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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기] Day 12. 슬픔이 주는 침묵

글·이재훈 목사(쓰임교회 담임)

아헤르(Ager) - 부르고스(Burgos): 8시간 (2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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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순례를 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나이에 따라, 목적에 따라, 성별에 따라, 국적에 따라 또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순례 또한 이러할 진대, 우리네 인생은 어찌 다른 이들과 같아지지 않아서 그렇게 안달일까? 긴 호흡이 필요한 시대이다.

가장 믿기 힘든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던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가리산지리산이다.

발목이 아픈 현정이와 그녀의 동행이 되어주는 절친 지혜. 그녀는 현정이를 돌봐주기 위해 개인 스케줄을 조정했다. 그리하여 현재 그녀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마을과 마을을 이동 중이다.

의지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현정이는 너무 속이 상하다. 이곳이 산책하듯 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쉽게 떠나지도 못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라도 길 위의 시간을 늘리고 싶은 것이 그녀들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순례도 세진, 선영,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동행이 된다.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마음의 갈피를 잡기 힘든 날이다. 마음이 들쑥날쑥하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선영이가 떠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의 속도로 계속 걷다가는 콤포스텔라에 도착할 수 없다. 그녀에겐 충분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까미노를 걷다보면 선영이처럼 완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 순례자들도 만나게 된다. 자신만의 보폭이 있듯이 자신만의 순례기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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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점심을 먹고 잠시 근처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은 박물관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곳엔 많은 순례자들의 그림이 있었다. 왠지 그 그림들이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묵묵히 바라보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었다. 내 삶의 몫인 배낭을 둘러매고.

그래서 그녀는 대도시 부르고스를 기점으로 평소 걷는 거리의 일주일 정도를 건너뛸 예정이다.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걷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나타났고 마음에 깃든 슬픔이 둘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든다. 하고 싶은 말과 보여주고 싶은 행동을 정확히 반대로 하는 스스로가 답답해 기분은 더욱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모든 이별은 익숙하지 않다.

체코 출신의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슬픔' 속에서 새로운 것, 뭔가 깊고 더 확실한 것을 경험하라고 한다. 하지만 슬픔은 늘 친해지기 어려운 법! 나는 그 적막 속에서 침묵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는 말한다. "슬픔이란 무언가 새로운 것, 무언가 미지의 것이 우리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 우리들의 감정은 어쩔 줄 모르는 당혹감 속에서 입을 다물고, 우리의 내면의 모든 것은 뒤로 물러서고, 적막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새로운 것이 그 적막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p.81)

사고가 난 것이다. 그 사고는 내 안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설명하려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결핍이 존재한다. 언어의 한계다. 슬픔의 발생이 나의 입을 봉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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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밀밭을 바라본다. 저 길로 걸어가면 깡통로봇, 사자, 허수아비 그리고 도로시를 만나게 될까?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슬플 때 충분히 슬퍼하는지를 말이다. 슬픔은 정말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감정이 다가오면 회피하기 일쑤다. 우리는 슬픔을 잊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시끄럽게 떠들거나 술에 의존한다.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위의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런데 그렇게 한들 슬픔이 잘 가라앉던가? 잠시 망각할 뿐이다. 회피한 감정은 반드시 돌아온다.

슬픔은 제 때에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모르는 순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은 피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어야 한다. 회피가 아니라 직면해야 한다. 슬픔에 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현듯 그 때의 감정이 솟아올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릴케는 다시 한 번 말한다.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그리고 아둔하게 치료한 질병처럼 그런 슬픔들은 물러나는 척하였다가는 짧은 잠복기가 지나고 나면 전보다 훨씬 무섭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들이 가슴 속에 집적되어 인생이 되면, 그 인생은 제대로 살지 못한 삶, 거부된 삶, 실패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책, p.81)

슬픔은 익숙하지 않다. 좋은 감정을 갖게 한 사람 혹은 그 시간과 장소와의 헤어짐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슬픔을 충분히 알아줘야 한다. 슬픔을 다룰 적당한 방법을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 슬픔으로부터 도망치진 않을 예정이다. 슬퍼하는 자아를 꼭 껴안아줘야겠다. 오늘은 참 슬픈 순례길이다.

김진한 jhkim@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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