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산티아고 순례기] Day 25~26. 다 식은 커피 같을 때가 있다
글·이재훈 목사(청파교회 부목사)

입력 Apr 20, 2019 03:24 PM KST

폰세바돈(Foncebadon) - 폰페라다(Ponferrada): 7시간 (28.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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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사진 속 십자가가 바로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지날 때,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마음의 소원 하나씩을 빌고 간다. 얼마 전, <같이 걸을까>라는 방송에서 가수 GOD도 이곳에 염원이 가득 담긴 돌 뭉치 여러 개를 두고 지나갔었다.

1.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기분 좋은 출발을 한다. 어제부터 동행이 된 혜영이와 지영 듀오와 출발하는 시간은 달랐지만 늘 그렇듯 길 위에서 마주치면 함께 쉬었고 또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기도 했다. 간밤에 산 미구엘(San Miguel) 한 잔씩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다. 오해를 푸는데 진솔한 대화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십자가 형상이 나타났다. 어디서 봤더라? 산티아고 순례를 준비하며 TV나 책, 인터넷에서 자주 봤던 '철의 십자가'였다. 대부분 순례자는 이 '철의 십자가'에 마음의 짐 하나씩을 내려놓는다고 하던데, 나 또한 출발 전부터 이 십자가에 무엇을 내려놓고 오면 좋을지 즐거운 고민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해버린 오늘까지도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무얼 이곳에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내려놓기 위해 또 다른 고민을 한다.

묵묵히 십자가에 올라 그 앞에 멈춰서 본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을 느껴본다. 그러자 문득 한국에서부터 챙겨왔던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세월호 리본'이다. 대한민국의 아픔을 이곳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함께 나누고 또 기억하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물건이다. 리본을 십자가 중간 어디쯤 걸어두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그 자리를 떠났다.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땐 마음의 짐을 더 잘 알아차리고 벅찬 환희의 마음으로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잘 떠나보내야 잘 맞이할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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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마을마다 방향을 알려주는 작은 표시들이 등장한다. 산티아고의 대표 방향 표시는 노란 화살표 모양의 돌기둥인데, 작은 마을일수록 개성 있는 간판들도 여러 등장하기에 몇 개는 휴대 전화에 담아 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2. 커피 내리는 작가 용윤선은 함께 산다는 것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커피는 이미 식었고 향기는 모두 날아갔다. 사는 일이 다 식은 커피 같을 때가 있다. 함께 사는 일은 어렵다. 헤어져 사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러니 함께 사는 것이다." (용윤선, 『울기 좋은 방』, 달, 2014, p.165)

 

함께 걷는 일이나 혼자 걷는 일,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여럿이 함께 걷다 보면, 문득 혼자 걷는 게 더 편하고 좋을 때가 있다. 생각이란 것은 주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지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여러 번 '함께' 있어 봤기에 드는 생각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최근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오는 여러 불협화음이 마음 어딘가에 피곤함으로 쌓여있나 보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혼자 있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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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임현수 작가)
▲산티아고에서 누릴 수 있는 소박한 사치 중 하나이다. 숙소 근처 카페에서 구운 빵과 스페인식 라떼 한 잔 그리고 오렌지 주스까지 마시는 날이면 그야말로 순례길 귀족이 된 기분이 든다.

다시 한번 하는 말이지만, 까미노에서 함께 걷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다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늘 혼자 걷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함께 걸을 땐 서로의 요구가 부딪쳐 불협화음이 생긴다. 그렇기에 처음 누군가와 함께 걷게 되면 늘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만난 벗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나 여행 중에 만난 사람끼리는 서로 좋은 모습만 보이려 애쓴다고 말이다. 그러나 물론 그게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서로를 위한 배려이자 당연한 예의겠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또 내가 상대의 그런 모습마저도 수용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순례나 여행이 되지 않을까?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뭐 어떠한가, 20세기의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 '체 게바라'가 했던 말도 있는데 말이다. "리얼리스트가 돼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현실에 발 딛고 살되, 이룰 수 없는 꿈은 언제든 계속해서 꿀 필요가 있다. 삶이나 순례나 다 식은 커피 같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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