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성령, 바람, 불길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Jun 17, 2019 06:56 AM KST

- 출애굽기 19:16-19, 로마서 8:26-28, 사도행전 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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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알려진 유명한 본문입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그러니까 민족의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는 유월절(逾越節, Passover) 7주가 끝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입니다. 오순이라는 말은 '50일 째'라는 뜻입니다. 영어인 "Pentecost"도 같은 뜻입니다.

오순절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 시기는 밀 수확기로 본래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추석 명절과 같다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이 절기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누가는 십계명을 받은 사건과 성령을 받은 사건을 병행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거기 강림"(출애굽기 19:18)하였다 했습니다. 누가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했습니다(사도행전 2:3).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사도들은 120명 쯤 됐습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해 뽑힌 맛디아를 포함해 12명의 사도들도 다 거기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든, 120명이나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준비는 끝난 것입니다.

그 기적은 하늘로부터 갑자기 불어온 바람소리로 시작됐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니라"(사도행전 2:2). 그 바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그 태초의 아침에 어둡던 수면 위를 갈로질러 세차게 불어 닥친 창조의 바람과 동일한 바람이었을 것입니다(창세기 1:2). 처음에 바람소리로 귀에 들리던 기적은 다음에 눈으로 보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사도행전 2:4). 여기에 성령의 이미지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 혀입니다.

바람은 불가사의하고 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바람, 즉 '프노에'(pnoe)는 성령, 즉 '프뉴마'(pneuma)와 쉽게 연결됩니다. 예수님도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소개하실 때 바람을 예로 드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복음 3:5)고 말씀하신 주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요한 3:8) 하셨습니다. 바람의 특성은 '자유'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은 자유하십니다. 인간의 교리나 제도 안에 갇혀 계시지 않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도 자유함입니다.

또한 성령은 불의 혀[舌]로 나타났습니다. 불은 태우고, 번지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앞에 불타는 떨기나무로 나타나셨습니다(출애굽기 3:2).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21). 그런데 누가는 그냥 불이라고 하지 않고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라고 했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고 했습니다. 불의 혀는 굳었던 제자들의 혀를 움직이는 불길이었습니다. 닫혔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만드는 불길이었습니다. 그 불의 혀가 임하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사도행전 2:4)했다고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핵심은 바로 이 '말하게 하심'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은사는 다물었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두려워 꽁꽁 숨어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할 '혀'를 갖고 있지 못하던 제자들이 지금 담대히 입을 열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말하게 된 말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방언'(方言, glossolalia)이라 생각합니다. 천상의 언어, 무아경의 언어, 즉 입신상태에서 쏟아놓는 언어 말입니다. 한글성경들은 사도행전 2:4에 나오는 이 말을 '다른 방언'(개역한글), 혹은, '방언'(새번역)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다른 언어들'(개역개정), 혹은, '여러 가지 외국어'(공동번역)로 번역합니다. 영어성경들도 이것을 방언을 의미하는 "speak in other tongues"(KJV)나 "speak with other tongues"(NIV, NASB)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speak in other languages"(NRSV), 즉 다른 언어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터져 나온 언어가 꼭 '방언'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통역이 필요했고, 오순절 사건은 오히려 아무 통역 없이 제자들의 말을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한 가지 분명한 현상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10:46, 19:6 참조).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 방언에 대한 우려와 경계심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를 깊이 논의합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방언이 아니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고 강력히 권면합니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2절). 그러나 예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그것은 덕을 세운다고 말합니다(3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4절).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특별히 예언하기를 바라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각각 음색이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건지 수금을 타는 건지 알 수 없듯이(7절),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9절).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결국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징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징이고,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는 것"(22절, 새번역)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27절, 새번역). 하지만 만약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라고 했습니다(28절, 새번역).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33절, 새번역)이시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언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38절). 방언이든, 예언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26절) 하라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40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기적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모르는 신비한 언어로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의 참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희망을 잃고 무서워 꽁꽁 숨어 있던 제자들이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과 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언어들'로 하나님이 하시는 크고 위대한 일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언어들'을 세계 각국에서 온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인종과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의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이 땅에 탄생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를 보니, 오순절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습니다(사도행전 2:5).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오는 큰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6절, 공동번역)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7-8절, 공동번역)하고 수근 댑니다. 이 사람들이 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그들의 출신 지방명이 사도행전 2:9-11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로마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크레테 사람, 아라비아 사람 등이었습니다. 글자그대로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언어들'로 선포하는 이야기를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혹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핵심은 소통입니다. 기적의 핵심은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차별의 장벽이 무너지고 '소통'(communication)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갈릴리라는 촌구석 사람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이 문화와 관습, 언어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의 바닥까지 이해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체험이었습니다. 소통의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이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사건은 인간의 모든 장벽을 허물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라는 새로운 생명과 포용의 공동사회가 탄생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닫힌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막힌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들을 쏟아내지만 마음의 장벽은 더욱 높아가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5G를 상용화한 통신 기술의 대국이지만 오히려 이를 타고 증오와 혐오의 표현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혐오표현'은 이미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성직자라는 사람들도 가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혐오 당하지 않기 위해 혐오를 멈추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혐오는 말이나 글에 머물지 않습니다. 차별과 증오범죄로 번집니다. 혐오표현은 글자그대로 '영혼의 살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사회는 '말이 칼이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말이 폭력이 되고 영혼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살다보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그런 대화는 결국 관계를 단절시키고야 맙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녀와의 갈등이나 부부싸움은 대부분 '사소한 불통'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참 대화입니다. 사랑의 언어입니다.

대화는 논쟁이 아닙니다. 논쟁의 목적은 '이기는 것'입니다. 날카로운 논리와 언변으로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것이 논쟁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논쟁에서 내가 이겼다는 말은 곧 내가 상대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논리가 맞았더라도 상대방은 더 이상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화의 목적은 소통입니다.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화의 가장 기본은 '듣는 것'입니다. 열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듣는 것이 더 좋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도 먼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마음의 대화'는 백 마디의 말보다 설득력이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편안한 미소, 열린 마음, 진심 어린 감동과 들어주는 자세가 바로 마음으로 하는 대화의 방법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대화의 시작은 상대방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저절로 통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수용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정한 대화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상대를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실수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사랑하다 죽어버려라>의 일부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 너는 어찌되든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수용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자기애'(self-love)를 인정해준다는 뜻일 것입니다. 어느 집에 뜻하지 않게 강도가 들었습니다. 실화입니다. 몹시 초췌한 강도는 식구들을 모두 한곳으로 몰아넣은 뒤 온몸을 묶어 놓고 집안을 뒤졌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 집 막내 하나만은 묶지 않았습니다. 아주 단순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형, 우리 집은 돈이 별로 없어." 막내는 얼떨결이었지만 그를 '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모두가 강도를 보면 겉으로만 떨고 속으로는 증오를 보내는데, 천진난만한 막내는 강도를 그저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뻘쯤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강도는 막내를 묶지 않은 대신 이곳저곳 문을 열도록 했습니다. 막내는 강도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실은 그가 몹시 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 떨려? 난 신고 안할 거야. 형, 근데 길가다 혹시 형 만나면 아는 체해도 돼?" "안 돼, 임마!" "알았어, 나도 그쯤은 알아." 그리고 강도는 가족들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막내의 천진함은 강도로 하여금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애를 발견하도록 해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좀 더 근사하게 남들에게 비치기를 기대하며 삽니다. 이것은 이기심이나 자존심과는 다른 '자기애'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를 존중하고 대접해주면 금새 감격하고 그 대접받은 수준으로 행동하지만, 그렇지 않고 자기를 비하하거나 상처를 주면 즉시 거칠게 반격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극단적인 범죄들도 따지고 보면 사람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의 막다른 반격이요 극단적인 반항의 몸짓은 아닐까요?

김춘수 시인의 <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시는 상대방의 마음속에 깊이 숨어 있는 자기 사랑에 주목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존재를 수용하기 전에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그를 품을 때 그는 비로소 활짝 피어납니다. 인간은 이렇듯 작은 것에도 민감하고 섬세한 동물입니다. 자기애에 목말라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가진 자기애를 발견해주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일이야말로 소통의 시작이고 이해의 시작입니다. 아첨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내세우기에 바빠서 남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고 남이 가지고 있는 자기애를 인정해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거칠고 삭막한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김춘수의 <꽃> 후반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굳은 혀를 풀어 담대히 세상과 소통하게 만든 역사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가르는 모든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시고 하나님과 화해시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에베소서 2:14-19). 초대교회는 바로 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한 가족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은 바로 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매일 무한한 용기와 소망을 주는 능력의 원천이었습니다. 소심하고 위축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히 일어서 세상에 진리와 생명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성령을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그 사건처럼 바람과 같은, 불의 혀와 같은 주님의 영이 이 시간 우리 모두 위에 임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메마르고 더러워진 삶에 단비를 내리소서.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소서. 내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여주시어 우리의 냉담함을 태워버리소서.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굳어버린 혀를 풀어 우리가 서로 사랑의 말, 용서의 언어, 평화의 대화를 나누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2019.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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