니가 되지요. 결국 헨리 8세는 이혼 승인을 거절하는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을 자임하며 영국에서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킵니다. 다시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입니다. 근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겉모습 밑에는 정치적인 냉혹함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연약하면서도 이기적인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그의 눈빛과 작은 입매로 숨김없이 표현했습니다. 홀바인이 얼마나 예리한 안목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말해주는 작품입니다.

홀바인의 최고의 걸작은 <프랑스 대사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영국과 교황청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대사들이 왔습니다. 두 사람 가운데 왼쪽이 이 그림을 주문한 프랑스의 외교관이고, 오른쪽이 프랑스의 주교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 안에는 무척 많은 메시지가 암호처럼 숨어 있습니다. 윗부분 고급융단 위에는 천구의(天球儀), 사분의(四分儀), 다면 해시계, 토키텀(torquetum) 등, 당대 최고의 과학 지식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보입니다. 하단에는 찬송가가 보이고 류트라는 이름의 악기가 보이는데 줄이 끊어져 있습니다. 신구교의 불화와 단절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그림 하단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보입니다. 잘 보면, 해골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힘을 가진 외교관들이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해골그림은 전도사 1:2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틴어로는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생의 무상함을 해골로 그리는 기법을 '바니타스'(vanitas)라고 부릅니다. 이 주제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북유럽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더욱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왼쪽 상단 커튼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대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과 물질이 중심인 세계가 친 커튼 뒤에 가려져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의 통치자로 그림 맨 위에서 그림 전체를 대각선으로 가르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홀바인은 이처럼 자기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힘을 가지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축적인 작품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대표적 풍속화가'라 불리는 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피테르 브뢰헬(Pier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의 작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가톨릭인 스페인 국왕은 브뢰헬의 네덜란드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무려 6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이 나라를 통치하며 가혹한 박해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폭력과 억압의 시절에 종교개혁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 사람이 브뢰헬입니다.

그의 <영아살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성서에서 헤롯이 예수님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그 때 태어난 모든 아기를 죽이라 명령했던 그 유명한 이야기를 브뢰헬은 자신이 살던 당시 상황으로 풍자했습니다. 스페인 군인들이 아기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그림입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장교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병사들이 아기들을 찔러 죽입니다. 절규하는 엄마들과 아이들을 뺏으려는 병사들. 그런데 왼쪽에서 두 번째 하얀 눈이 덮여있는 집 오른쪽 벽에서 한 병사가 노상방뇨를 하고 있습니다. 웃어야 할까요.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비극에 대한 브뢰헬의 유머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브뢰헬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티브들은 거의 다 성서의 비유에서 나옵니다. 브뢰헬이 그린 <바벨탑>입니다. 브뢰헬은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이 주제를 그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스스로 진리를 자처하고 구원을 성취하려는 인간의 교만함이 궁극적으로 가닿게 될 재앙이 무엇인지 암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브뢰헬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시대를 고발하면서 예리한 비판을 가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망을 그렸습니다. 대안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희망은 너무도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상을 그렸습니다. 일상의 구차함을 가감 없이 그렸습니다. 그는 미래에 있을 법한 환희를 상상한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일상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농민들의 소박한 삶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가 대면한 일상은 비록 남루했지만 거기에는 아직 오지 않은 궁극적 소망이 담겨 있었기에 견딜만했습니다. 평범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 것이었기에 살아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화단을 가꾸는 사람들>입니다. 그 억압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정원을 가꿉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들판입니다. 고된 노동의 대가로 노란 곡식이 무르익고 그것을 추수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에는 풍요가 가득합니다. 마을에서는 잔치가 열립니다. 비록 험하고 고된 일이지만 하늘이 풍성한 열매를 주시니 축제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노동의 신성함을 그린 브뢰헬은 <음식의 천국>이라는 그림에서 게으름을 경계했습니다. 누워있는 사람들이 나무 위에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음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노동의 신성함과 직업 소명설을 이야기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거리가 멉니다. 그런 종교개혁의 새로운 정신이 브뢰헬의 그림 안에 있습니다. 브뢰헬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결혼식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신랑과 신부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이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동등한 자격으로, 동일한 비중으로 잔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동등한 사제임을 이야기한 루터의 정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이카루스의 신화를 아시는지요. 깃털 밀납을 이용해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카루스와 그의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태양 가까이 가면 떨어질 거라는 아버지 경고를 무시하고 아들은 너무 높이 날다가 바다로 추락합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나요. 그런데 그림 속에서 이카루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카루스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하늘에는 이카루스가 없습니다. 자세히 보니 브뢰헬은 이미 바다에 떨어져 발만 보이는 이카루스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은 이 소란의 와중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농부와 양치기와 낚시꾼입니다. 이카루스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열심히 가꾸고 있는 이들이 바로 '하늘을 나는' 주인공들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브뢰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저렇게 일상 가운데 누워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성상의 파괴자,' '예술의 거세자'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화가들은 더 이상 이콘과 같이 천상의 것을 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푸른색 물감과 황금을 덕지덕지 붙이는 화려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연을 그렸습니다. 일상을 그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은혜와 사랑을 그렸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에 빛나고 있는 영원을 그렸습니다. 고된 노동과 시련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렸습니다. 그것이 개신교적인 예술의지(Kunstwollen)이고 감성이며 정신입니다.

가수 신해철 씨의 노래 가운데 <일상으로의 초대>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 요즘엔 뭔가 텅 빈 것 같아 / 지금의 난 누군가 필요한 것 같아 / 친굴 만나고 전화를 하고 / 밤새도록 깨어있을 때도 / 문득 자꾸만 네가 생각나 /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난 널 느껴 / 내게로 와 줘 내 생활 속으로 / 너와 같이 함께라면 / 모든 게 새로울 거야 /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 너와 같이 함께라면 / 모든 게 달라질 거야..." 여기 '너'를 주님으로 바꿔 읽어 보았습니다. '내게로 와 주십시오. 내 생활 속으로.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게 새로울 겁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주님과 같이 함께라면 모든 게 달라질 겁니다.' 교우 여러분,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여러분의 일상을 성실하게 가꾸고 그 안에 보석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신실한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드린 공동의 기도처럼 "사랑이지만 늘 곁에 있어서 사랑인 줄 모르는, 고마움이지만 늘 주어진 것이어서 고마움인 줄 모르는, 우리들의 지극히 평범한 감사와 사랑"을 잘 지켜가시길 바랍니다.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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