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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알' 곽예남 할머니 별세...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입력 Mar 03, 2019 05:34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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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정의기억연대 페이스북 갈무리)
▲지난달 23일 '그알' 봉침목사의 수상한 효도편에 나왔던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가 2일 오전 11시 전남 담양에서 별세한 가운데 곽예남 할머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23일 '그알' 봉침목사의 수상한 효도편에 나왔던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가 2일 오전 11시 전남 담양에서 별세한 가운데 곽예남 할머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의기억연대는 2일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곽예남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곽예남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상황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

곽예남 님은 1925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습다. 2남 4녀 중 3녀였습니다. 일본군의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 2~3개월 후 시누이가 처녀 공출을 가 게 되자 시집에서 곽예남 님을 대신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친정으로 피해왔지만 얼마 후 일본 순사에게 폭력적 으로 연행되었습니다. 1944년 봄, 아침나절 동네 여성 다섯 명과 뒷산에 서 나물을 캐고 있다가 벌어진 변이었습니다. 같은 동네 여성들 외에 6~7명의 여성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중 국으로 끌려갔다. 이듬해 곽예남 님의 부친이 화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곽예남 님은 1년 반 동안 끔찍한 일본군성노예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위안소는 2층 건물에 방이 24개 있었고, 일본인 여자와 중국인 여자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기모노 를 입어야 했습니다.

외출도 허가 되지 않았습니다. 곽예남 님은 위안소 밖 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혼자 하 는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고, 관리인의 동의를 얻어 두 세 명이 동행해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차례씩 방에 있는지 검사를 받아 도망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때도 관리인의 동행하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곽예남 님은 조선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오래도록 방황해야 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구걸하는 삶을 살다가 안휘성 숙주까지 흘러들어가서야 겨우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곽예남 님은 중국에 살면서도 조선의 국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후 MBC 프로그램 '느낌표'와 한국정신 대연구소의 도움으로 2004년 국적을 회복하고 귀환 하여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했습니다. 이후 MBC 방송국의 협조로 국적 회복과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로 조카(막내 여동생의 아들)의 보 호로 살고 계셨습니다.

6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형제, 자매들을 만났 지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곽예남 님의 부 모님은 돌아가시면서도 잃어버린 딸을 못 잊으셨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면서도 고국의 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힘든 생을 어렵게 버텨내셨지만, 결국 일본정부의 사죄 한마디 받지 못했습니다.

힘든 삶이었으나 온 힘을 다해서 살아내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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