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삯꾼과 일꾼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May 20, 2019 06:33 AM KST

- 요엘 2:28-32, 고린도전서 1:22-29, 마태복음 9:3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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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일제 강점기 '소걸음' 우보(牛步) 민태원(1894-1934)의 수필 「청춘예찬」의 한 대목입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2016년 5월 18일, 19살 난 한 청춘이 고장 난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서울 메트로의 정직원이 되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으나 19살 생일 바로 전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청년이 살아있었다면 오늘로 꼭 22살이 됩니다. 그의 가방에서 나온 건 뜯지 않은 컵라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틈이 날 때 먹으려 넣어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오늘 이 땅의 청춘들... 일제치하 청춘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청춘은 '열정 페이'라는 가면 속 시장의 손쉬운 먹잇감입니다. 우보는 '피가 끓으니 청춘'이라 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는 '피를 흘리니 청춘'입니다.

신학적으로 비유하면 오늘의 청년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잃은 것을 되찾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누가 15:1-32). 예수님은 '잃은 양'과 '잃은 동전' 그리고 '잃은 아들'을 되찾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처럼 잃었던 것들을 되찾아 온전히 회복하는 나라임을 역설하셨습니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세 가지를 잃은 것 같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self)을 잃었고, 다음으로 '갈 길'을 잃었으며, 게다가 '희망'까지 잃었습니다.

단군 이래 5천 년의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능력 있는 세대도 없습니다. 컴퓨터 등 디지털 활용도는 세계 최고입니다. 영어실력도 이제는 아시아 경쟁국들을 능가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지금의 20대만큼 불행한 세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88만원 세대,' '3포 세대,' 그리고 'n포 세대'라고도 불리는 이 세대는 어려서 학원을 전전하며 끊임없이 문제풀기 훈련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등록금 빚이 쌓이고, 대학을 졸업해도 청년실업의 벽에 부딪힙니다. 취직도 안 했는데 벌써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열심히 스펙을 쌓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녀 어렵게 취직을 해도,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앙리 지루(Henry A. Giroux)라는 학자는 이런 청년들을 '1회용 청년'(disposable youth)라 불렀습니다. '1회용'... 한 번 쓰고 버린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청년들을 잉여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 고통의 터널의 끝은 어디일까요?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일본'이라는 특집기사를 눈여겨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사망 후 나흘 이상이 지나 발견되는 이른바 '고독사'(孤獨死)가 한 해 무려 1만 5천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어도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는 무연고 사망자는 한 해 3만 명을 넘긴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사망하는 사람 10명 가운데 3명은 장례식 없이 곧바로 화장터로 갑니다. 어차피 울어줄 사람도 없는데 장례식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울어줄 사람이 없는 이유는 가족을 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본의 30대 남성 10명 가운데 3명이, 그리고 30대 여성 10명 가운데 2명이 50대가 될 때까지 결혼을 못할 거라고 합니다. 결혼을 못하는 이유는 일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이렇게 서서히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보도가 스산한 이유는 우리나라 인구 구성 비율이 10~15년 차이를 두고 정확히 일본의 뒤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청년들의 문제를 방치하면 일본처럼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장례식이 없는 사회'가 될 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해맑은 웃음을 앗아가는 순간, 그 일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스승주일입니다.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 이끌어주는 사람'이라는 순 우리말입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저는 오늘 차마 '스승의 은혜'를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 결석이 잦고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을 면담했습니다. '비싼 등록금 내는데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냐' 다그쳤습니다. 한참 후에 '선생님, 등록금은 어떻게 해결했는데, 알바 7개 뛰느라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못해 죄송해요'라고 했습니다. 선생인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그 학생의 처지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는 선생 자격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이사야 40:1-2). 오늘 스승주일은 스승이 아니라 거꾸로 이 땅의 청춘들을 위로하는 날, 청년들의 "마음에 닿도록"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는 날이 되어야 하겠다 생각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위로가 됩니다. 지금 청년 문제는 단순히 자선이나 나눔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인간이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세밀히 묘사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포도가 무르익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고용해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보니 사람이 더 필요했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오전 아홉시와 정오 그리고 오후 세시와 다섯 시에 다시 일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에 하루 품삯을 주는데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더 많이 일한 사람은 더 받고, 적게 일한 사람은 그만큼 덜 받아야 그게 정의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그러한 형평성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이렇게 단호히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태 20:13-14). 여기 맨 마지막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unto this last)라는 구절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책제목이 되었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100년이나 앞서 성서에 기초한 사랑과 자비의 경제학을 이야기한 이 책은 변호사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로 만들었습니다. 돈벌이에 급급하던 한 변호사를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힌두교도였지만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 일일 노동자들은 일 년에 대략 200데나리온을 벌었습니다. 일 년은 365일이지만 매일 일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200일 정도 일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 유대인 가정이 일 년을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은 220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우 쪼들리는 살림을 살았던 것입니다. 아마 하루 벌어 하루나 겨우 이틀을 살았다고 보면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밭 주인 비유의 골자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1시간 일한 사람, 3시간 일한 사람, 6시간 일한 사람, 9시간 일한 사람, 그리고 12시간 일한 사람 모두가 차별 없이 당시의 '온전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정의는 우리의 통상적인 정의 이해에 충격을 줍니다. 인간이 보기엔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 상황에서 12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주었다고 1시간 일한 사람에게 12분의 1데나리온만 준다면 과연 그와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눈에는 정의롭게 보일지 몰라도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비열하고 잔혹합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인간의 정의를 넘는, 신비한 하나님의 정의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공로나 업적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효용성이나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세 종류의 사람, 즉 '작은 자'(the least), '잃어버린 사람'(the lost), 그리고 '꼴찌인 사람'(the last)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소중한 한 생명으로 살아갈 권리를 지켜주시는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정의는 은혜가 충만한 정의입니다. 자비가 넘치는 정의입니다. 약한 자에 대한 사랑이 곧 그의 정의입니다. 그의 차별 없는 사랑[兼愛] 그리고 보편적 사랑[汎愛]이 바로 그의 정의입니다. 이 정의는 적극적인 정의입니다. 약하고 소외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 온전히 회복시켜주는 적극적인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즉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라"(마태 6:33)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청년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찾아내시고 "또 찾아낸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기쁨의 잔치를 벌이실 것입니다(누가 15:4-6).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전쟁에는 이겼지만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상황에서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에 강연을 나갔습니다. 수많은 청중이 운집해서 수상의 입에서 어떤 희망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처칠은 훌륭한 연설가는 아닙니다. 연단에 나온 처칠은 먼저 모자를 벗고 천천히 큼지막한 시거를 내려놓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렇게 크게 외칩니다. "Don't give up!" 그리고 한동안 침묵하더니 다시 크게 외칩니다. "Don't give up!" 이번에는 모자를 쓰고 다시 천천히 시거를 손에 들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치고 연단을 내려옵니다. "Don't give up!"

현대 기독교 선교의 창시자 윌리엄 캐리 목사는 원래 구두를 만드는 가난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구두를 만지면서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혼자 공부했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선교사가 되어 1792년 인도를 향해 떠났습니다. 어느 날 캐리 선교사는 8년 가까이 성경을 번역했던 원고를 아끼던 강아지가 촛불을 건드리는 바람에 모두 불타 잃어버리는 끔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8년이나 정성을 쏟은 원고였습니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그게 절망하고 화를 내며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캐리 선교사는 그 강아지를 끌어안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원고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고 완전하게 다시 번역하라 없애신 것으로 압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가장 힘들 때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믿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인도어 성경번역을 완수했고, 현대 기독교 선교의 창시자로 존경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요엘 2장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이 이상을 볼 것"(요엘 2:28)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젊은이들이 볼 '이상'은 영어로 '비전'(vision)입니다. 젊은이들이 비전을 볼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에 '비전이 없으면 백성은 망할 것'(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 잠언 29:18, KJV)이라 했습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비전은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젊은이들이 바로 이 비전, 즉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고 했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본다는 것은 나와 내 작은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님의 원대한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본에는 '코이'라는 이름의 잉어가 있습니다. 실제로 키워본 적이 있지만 이 물고기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잉어를 조그마한 어항에 넣으면 그것은 5내지 8센티미터 크기로만 자랍니다. 좀 더 큰 어항이나 조그마한 연못에 넣으면 이 잉어는 15내지 25센티미터 크기로 자랍니다. 더 큰 연못에 넣으면 그것은 어른 발 하나 크기까지 자랍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이 잉어를 커다란 호수에 놓아주면 그것은 정말 크게 자라는데 1미터까지 자랍니다. 이 물고기의 크기는 자기가 자라는 공간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이란 그들의 세계의 크기만큼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육체의 크기가 아니라 정신적, 영적 크기 말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의 크기만큼 자라는 것이 청년입니다. 한 가문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가문의 크기 이상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한 지역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지역의 크기 이상 자라지 못할 것입니다. 내 학교, 내 직장, 내 가족, 그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크기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이웃과 세계와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호수 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커다란 호수의 크기만큼 자랄 것입니다. 그것이 청년입니다. 그것이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청년입니다.

날개가 없는 것은 추락하지 않습니다. 날려고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락이 두려워 비상(飛翔)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일러 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러자고 배를 만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비상은 늘 위험하고 항해는 늘 시련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날아야 하고 닻을 올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겐 날개가 있습니다. 꿈과 이상, 용기와 도전이라는 그 날개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날개 짓으로 여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사랑, 평등, 평화, 자유, 정의를 위해 고투하는 인간의 날개 짓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비상 뒤에는 추락조차 아름답습니다. 비상 뒤의 추락은 오히려 더 단단한 깨달음과 의지, 겸손함을 남깁니다. 그리하여 뒤이어 솟아오르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 또 다른 비상을 약속합니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가능성입니다. 내일로 미루어진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꽃피어 있는 가능성입니다. 편안한 정착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무작정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후예들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이 방랑 생활을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새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제자들입니다. 가능성의 제자들입니다. 꿈과 이상과 희망과 비전의 씨앗들입니다. 신앙은 가능성에의 도전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악몽이나 현재의 표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우리의 용기 있는 응답입니다. 여러분은 가능성입니다. 가능성은 주저앉거나 좌절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길을 떠나고 날아오르고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을 기쁨으로, 어두움을 밝음으로 뒤집어 놓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 11: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1-2)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위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것을 찾으라 혹은 '추구하라'(strive for) 했습니다. 노력하라, 애쓰라, 힘쓰라, 분발하라, 분투하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위의 것을 동경만하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감히 첫 발을 내딛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것을 실현하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영주가 어느 날 자기 정원을 산책하다가 정원사로 일하는 청년이 나무로 만들어진 화분에 조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솜씨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원사의 직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그 일을 한다고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가?' 그러자 이 정원사 청년이 대답합니다. '영주님처럼 저도 이 정원을 사랑합니다. 저의 직무는 이 정원을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업 시간 이외에 틈을 만들어 화분에 조각을 하고 있습니다.' 영주는 이 청년의 훌륭한 정신과 미술 소질에 감탄하고 그를 노동에서 풀어주어 미술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 정원사 청년이 바로 미켈란젤로입니다. 그는 주인이 보거나 말거나, 임금에 상관없이 주인의 정원을 자기 정원처럼 사랑하고 가꾸었습니다. 그는 주는 만큼만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일했습니다.

주는 만큼 일하는 사람을 우리는 '삯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일하는 사람을 우리는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삯꾼이 아니라 일꾼을 찾으십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에서 일꾼을 찾으십니다. 제가 이화여대 처음 임용되었을 때 저를 뽑으신 총장님의 한 마디 당부의 말씀이 지금도 제 가슴 속에 살아있습니다. "목사님, 이화에 오셔서 삯꾼이 되지 말고 일꾼이 되어 주십시오." 그 한 마디가 저를 지금까지 지켜주었습니다. 젊은이 여러분,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그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님처럼 품으십시오.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십시오. 그것이 삯꾼의 자리가 없어 청년들이 고통 받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런 젊은이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한 시인의 시를 읽어드립니다.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박노해, <다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는 성경의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2019.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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