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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칼럼] 천둥이 하는 말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입력 May 15, 2019 06:54 AM KST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 T.S. 엘리어트는 세계를 황무지로 인식했다.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면적인 파괴로 인해 인간성은 파괴되고 아름다웠던 자연은 황폐하게 변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향유하지 못하고, 경탄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황량한 쓸쓸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우성과 울음소리가 거리를 감돌았다. 불모의 땅에 봄비가 내리면 생명이 깨어날까? 하지만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이다. 그래도 시인은 천둥이 전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 산스크리트어로 표현된 이 세 마디가 생명을 깨우는 봄비가 될 수 있을까?

아낌없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욕망은 독점을 지향하기에 타자를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잠재적 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욕망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손익 계산을 하지 않는다. 기쁘게 자기를 증여한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불모의 땅에 내리는 봄비와 같은 존재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이란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자기 것인 양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돈과 쾌락을 사랑하도록 사람들을 유인하는 사회는 사람들에게서 공감의 능력을 빼앗아간다. 무정함과 사나움은 그런 삶의 귀결이다.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기 소외라 할 수 있다. 사이-존재로서의 자기 본질을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너'를 소중한 이웃으로 대한다는 말인 동시에, 그의 있음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절제는 과잉을 특색으로 하는 욕망에 재갈을 물리는 능력이다. 절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된다. 욕망의 굴레에 갇히는 순간 인간의 행복은 영원히 유보된다. 순간적인 만족은 있지만 지속성이 없기에 더 큰 환멸과 권태가 우리 생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절제를 모르는 분노나 열정, 기분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자기의 기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이 무너져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예수의 삶이야말로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의 구현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흘리기에 인색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예수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당신 몸에 짊어지셨다. 그와 무관한 고통은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장 깊은 열정 속에서도 고요한 사람이었다. 인간의 잔혹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던 골고다에서도 예수는 홀로 인간의 등불을 밝혀들었다. 조롱도 폭력도 그의 영혼을 어지럽힐 수 없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를 대상화하여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앞서 걸으신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난 4월은 우리에게 참 잔인한 달이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4.3 사건 피해자들의 한은 여전히 신원되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5년이 흘렀지만, 유가족들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애도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적절한 보상이 다 이루어질 때 완료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의 견해가 편견임을 용감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부당이 늘 진실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선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중심'의 시선이 아니라 '주변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중심의 입장에서 볼 때 주변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질서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삶의 결과였다. 고난 주간은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자기 증여, 그리고 절제된 삶을 살겠느냐고 묻고 있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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