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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진의 횡설수설] 웃음이 있는 교회

입력 Dec 28, 2018 09:28 PM KST

2년 전, 성탄절에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에 세례식을 하곤 하지 않는가? 그 장면을 떠올려 보라. 엄숙함이라곤 찾을 수 없는 우리 시대 교회들에서도 온갖 거룩한 척을 해대는 시간. 덤앤더머 같은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하나의 조를 이루어 세례식을 진행한다. 한 명은 성스럽다고 주장되는 생수를 그럴듯한 용기에 담아 서있고, 한 명은 성스럽다고 주장되는 자신의 직함을 그 생수에 적셔 피세례자의 머리에 얻는다. 여기서 피세례자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묘하게 찌푸리며 '아멘'이라는 주문을 적시 적소에 발설하면 할수록 그 순간은 묘하게 거룩한 것 같아지곤 한다.

바로 그 때, 상황이 발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부목사가 발을 헛디뎌 10m쯤 안 넘어지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은 넘어져 버린 것이다. 세속인들이 모여 온갖 노력을 다해 거룩한 장소를 세팅했는데 그렇게 한 순간에 그것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넘어진 부목사. 엎질러진 성수. 당황한 담임목사. 웃음 참는 피세례자.

내 평생 단 하나의 웃긴 장면을 꼽자면 바로 이 장면이다. 내 평생 이렇게 모든 웃음의 요소가 결집된 순간을 본 적이 없다. 여기저기 웃음 참는 탄성이 삐져나왔다. 그런데 이 장면을 바라보는 모든 성도들은 왜 웃음을 참아야만 했던 것일까? 이러한 웃음 참기는 단순히 웃음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정될 기회 자체를 몰아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웃음이 우리 스스로를 교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것들에 대해서 웃게 되는 것일까? 먼저 우리는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는 웃지 않는다. 동물이 웃긴 경우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그 동물의 표정, 동작이 인간의 것과 닮아 있는 경우다. 그리고 우리는 웃기는 대상에 공감하고 있을 경우 웃지 못한다.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공감하면 할수록 그 상황에 웃기보다는 아파한다. 웃음을 유발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처지에 같이 공감하는 사람은 웃기보다는 조마조마해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음 집단, 즉 교회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부목사가 넘어져서 성수라고 주장되는 물이 쏟아졌을 때, 거룩한 척 하던 그 담임목사의 미간이 찌푸려졌을 때 웃음에 동참하기 힘들 수 있다. 교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깔깔거리고 웃는다면 형체 없는 웃음에 함께 동참하겠지만 그 순간이 필자처럼 일생일대의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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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pixabay)
▲장효진의 횡설수설

그래서 감정적으로 공감될 수 없을 만큼 거리가 유지된 대상이 돌에 걸려 넘어질 때, 혹은 누군가의 의자 빼는 장난에 의해 넘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고 웃는다. 돌이 나타난 새로운 상황, 의자가 뒤로 빠진 새로운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실수한 경우들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들은 자연스럽기보다는 뻣뻣하고 경직되어 있다. 대상이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는 우아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뻣뻣해 보이고 그런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삶은 매순간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만 한다. 언제 무엇이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고 그 갑작스러운 물체의 등장에 나는 심하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순간 그렇게 주의를 집중하면 우리는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에 유연하게 대처하기보다는 늘 하던 대로 반복한다. 그러한 기계적 반복들이 유연함을 요구하는 순간에도 계속된다면 우리는 분명 실수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수가 또 다시 우리를 웃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웃음이 이런 것이라면, 웃음은 우리의 실수를, 뻣뻣함을, 무의미한 반복을 교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한바탕 웃어댈 때 웃음거리가 된 사람은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서둘러 교정하곤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웃음거리가 되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웃음거리가 된 이상, 다시 그 상황을 반복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거울을 보고 자신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온다면 주의를 집중하여 그 상황에 새롭게 대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웃음을 통해 사회를 교정한다.

하지만 교회에서 우리는 맘 놓고 웃지 못한다. 근엄하고 거룩한 척 하는 이들의 실수만큼 더욱 웃긴 상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부목사가 발을 헛디뎌 넘어져버린 실수, 그 새로운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담임목사의 뻣뻣함, 그 속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룩한 척 치장된 세례식'의 무의미한 반복들. 그것들만큼 웃기는 상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웃음을 참아왔다. 웃음을 통해 개인의 실수, 뻣뻣함, 상황에 맞지 않는 반복을 교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의 실수, 뻣뻣함, 무의미한 반복을 교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게 웃지 못했다. 그래서 교회는 아직도 그렇게 뻣뻣하다.

그렇다. 교회는 때로는 근엄하고, 무거워야만 하며, 거룩하기도 해야 하는 곳이다. 어찌보면 종교적 삶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리네 인간들이 감당하기 힘든 무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거룩한 종교적 행위를 감당할 때 실수를 하곤 한다. 때로는 뻣뻣하지 않을 수가 없다. 늘 하던 대로 반복하는 완고한 고집쟁이가 될 수도 있다. 그 때 우리의 실수를 향해 웃어주는 동지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나의 실수를, 경직성을, 완고함을 더 쉽게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지금 충분히 웃고 있는가?

교회에서 우리는 누군가 실수를 해도, 뻣뻣한 모습을 보여도, 완고한 고집을 부려도 실례가 될까 웃음을 참는다. 우리는 교회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 함부로 웃지도 않는다. 웃음이 없는 교회에서는 점점 더 실수가 잘못들이 되고, 뻣뻣함은 마비가 되고, 완고함은 폭력으로 돌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웃음을 참고 다들 쉬쉬하기만 하니 교회 내에서 우리들이 얼마나 웃기는 짓들을 하고 있는지 우리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2019년 우리가 만들어 가는 교회 공동체는 웃음이 넘쳐났으면 좋겠다. 서로의 실수를 웃음거리 삼아 함께 웃고 교정해 가며 더욱 유연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의 실수는 별일이 아니다. 그저 웃고 말 일이었다. 우리의 모든 실수들은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마냥 큰 것들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데 우리의 실수가 그토록 무거울 리 있겠는가? 신도 우리의 실수를 보며 그렇게도 웃고 있는지 모른다.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이 대나무 숲을 통해 퍼지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대나무 숲을 잘라버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웃음 창구를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웃자! 또 웃자! 웃음은 반드시 우리의 교회들을 조금 더 자연스럽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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