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공평하신 하나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Nov 19, 2018 11:21 AM KST

- 이사야 64:7, 에베소서 2:8-10, 마태복음 6: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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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농부들만큼 추수의 기쁨과 감사를 알겠습니까마는,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신약성서에서 '감사하다'라는 뜻의 동사 '유카리스테오'나 '감사'라는 뜻의 명사인 '유카리스티아'를 살펴보면, 성서가 말하는 감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행위가 감사이며,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의롭고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드는 능력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 가정에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홀로 멀리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산모가 병원에 실려 갔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로 가는 긴 비행시간 동안 첫 아이를 낳을 때만큼의 기대와 설렘은 없었습니다. 새로 태어날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첫 아이처럼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이 한 남자와 여자의 인생에서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 일이 한 번 경험한 일이 되고 보니 어느새 기대와 설렘이 반감되고 있었습니다. 역설이었습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중차대한 일에 제가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모순이었습니다. 어떻게 '새 것'에 우리가 익숙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14시간의 지루한 비행 끝에 자정에 가까워 병원에 당도했을 때, 탈진해 누워있는 엄마 옆에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는, 겨우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둘째 아이를 처음 안아보는 순간 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전혀 새로운 감격과 환희가 제 가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랐습니다. 첫 아이를 안았을 때와 '질적으로' 다른 감동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반복된 한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새 사건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14시간 동안 날아온 태평양 상공의 길보다 더 멀고 험한 길을 찾아와 내 가정과 세상 안으로 한 생명이 박차고 들어온, 완전히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에 감사가 없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색깔과 이미지로 세상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왜 우리의 삶은 늘 피로에 지쳐있습니까? 삶과 생명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메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날마다 새 태양이 뜨게 하시고 생명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는 늘 벅차고 아름답기만 한 감격의 사건들을 일상적이고 당연하고 지루한 것들로 간주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삶과 생명에 대한 '원초적 감사'(The Basic Thanks)가 부와 명예와 쾌락에 대한 '원초적 본능'(The Basic Instinct)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하루 종일 피곤하다는 이유로 병원을 찾았습니다. 주말이면 푹 쉬고 별 무리를 하지 않는데도 월요일만 되면 식욕이 떨어지고 피로감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한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조립벨트를 따라 자기 앞으로 부품이 오면 간단히 손을 보고 옆으로 흘러가게 하는 작업이었는데, 이제는 아주 숙련이 되어 딴 생각을 하면서도 불량품을 내지 않을 정도로 능숙해졌다고 합니다.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직장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의사에게 우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심각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조립대 히스테리,' 즉 단순한 일을 반복하면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처럼 모든 것이 기계화, 자동화, 전문화, 조직화되어 결국 단조로운 일을 반복하게 되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공통된 증상입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상식 중 하나는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보다 복잡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는 예단입니다. 하지만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이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야기한다는 것이 여러 실험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체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고 이것이 혈액이나 소변으로 검출되는데, 실험을 해보니 단순한 반복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신경전달물질들이 더 많이 검출되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혹 삶이 단조롭고 지루합니까? 내 삶이 쳇바퀴 속의 다람쥐처럼 여겨집니까? 일과 학업에 대한 흥미와 도전의식이 상실되었습니까? 일과 생활과 학업의 공간은 깨끗한데 몸이 늘 피로합니까? 공부든 일이든 그것을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설렘과 기대감이 사라졌습니까? 무언가 해보겠다는 도전정신과 모험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것을 해보려는 창의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까? 조금씩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기 시작합니까? 대신 늘 시간에 쫓깁니까? 시험과 업무에 대한 긴장이 꼬리처럼 이어집니까?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도 혹 책을 손에 들고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까? 친구들과 사교활동 하는 시간도 아까워집니까? 심지어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집니까? 잠자리에 들어도 무엇인가 제대로 마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까? 휴일이라고는 없습니까? 일주일에 최소한 하루도 놀이와 취미로 지친 심신을 풀어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렇게 쫓기다가 점점 가족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와 넉넉함도 사라집니까?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명이라는 기적과 구원의 신비와 일상의 은총에 감탄해야 합니다. 날마다 창조의 새 아침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큰 일, 혹은 중요한 사건에만 감사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삶과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감사가 빠져 있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은혜로 주시는 햇빛과 단비와 물과 공기의 감사함을 잊게 합니다. 그것들을 당연한 것들로 간주하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도 우리의 각막에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볕과 신선한 물과 맑은 공기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뽀얀 새 살이 우리 영혼의 굳어진 마음에 돋아나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는 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총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훈 목사의 기도시 <이제야 알았습니다>를 읽어보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 많이 걷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 / 반나절 한나절을 걸어다녔던 / 내 유년의 가난이 은총이었음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 / 될 수 있으면 / 섬유질 음식으로 식단을 개선하는 것이 / 좋다는 말을 듣고 / 고구마 서너 개 / 무 잎 물김치로 겨울 점심 대신했던 / 내 유년의 배고픔이 은총이었음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 / 언제나 나누고 살아야 /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고 / 눈깔사탕 나눠 물고 / 차마 깨물지 못한 / 눈물 같은 세월이 은총이었음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의 가난이 오히려 축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는 이렇게 깨달음에서 옵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깨달음에서 비로소 감사가 시작됩니다.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 씨의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초, 그는 자신이 펼쳤던 문화운동에 좌절하여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김제, 전곡, 민통선 등지를 떠돌며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숨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4년간의 체험을 통해 그는 농부의 심성을 배울 수 있었고 비로소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깊은 안목도 얻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민통선 안에서의 마지막 해인 1983년 어느 날 물꼬를 트려고 흙 한 덩어리를 삽으로 퍼냈다. 물줄기가 시원스럽게 터졌다. 문득 오랫동안 나를 짓눌러오던 낱말들, 창조, 생산, 진보, 예술... 지고의 가치로 여기던 것들의 허울을 알았다. 농사야말로 인간의 창조적인 노동이 주가 돼 얻을 수 있는 산물이라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큰 햇살과 바람, 흙과 물, 벌레들은 서로 돕고 있었는데 나는 고작 삽질 한번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노동이, 인간의 노력이,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창조의 주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봄과 여름에 큰 햇살과 바람, 흙과 물, 벌레들이 소리 없이 서로 도와 들판의 알곡을 살찌우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 '고작 삽질 한번'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렇게 은혜에 대한 겸손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내가 했다고 착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돌보시고 이끄셨다는 깨달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그 모든 은총을 기억하는 행위가 감사입니다. 그 감사가, 그런 깊은 영적인 기도가 우리의 삶을 새롭고 의롭게 할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각자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자 하나 때문입니다. '비교의 자'입니다. 그 자는 사물을 올바로 재고 판단하게 해주기보다는,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본능적인 질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입니다. 마치 우리는 독 묻은 칼을 하나 지니고 다니는 것처럼 늘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사실 질투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본능적인 감정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릴 적 일입니다. 네 살 형이 갓난아기 아우를 질투해서 어른들 몰래 꼬집고 얼굴을 할퀴곤 하더군요. 새로 태어난 아우에게 부모의 사랑과 주위의 관심이 소나기처럼 쏟아지자, 소외와 질투의 감정은 드디어 퇴행현상도 불러왔습니다. 새삼스럽게 바지에 오줌을 싸버림으로써 어른들의 관심을 끌려했고, 기껏 이유식으로 바꾸어 놓은 식사습관을 버리고 갑자기 다시 젖이나 우유를 먹으려 했습니다. 이 모두가 질투의 감정, 아니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이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어른들은 오랜만에 동창회에 다녀와서 괜스레 침통해지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반가운 옛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겁게 이야기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왜 홀로 불편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까? '비교의 자' 때문입니다. 이 자의 특징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남의 것만 열심히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잔디밭과 같아서 속속들이 비어보이는 내 인생의 잔디밭과 달리 멀리 보이는 남의 집 잔디밭은 참으로 푸르러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면 그 집 잔디밭도 속속들이 비어있는데도 말입니다.

질투는 사랑을 듬뿍 받고 싶다는 강렬한 표현의 하나이고, 오직 따스한 관심과 사랑만이 그 치료책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질투라는 감정은 시샘으로 뭉친 못된 감정이라기보다, 사랑 받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는 외로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질투는 결코 조용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몹시 격렬한 감정이어서, 타인에게 무서운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자신에게는 불행의 불덩이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것을 물리치고 동생 아벨의 제사를 먼저 받으셨을 때 가인은 질투심의 극치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성서가 질투를 '악의 눈'이라고까지 표현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과연 씻을 수 없는 원죄처럼 우리의 영혼 깊이 도사리는 이 질투라는 감정을 극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엘사 타메즈(Elsa Tamez)라는 남미의 유명한 여성신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자비한 경쟁사회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불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완전한 존엄성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공적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시장에서 가장 비싼 우유나 가장 유명한 상표와 상품을 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엄성이란 선물이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깊은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신학자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장의 '상품'(commodities)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masterpieces)입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에베소서 2:10, 새번역). 사실 질투란 자기가 이미 가진 것에는 전혀 의미를 두려고 하지 않고, 대신 타인이 갖고 있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고유한 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상품처럼 자신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면서 학대하는 감정이 질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는 어떤 옹기가 '나는 다른 옹기처럼 저렇게 멋있게 만들지 않고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불평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이사야 29:16, 45:9, 64:7, 그리고 로마서 9:18-21). 많은 목사님들은 옹기는 옹기장이가 만든 대로 살 것이지 아무 불평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그 구절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앙심 좋은 말씀처럼 들리나, 이 해석은 정당한 비평을 가로막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불평이 왜 잘못됐는지를 바로 짚어주지 못합니다. 만약 그 불평하는 옹기가 사실은 편협한 눈으로 자신을 초라하고 비루하게 바라보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옹기장이인 하나님은 옹기 하나하나마다 정성을 다해 각각의 고유한 멋을 살려 눟았건만, 그 불평하는 옹기는 어떤 특정한 옹기를 지목하면서 '내가 왜 저 옹기처럼 상품성이 없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인데도 왜 다른 상품과 자신이 다르냐고 불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본문을 다시 이해하면 이 이야기는 옹기는 옹기장이 하나님이 '맘대로' 빚은 대로 체념하고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상품'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든 옹기장이의 깊은 뜻을 깨달으며 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락과 깊은 가사로 인해 교회에서 많이 불리는 찬양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사자가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의사의 실수로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밖에도 이 노래에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무엇이 공평합니까? 가난한 집안에 장애인으로 태어나 재물도, 지식도, 건강도 없는데, 옹기장이는 그런 옹기를 빚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공평합니까? 시인은 재물이 없기에 대신 가지게 된 것,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대신에 보고 듣게 된 것, 그래서 남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똑같은 은혜와 사랑을 받은 것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상식과 지식을 깨고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선언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배운 것이 많으며, 건강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일 것입니다. 하지만 송 시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것은 세상의 모든 잘나고 부유하다 뻐기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질타하는 믿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비교의 잣대로 내게 없는 것, 대신 남이 가진 것을 보며 '하나님이 왜 이리 불공평하시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에스겔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에스겔 18:25, 29)

19세기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필적이다"(Beauty is God's handwriting)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화려한 색깔로 피는 작약 꽃도 아름답지만 바위 틈새에 숨어 피는 작은 들꽃도 아름답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잉크로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입니다. 이 천상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비교의 잣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 받은 고유한 작품이라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믿음이 있으십니까?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왜 날마다 감사가 넘치지 않았겠습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시장의 상품'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대가, 우리의 문화가, 우리의 직장이,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상품'처럼 취급하려 할 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나는 이대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이대로 온전합니다. 나는 물건처럼 사고팔거나 상품처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에 단 하나의 존재입니다!' 여러분을 지으시고 '좋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고 경탄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과 일상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는 감사의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그 감사의 기억이 여러분을 살리고 새롭고 의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감사의 노래가 여러분의 삶에 또 다른 감사와 기적을 날마다 낳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5-26). 아멘. (2018.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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