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 양을 먹이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이사야 40:9-11, 베드로전서 1:18-22, 마태복음 9:3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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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아십니까?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있는 암석 곶입니다.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이곳을 '폭풍의 봉'(Cape of Storm) 혹은 '악마의 봉'(Cape of Demon)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폭풍과 풍랑이 심한 그곳을 넘어 동쪽으로 항해한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더 이상 넘어설 수 없는 한계선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생겼습니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라는 사람이 이곳을 통과하여 인도를 방문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폭풍의 바다, 악마의 바다, 죽음의 경계선도 일단 통과하고 보니 잔잔한 인도양과 아름다운 해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희망봉'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누군가 그 죽음의 경계선을 통과하고 난 후에 폭풍의 봉, 악마의 봉, 혹은 죽음의 봉은 희망의 봉으로 변화했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부활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무엇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부활은 마치 '희망봉'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거기가 끝이라고 여기지는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폭풍과 악마와 죽음이 가로막고 있는 철벽과 같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곳을 통과하고 난 후, 거기는 더 이상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폭풍의 봉, 악마의 봉은 희망의 봉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린도전서 15:20)고 했습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1-22)고 성경이 말합니다.

조류 연구가들에 의하면 앵무새는 무서운 일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연구자가 산에서 땅에 떨어진 앵무새 새끼를 구조해 새장 안에 넣었다고 합니다. 가까이서 앵무새의 노래를 듣게 되어 크게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용케도 어미 앵무새가 새끼 앵무새를 찾아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이 연구자는 더 이상 먹이 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어 더욱 기뻤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새끼 앵무새가 죽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사인(死因)을 조사해보니 어미 새가 독이 든 머루(poison berry)를 갖다 먹인 것입니다. 어미는 차마 갇혀서 우는 새끼를 눈뜨고 볼 수 없었던가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이라는 새장 안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이라는 숙명에서 근원적으로 해방시키기 원하십니다. 새 장을 부술 수 없는 어미 앵무새는 차라리 새끼를 죽임으로 새끼를 자유롭게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새장 자체를 부수어 버림으로써 우리를 해방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 한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미국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세금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물론 세금은 탈세라는 방법을 통해 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아닙니다. 성경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음을 격파하셨습니다. 회피함으로가 아니라 정면으로 통과함으로써 그것을 부수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영생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3). 그와 함께 영생의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신앙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생에 대한 소망은 단지 육신의 죽음만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불의한 역사 안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신앙으로 꽃피어 납니다. 1973년 부활절에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우간다는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 밑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해 부활절 아침, 우간다 교회의 케파 셈팡기(Kefa Sempangi) 목사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활절 설교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5명의 괴한이 뒤따라 들어와 권총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디 아민이 보낸 비밀경찰이었습니다. 정적을 암살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때 셈팡기 목사는 이렇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다시 사신 날이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단지 죽기 전에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데 2분만 주겠소?" 암살단의 지휘자가 그러라고 했습니다. 셈팡기 목사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저지르는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눈을 떴습니다. 그랬더니 암살단 지휘자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들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이날 이후 셈팡기 목사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참된] 부활신앙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영생을 믿을 때 총칼도 두렵지 않습니다. 누가 이 살아있는 소망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있습니까?" 그의 이 고백은 정확히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로마서 8:34-35).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2차 대전 말기에 히틀러 암살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4월 8일 부활절 아침에 교수형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20세기의 순교자입니다 그날 그의 마지막 순간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감동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본회퍼 목사는 옥중에서 동료 죄수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모두가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가 미처 기도를 다 끝맺기 전에 험상궂게 생긴 군인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꽥 질렀다. '본회퍼라는 죄수 나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가 알았다. 교수대의 처형! 오늘 그가 처형당할 차례인 것이다. 본회퍼는 조용히 일어나 동료들에게 이렇게 한마디 고별인사를 남기고 감방을 나섰다. '동지들, 안녕히 계십니다. 나는 먼저 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엇이 이 사람을 죽음에 직면해서도 이렇게 담대하고 강인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를 인간에게 가장 두렵다는 죽음 앞에서도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절 아침의 그 텅 빈 무덤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시작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았기에 본회퍼 목사는, 셈팡기 목사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끝이라고, 한계라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고 믿던 절망의 지점 너머에 잔잔한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이 있음을 볼 수 있었기에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힘찬 개선가를 부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5-58).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망봉'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던 지점, 거기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한계선, 폭풍과 악마와 죽음이 가로막고 있는 철벽과도 같던 경계선, 바로 그곳을 예수님이 통과하신 후에 이제 거기는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등대가 되었습니다. '폭풍의 봉,' 혹은 '악마의 봉'이 지금은 '희망의 봉'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성서 원어인 헬라어로 '텔레이오'입니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완성을 뜻합니다. 완결을 뜻합니다. 무엇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까?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의 '끝까지'가 바로 "다 이루었다"의 헬라어 '텔레이오'와 같은 어간(語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 이후 베드로는 좌절하고 낙심하여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에게 오셨습니다. 밤새 잡은 물고기로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그를 '베드로'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반석'과 같다고 직접 붙여주신 이름 베드로(반석)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를 제자로 부르시기 이전 그의 본래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를 그렇게 처음 만났을 때로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같은 질문은 세 번 물으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큰소리를 쳤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나는 당신을 언제까지라도 진실로 사랑하겠나이다"(마태 26:33). 그랬던 베드로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세 번의 사랑고백을 통해 세 번 부인의 아픈 기억을 씻어버리고 용서 가운데 그가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입니다. 메시야이신 주님은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이사야 40:11). 그분은 갈릴리의 온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 그에게 몰려든 병들고 가난한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을 보고 긍휼히 여기셨다 했습니다(마태 9:35-36). 이렇게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무슨 말입니까? '만일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는 데 너의 생애를 바쳐라.' 그것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이 찬란한 부활의 아침, 십자가 위에서 사랑을 완성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랑의 소명을 기억하며, 그 사명을 실천하여 폭풍의 봉을 지나, 죽음의 봉을 건너, 영생과 부활의 희망의 봉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2019.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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