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Jan 29, 2019 04:06 PM KST

- 출애굽기 18:17-22, 에베소서 4:7, 11-12, 마가복음 9:3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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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출애굽기 18장에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위와 장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Jethro)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친정에 돌아와 있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Zipporah)와 그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가 진을 치고 있는 광야로 찾아갔습니다. 부부싸움 끝에 십보라가 친정에 와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는 대사역의 와중에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었을 모세에게 아마 완전한 자유를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성서학자들 중에는 십보라가 가정이라고는 전혀 돌보지 않는 모세와 이혼하고 친정에 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진 않습니다.

모세가 장인을 만나러 나와서 그에게 절을 하고 입을 맞춘 후,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야훼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셨는지를 자세히 설명했고, 이드로는 그 일을 전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공동으로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이 지혜로운 장인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조언을 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송사를 다루려고 자리에 앉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다스리는 이 일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백성의 일을 어찌하여 이렇게 처리하는가? 어찌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을 모두 자네 곁에 세워 두고, 자네 혼자만 앉아서 일을 처리하는가?" 장인은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며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위가 자랑스럽지도 또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얼마나 속으로 흐뭇했겠습니까? '우리 사위 고생하는데 보약이나 지어 줘야지'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 장인은 따끔하게 충고합니다.

모세가 반쯤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저를 찾아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저에게로 옵니다. 그러면 저는 이웃 간의 문제를 재판하여 주고,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나를 믿고 찾아오는데 어떻게 거절하느냐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일 뿐만 아니라 이웃 간의 사소한 문제 등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자기에게 달려오는데 무슨 수로 뿌리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는 것처럼 고맙고 흐뭇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일이 생길 때마다 나를 찾아와 내 판단과 의견을 묻고 그대로 행한다면 그보다 더 기분 좋고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눈에는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이드로의 눈에는 지금 '권력의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사위 모세의 속마음이 읽혔던 것입니다.

이드로가 모세에게 말합니다. "자네가 하는 일이 그리 좋지는 않네. 이렇게 하다가는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와 함께 있는 이 백성도 아주 지치고 말 걸세. 이 일이 자네에게는 너무 힘겨운 일이어서, 자네 혼자서는 할 수 없네. 이제 내가 충고하는 말을 듣게." 여러분, 아무리 장인이지만 한 백성의 존경과 추앙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모세에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의 장인어른이 살아계실 때에도 그 분은 그 분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제가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하는 것같이 보이면 아주 어렵게, 간접적으로, 사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씀을 꺼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아주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중요한 충고를 던집니다.

"하나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자네는 백성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일을 아뢰게." 영어성경에는 "You should represent the people before God, and you should bring their cases before God"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앞서 모세는 백성이 무슨 일이든지 가지고 오면 '자신이 이웃 간의 문제를 재판하여 준다'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I decide between one person and another"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백성의 문제를 모세가 결정하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before God) 가지고 가서 그것을 '대변'(represent)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백성의 문제를 대변하는 '대변자'(representative)가 되어야지 '결정자'(decision maker)기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드로의 말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자네의 지도력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네. 그 재미에 푹 빠져서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어. 백성들이 자네에게 문제를 가지고 오는 것은 자네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을 알기를 원하는 것일세. 이 점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네. 그러니 대단히 조심하게. 나는 하나님이 자네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네. 자네의 교만에 그 분이 밀려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일세.'

이런 걸 두고 고언(苦言)이라고 하나요? '듣기 싫으나 도움이 되는 말' 말입니다. 사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홍해를 갈라 당대 세계 최강 파라오의 군대를 따돌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연 모세는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민족 해방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인은 진실을 말해줍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는 이유는 모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답을 듣기 원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모세의 지도력의 본질을 깨우쳐준 것입니다. 모세가 누리는 힘과 권위는 하나님께서 잠시 위임해준 것이지 결코 그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지혜로운 장인 이드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그들에게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그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게." 앞서 모세는 자신이 백성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알려 준다"(make known to them)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백성에게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teach them)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게 하라"(make known to them)고 말합니다.

여기 교육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알려주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알려주는 것'은 알고자 하는 사람이 알려주는 사람에게 계속 의존하게 만듭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이 막힐 때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계속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계속 의존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일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드로의 말은 모세가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무지한 상태로 나두어 계속해서 자신에게 의지하게 하지 말고 그들 스스로 깨우쳐 자신들이 나아갈 길과 해야 할 일을 알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는 자신의 사위 모세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권력의 분산(distribution of power)과 지도력의 공유(sharing of leadership)를 제안합니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 그리고 그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워서, 그들이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재판하도록 하게. 큰 사건을 모두 자네에게 가져오게 하고,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하도록 하게." 지금 이드로는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 권력을 공유하고 분산해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번역에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방금 읽은 새번역 성경에 의하면 참다운 지도자는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입니다. 능력과 덕을 따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것을 '능력'보다는 '덕'에 관련된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뽑으라. (NRSV 영어성경도 이와 동일합니다. - "able men among all the people, men who fear God, are trustworthy, and hate dishonest gain.") 이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덕이 따로 있고, 능력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 세 가지가 바로 지도자로서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새번역에서는 그 세 가지를 능력과는 별개의 '덕'이라고 보고 그 덕과 별개의 어떤 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을 지도자감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작지만 중요한 차이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어떻게 되어 있나 살펴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참되게 살며 욕심이 없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모두를 그냥 나열해버렸습니다. '덕'이라는 유교적 개념이 빠진 것은 옳으나, 유능한 것을 세 가지와 어떤 별개의 항목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결국은 새번역 성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것이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성서 원문의 구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무엇이 능력입니까? 무엇이 지도자의 진정한 능력입니까? 우리 모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유능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짜 능력입니까? 성서가 말하는 능력은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둘째로 거짓이 없이 신실한 것이며, 셋째로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슨 능력이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독선과 위선과 자만과 거짓과 부정부패의 지도자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거짓이 없이 깨끗하며, 불의한 소득에 유혹 당하지 않는 것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맑은 거울에 항상 자신을 비추어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은밀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나 자신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은밀한 것까지 다 아십니다. 위선자도 수치심 때문에 노골적인 죄는 짓지 않지만 은밀한 죄를 짓는 일엔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가게 문을 모두 닫아놓고 거래하는 상인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고 떳떳합니다. 역대하 19장 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도자의 두 번째 능력은 자연스럽게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겉과 속이 일치하고 숨기는 것이 없어 믿을 수 있고 든든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참된 지도자의 세 번째 능력은 당연히 부정직한 소득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욕심이 없는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그것과 타협하여 스스로 부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우리가 얼마나 바랍니까? 이런 지도자가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을 섬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 이드로가 결론을 맺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자네와 짐을 나누어지면, 자네의 일이 훨씬 가벼워질 걸세.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자네가 이와 같이 하면, 자네도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도 모두 흐뭇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갈 걸세." 이런 장인을 둔 사위는 행복합니다. 이런 현자를 곁에 둔 지도자는 행복합니다. 모세는 결코 홀로 모세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누이 미리엄과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장인 이드로가 없었다면 모세는 지금 우리가 아는 모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역시 남달랐습니다. 장인의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백성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들이 백성을 재판하게 했습니다. 어려운 사건은 자신에게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에서 갓 탈출하여 오합지졸과 같이 방황하던 히브리 노예들은 비로소 하나의 민족으로 정비될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의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후에 모세의 아내와 장인이 속한 미디안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은 적과 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운명이 되었으나,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전적으로 수용한 겸손하고 현명한 모세에 의해 히브리인들은 하나의 민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전체 교인총회가 있었습니다. 지난해를 결산하고 새해 예산을 세웠습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지도력을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질서를 타파한 평등한 교회공동체를 지향합니다. '담임목사'가 있지만 2년 임기의 보직자일 뿐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오직 단 한번 '목사'라고 번역된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목사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포이멘'(ποιμην)인데, 그 뜻은 단순히 '목자'(shepherd), 즉 양치기입니다.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모두 그렇게 번역되었으나 유독 이 본문에서만 '목사'(pastor)로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만이 여기서도 목사가 아니라 목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이멘'은 목자처럼 '돌보는 자'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목사직의 근거를 찾는다면, 성서적인 목사는 '목자와 교사'의 직무를 담당하는 자입니다. 즉 '돌보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pastor and teacher"입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돌보고 가르치는 일은 우리 모두가 부모로서, 교사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세상에서 행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마가복음 9:35).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태 20:28, 마가 1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빌립보서 2:6-11, 공동번역). 예수님은 자신을 낮춤으로 높아지고 비움으로 채워지는 신앙의 신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참다운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보스(Boss)와 리더(Leader)를 구별하는 10가지 방법'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영어로 '보스'는 '어떤 조직의 실권을 쥐고 있는 우두머리'를 뜻하지요. "1. 리더는 희망을 줍니다. 보스는 겁을 줍니다. 2. 리더는 '가자'고 권합니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합니다. 3. 리더는 공개적으로 일합니다. 보스는 등 뒤에서 일합니다. 4. 리더는 귀가 여러 개 있습니다. 보스는 귀가 없습니다. 5. 리더는 약점을 숨기지 않습니다. 보스는 약점을 숨깁니다. 6. 리더는 앞에서 이끕니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합니다. 7. 리더는 존경을 모읍니다. 보스는 복종을 요구합니다. 8. 리더는 남을 믿습니다. 보스는 남을 믿지 않습니다. 9. 리더는 선의에 의존합니다. 보스는 권위에 의존합니다. 10. 리더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보스는 '나'라고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보스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리더입니다. 우리의 목자이고 교사입니다. 그는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는 구원자입니다.

대학교회를 섬기는 일에 부르심 받은 모든 임원 여러분, 그리고 가정과 일터와 세상을 섬기는 일에 부르심 받은 모든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가야 할 길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따뜻한 목자와 현명한 교사가 되어주십시오, 우리 주님처럼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주십시오. 그런 겸손한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시고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며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201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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