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슬픔의 힘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61:1-3, 베드로전서 3:8-12, 누가복음 6: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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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화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이삭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이 명작들은 바르비종(Barbizon) 마을에서 그려졌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만종>은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부부의 발밑에 바구니가 있는데 사람들은 감자 씨와 밭일 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구니에는 그 부부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시대, 사람들은 씨감자를 심으며 어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기는 그 겨울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기를 잃고 슬픔에 빠진 엄마와 아빠가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바로 <만종>(晩鐘, 저녁 종, L'Angelus)입니다. 그림 속의 아기는 왜 사라졌을까요? 이 그림을 본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을 받고 아기를 넣지 말자고 부탁하자, 고심 끝에 밀레는 아기 대신 감자를 그려 넣어 출품했던 것입니다. 최근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바구니 속 감자 자루가 초벌 그림에서는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했습니다. 밀레의 <만종>은 목가적인 전원생활이 아니라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녀를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슬픔'에 관한 것입니다. 침례교신학대학 기민석 교수의 관찰대로, 성경에서 예수님은 한 번도 웃은 적은 없습니다. 인간이기에 그 분도 분명 웃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 한 줄도 웃는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화를 낸 기록은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으시며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당대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화를 내셨습니다(요한 7:28-30).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나 목사님들과 자주 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이른바 '죄인'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소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앞에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며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셨습니다(요한 7:53-8:11).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느냐는 제자들의 알량한 신학적 질문을 듣고, "하나님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요한 9:1-3)이라고 말씀하시며 즉시 그 장애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고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고 윽박지를 때에도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즉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일에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분은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이념을 떠나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표하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셨습니다. 같이 울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제거한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는 아마도 이런 예수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적인 편집인지 모르겠습니다.

슬픔의 시대입니다. 고통의 시대입니다. 어느 학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in-between time"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의 시대' 혹은 '경계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한 질서가 무너지고 다른 질서가 다가오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불확실성과 불안이 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바쁘게 움직이고 더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이 상하기 쉬운 시대라는 말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졸업 후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고소득 전문직도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닙니다. 이렇게 힘든 '경계의 시대'가 많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이루지 못한 것, 가지지 못한 것,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쌓여 분노가 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욱' 하는 범죄가 늘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을 '분노의 대한민국'이라고 한다지요. 세계 최고의 자살율도 이런 분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자살이란 자기 안으로 향한 분노의 표출이니까요.

우리나라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하버드 보건대학원이 미국인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질병의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1위였겠습니까? 암? 뇌졸중? 심장병? 놀랍게도 1위는 "mental depression," 그러니까 우울증이었습니다. 신체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평생 한 번 이상 앓는다는 그 질병 말입니다. '영혼의 감기'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이 병이 왜 치명적인가 하면 자살자의 상당수가 바로 이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우울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셈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많은 경우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의 하나인 분노를 잘 조절하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분노를 두려워하거나 창피하게 생각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차곡차곡 쌓아 두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심한 우울증과 자신감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안의 분노지수는 어느 정도나 될까요? 제가 드리는 다음의 질문에 나는 몇 개나 해당되는지 한 번 조용히 손꼽아 보시기 바랍니다. (1) 너무 화가 나서 남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문을 세게 닫은 적이 있다. (2) 불쾌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금방 화가 난다. (3) 내가 원했던 것보다 미용사가 머리를 더 짧게 자르면 며칠이 지나도 계속 화가 난다. (4) 운전 중에 누군가 앞으로 끼어들면 경적을 누르며 화를 낸다. (5) 지난 몇 년 사이에 친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절교를 선언한 적이 있다. (6) 가족의 고쳐지지 않는 작은 습관들이 나를 화나게 한다. (7) 타인과 논쟁할 때 맥박이 심하게 뛴다. (8) 다른 사람의 무능함이 나를 화나게 한다. (9) 상점 점원이 잔돈을 잘못 계산할 경우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 했다고 생각한다. (10) 다른 사람이 약속시간을 어기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몇 개나 되십니까? 이상의 질문에 4~7개 정도에 해당하면 지금 분노의 수위가 신체적 질병을 유발할 정도이며, 8개 이상이면 이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분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알려주는 신호등에 불과합니다. 분노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남에게 소리를 지르는 공격적인(aggressive) 방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당하는 수동적인(passive) 방법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assertive)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법을 바꾸라고 합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how dare you)가 아니라, '네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상처 받았어'(I'm hurt, because you...)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주어가 '너'가 아니라 '나'이고, 수동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슬픔을 상대방이 알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또 다른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슬픔의 시대입니다. 밀레의 <만종>과 같은 아픔의 시대입니다. 상실의 시대입니다.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만연한 시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슬픔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 5:4)라고 하셨습니다. '애통(哀慟)하다'는 몹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를 조금 다르게 말합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누가 6:21). '애통하는 자'가 '우는 자'로 바뀌고 '위로를 받을 것이다'가 '웃을 것이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없는 '지금'이라는 말이 누가복음에는 첨가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본문 다 무엇 때문에 애통하는지 혹은 슬퍼하는지 그 이유와 대상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냥 슬퍼한다고 복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복이 있는 슬픔'이 어떤 슬픔이냐를 놓고 교회는 오랫동안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대체로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해석이 제기되었습니다. 첫째로,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때 받는 위로는 부활에 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죄에 대한 회개의 슬픔입니다. 이는 고대 교회 이래로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해석입니다. 이때 받는 위로는 용서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 악한 시대에 대한 슬픔입니다. 악한 세력에게 의인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때의 위로는 그 불의로부터 해방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고난, 즉 영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때의 위로는 치유가 되겠습니다.

이 네 가지 해석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의 것이 가장 타당해보입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의 클라이맥스가 '의인의 고난'과 그들에 대한 축복의 선언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이렇게 마무리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 5:10-12). 이 말씀은 이사야 61장의 말씀과 직결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61장 1-3절은 불의한 세상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슬퍼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입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사야서 61장을 가장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맨 처음 인용하신 말씀도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누가 4:18-19). 이런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을 것'은 미래형이고 신적 수동태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위로해주다'는 말은 통상적으로 '격려하다, 끌어안고 어루만지다, 좋은 말로 힘을 주다' 등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서 61장의 맥락에서 '위로하다'는 '구원하다'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며 그래서 슬프게 만드는 악의 세력을 부수고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말로 위로하여 격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불의한 역사에 개입하시어 적극적으로 그 상황을 변화시켜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알프레드 플러머(Alfred Plummer)라는 성서신학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땅의 것을 잃어버려 슬퍼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들과 또 이 세계의 사악함을 슬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심을 믿고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주식시장에서 돈을 잃었다고, 선거에서 졌다고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실 때 위로받을 거라고 말씀하신 그런 '복이 있는 슬픔'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정작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것은 플러머가 말한 슬픔, 즉 '이 세계의 사악함'에 대한 슬픔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힘이 없고 약하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슬픔 안에 갇혀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슬픔에 대한 관심과 연민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슬픔을 통해서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성서는 참으로 특이하게도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고통 안에 함께 거한다고 말합니다. 예언자들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은 이 세계와 우리가 겪고 있는 고뇌와 슬픔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가운데 '파라클레이토스'(parakletos)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어느 누구의 편에 서도록 부르심 받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 편에 함께 서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악한 세계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공포와 슬픔 가운데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이웃과 세계의 고통 때문에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슬퍼하심과 연합하여 함께 우는 자들입니다. 로마서를 보니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여 주십니다"(로마서 8:26)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안에 서로를 위해 간구하게 하는 능력을 불러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슬퍼하심과 연합하여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위로를, 즉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말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해도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을 사함을 받지 못한다 하셨습니다(누가 12:10).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할 때는 그 영의 '사랑으로 충만한 슬픔'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때입니다. 사랑으로 슬퍼하는 성령께서는 서로의 상처를 나누도록 가르치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때입니다. '슬픔의 시인' 정호승 시인이 바로 그것을 노래했습니다. 오늘 읽은 공동의 기도문, 즉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를 다시 읽어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채찬 교수의 말대로, 이 시의 화자(話者)는 정호승이 아니라 절대자나 신 같은 존재입니다. 신은 귤 값을 깎으며 기뻐하는 나에게 저주하듯 선언합니다.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고,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고,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실로 무서운 말입니다. 마음이 뜨끔해집니다. 하지만 신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신은 '기다림의 슬픔'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무관심한 나의 사랑을 위해 신은 세상에 내리던 눈을 멈추게 하고 내 옆에서 슬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동행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사실 시인은 '공감'(共感)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감은 '공명'(共鳴)에서 옵니다. 공명이란 어떤 물체의 진동에너지가 다른 물체에 흡수되어 그 물체가 진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원래 진동에너지의 진동수와 진동에너지를 받는 물체의 고유 진동수가 가까우면 더 큰 공명이 일어난다고 하지요. 쉽게 말하면, 공명이란 한자 뜻 그대로 '남과 더불어 우는 일'입니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마치 현악기와 같아서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공명이 더 커집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면 이 세상에도 아름다운 공명이 퍼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지금 우주 과학자들이 화성이나 다른 행성에서 물을 찾고 생명체를 찾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체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만일 박테리아가 아니라 박테리아의 화석만이라도 발견한다면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소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정작 그 생명이 차고 넘치는 이 지구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환경을 파괴하고, 종을 멸종시키고, 전쟁을 일으키고, 포로들을 학대하고 약자들을 살해합니다.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생명체를 찾는 열심히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주님 대하듯 말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베드로전서 3:8, 개역한글)고 말합니다. 여기서 '체휼'(體恤), 즉 몸 체(體)와 피 혈(血)로 이루어진 한자는 속으로 피를 흘리는 것(internal bleeding)입니다. 죽어가는 자식 앞에서 어머니들이 그러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 앞에서 자신의 가슴 속에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다운 신앙인은 울 수 있는 인간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울 수 있는 인간입니다. 인간만이 눈물을 흘립니다. 진실한 사람이 웁니다. 우리가 정말로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옵니다. 병상에서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엄마가 아플 때에 정말로 진실해지면, 위선의 껍데기, 허례허식의 옷을 벗고 눈물이 납니다. 마음이 낮아지며 눈물이 납니다. 그것이 종교적 심성이고 진실성이며 영성입니다. 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합니까? 세상의 고통을 위해 우십시오. 이 세계의 사악함에 애통해 하십시오. 이웃의 아픔에 민감한 사람이 되십시오. 병든 자, 배고픈 자, 헐벗은 자, 추위에 떠는 자, 외로운 자 앞에서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이념을 걷어치우고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그냥 함께 우십시오. 그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께 슬퍼하는 힘이 우리를 살리고 세상을 치유할 것입니다. 슬픔의 시대입니다. 이 '슬픔의 힘'으로 슬픔을 이기고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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