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선한 싸움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Jul 07, 2019 10:01 PM KST

- 이사야 42:1-4, 디모데후서 4:7-8, 마가복음 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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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어떤 목사님이 한밤중에 택시를 타게 됐습니다. 그런데 운전사가 차를 너무 거칠게 모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난 목사님이 점잖게 말했습니다. '기사님, 길도 험한데 차를 너무 빨리 모는 거 아닌가요?' 기사님이 대답합니다. '손님도 참, 그렇게 무서우시면 저처럼 눈을 꼭 감고 가세요.' 목사님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총알택시는 큰 사고를 냈고 두 사람은 천국 문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명부를 보며 말합니다. '음, 총알택시 기사라... 자넨 들어오게!' 기사님은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천당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은, '허허, 그렇다면 나도 당연히 천당에 들어가겠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음, 미안하지만 자넨 지옥으로 가야겠네!' 깜짝 놀란 목사님이 항변했습니다. '아니, 총알택시 기사도 천당에 갔는데 제가 왜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자네가 설교할 때는 모든 신도들이 졸고 있었지만, 그 택시 기사가 운전할 때는 모든 사람이 눈을 감고 기도했단 말일세. 아, 자네도 방금 전에 그러고 있지 않았어!'

교우 여러분,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할 때 졸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님들도 천당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운전하실 때 눈을 감고 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인생길이 무서워도 눈을 감고 자신의 삶을 운전하시면 안 됩니다. 살다보면 좋은 길, 험한 길 다 만나게 되는데, 혹 캄캄한 밤길이 무섭다고 두 눈 꼭 감고 가속기만 밟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사도 바울은 가장 사랑했던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 자신은 세상을 떠날 때가 됐다고 말하며 자신의 한평생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디모데후서 4:7). 첫째로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선한 싸움'(good fight)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싸움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입시도 싸움이고, 입사도 싸움이며, 테러와 전쟁도 싸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싸움들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은 39년의 짧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비극 중에서 가장 큰 비극은 젊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도 한 번도 진정으로 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을 '선한 싸움'에 바쳤습니다. 그의 싸움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루에 마흔 번씩 걸려오는 협박 전화에 응대하기, 분노한 군중 속에서 냉정 유지하기, 경찰견에 쫓기고 소방호수 세례 받기, 감옥에 들어가기, 집안으로 폭탄이 날아 들어와도 그것을 던진 자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기, 결혼해서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 노벨평화상으로 받은 상금 5만 4천 불을 평화를 위해 쓰도록 내놓기, 그리고 모든 인간이 피부색에 관계없이 한 형제와 자매로 한 테이블에 앉기까지 온유하게 설득하기...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에 기초하여 이런 '선한 싸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선한 싸움'을 싸우고 계십니까?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경주를 마쳤다고 했습니다("I have finished the race!). 선한 싸움은 시작하는 것보다 끝까지 해내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을 분석한 한 연구에 의하면, 그들은 특별하게 머리가 좋은 사람들(brighter intellectuals)이 아니라고 합니다. 한 가지를 끝까지 마무리 지은 사람들(good finishers)이라고 합니다. 어떤 유명한 권투선수(Jim Corbett)의 말처럼, 승리의 비결이 '1회전만 더 버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어떻게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끝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끝까지 달려갈 경주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도중에 넘어지고 더 이상 일어서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길바닥에 앉아 '잉잉' 울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친구야, 왜 울어?' '으응, 내가 이 언덕에서 넘어졌는데 팻말을 보니까 여기서 한 번 넘어지면 3년 밖에 못 산대. 잉잉...' 한참을 보고 있던 친구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 그럼 천 번쯤 넘어지면 되잖아!' '그런가?' 울고 있던 아이가 뒤통수를 긁적입니다. 유명 만화의 한 토막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살다가 한 번쯤 넘어집니다. 아니 여러 번 넘어집니다. 그런데 넘어지면 '이젠 끝이구나' 일어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생의 언덕길에는 '한번 넘어진 자는 영원히 낙오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팻말이 여기저기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고문이 무서워 모두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입시에, 입사에, 결혼에, 건강에 한번 넘어진 자는 영원히 낙오된다는 경고에 모두가 무서워 떱니다. 하지만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줄 모릅니다. 그걸로 끝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친구는 말합니다. '바보, 그럼 천 번쯤 넘어지면 되잖아!'

사람은 시간 안에 삽니다. 시간 안에 있기 때문에 삶은 구체적인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또 시간 안에 얼마나 머무를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한 사람도 없습니다. 때문에 삶은 어쩔 수 없이 피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완벽하게 피동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Arthur Schopenhauer)는, "평범한 사람들은 단지 어떻게 시간을 소비할까 생각하지만, 지성인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노력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길이의 시간을 살아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사는 것과 불성실하고 기만적으로 사는 것은 결코 동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자율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를 타율적인 운명을 따라 사는 노예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말했습니다. "운명을 탓하는 자는 약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척해 간 임옥숙 씨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가 직접 쓴 「샘터」 수기 당선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저는 햇수로 7년 째 투병 생활 중인 스물다섯의 여자입니다. 뭐라고 마땅히 이름 붙일 것이 없어서 '투병 생활'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치스런 이름이고, 사실 제 몸에서 정상인 신체 기관은 눈과 귀뿐입니다... 저는 식물인간을 간신히 면했을 뿐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으니 누군가 시중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장사하시느라, 언니는 회사에, 동생은 학교에 다니느라 제 곁에서 간호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분가해 사는 올케가 연년생 젖먹이 조카 둘을 데리고 출퇴근을 하면서 저의 병수발을 했습니다. 약 1년 후 걸음이 갓난아기 걸음마 정도가 되어 저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두려워서 저 스스로 달팽이처럼 내부의 세계로만 침잠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죽음을 생각했지요. 가족들이 자신의 생활 무대로 떠나 버린 텅 빈 방에 남아서 저는 온종일 죽음만을 생각했습니다... 발전도 희망도 없는 이 삶에서 탈출할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지요... 어느 날 밤 저는 짤막한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몰래 집을 나갔습니다. '먼저 가는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효도입니다.'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를 때리고 지나갔습니다. 정신없이 걷던 발길을 멈추니 칠흑같이 어두운 강변에 혼자 서 있었습니다. 강변은 무덤처럼 조용했습니다... 발밑으로 찰랑거리는 물결이 지나갈 때, 저는 하늘에 무수히 박혀 꽃같이 빛나는 별들을 우러러보며 마지막 기도를 했지요. '하느님, 이 가여운 영혼을 받아주세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동시에 죽는다는 일도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곧 이어서 이대로 죽기는 너무나 허망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 좀 더 살다가 죽자, 좀 더 살다가 '그동안 열심히 살다 이제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아보자! 그때부터... 지겨운 병마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어코 승리하고 말리라고 전 결심했습니다... 집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일단 결심한 바가 있는 터여서 저는 태연했고 침묵으로 모든 답변을 대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다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남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남이 못 갖춘 것을 나는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맹인에게는 없는 빛, 나는 그 빛의 충만함 속에 살고 있다,.. 고아에게는 없는 부모가 있으니 행복하고, 경련하는 턱을 베개에 얹고서 왼손으로 20초에 한 자씩이나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쓸 수 있으니 그 또한 행복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저는 믿습니다. 저도 반드시 쓸모가 있으리라고. 조약돌 하나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쓸모없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저는 "20초에 한 자씩" 썼다는 이 글을 쓰는데 실제로 얼마가 걸렸을까 계산해보았습니다. 글자를 세어보니 모두 1,872자였습니다. 여기에 20초를 곱하니 3만 7천 440초가 나왔습니다. 제가 2분 만에 읽은 이 짧은 글을 쓰는데 그는 약 10시간 동안 펜과 사투를 벌어야 했던 것입니다. 글의 저자는 육체의 장애가 인생의 장애가 될 수 없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인생의 장애가 되고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히려 '마음의 장애'임을 말해주었습니다. 마음의 장애는 운명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삶을 타율적으로 살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삶도 책임지지 않고 변명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인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속박 속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는 자유롭습니다"(Johann C. F. von Schiller).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단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한 삶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선택한 삶을 변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인물들은 성공하기 전에 큰 장애물에 부딪혔던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할 때 무려 2,500번의 실험을 거쳤습니다. 한 기자가 그렇게 무수히 실패했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2,499가지 방법이 무엇인지 발견했을 뿐입니다." 성공은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음을 그는 알려주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이라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39세에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두려워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입니다." 삼중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쉽고 편안한 환경에서는 결코 강인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며,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그리고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 등의 주옥같은 책을 남긴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계 유대인인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열악한 음식과 환경, 아무 의료시설조차 없는 곳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갔지만, 그는 끝내 생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해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나왔는가'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항상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선택하기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을 정해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내에 관해 생각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손을 한 번만 더 잡아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것이 내 생명을 일초 일초 연장시켜주었습니다." 프랭클 박사가 아우슈비츠의 다른 포로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배급되는 음식이라곤 수프 한 그릇에 완두콩 한 알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들에 절망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대신에 단 한 가지의 목표를 정해 거기에 온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에게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주었고 그 이유에 집중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집이나 건물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길이 있다고 믿는 민족이라면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수많은 역사의 역경을 거치며 우리가 체득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굳센 믿음과 희망이 체질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막연한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다시 살아나는, 아니 이미 살아났다는 신념과 희망의 메시지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뼈대요 핵심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42장(1-4절)은 흔히 '하나님의 종의 노래'라 알려져 있습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갈대가 상했다, 즉 갈대가 부러졌다는 말은 효용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폐물에게서 소망을 거두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등불이 꺼져간다 함은 연료가 떨어져 곧 사그라질 최후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거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렇게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이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운다"는 말은 "끝까지 바른 인생의 길을 성실하게 펼칠 것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끝까지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바른 길을 시작해도 도중에 중단하는 것은 실패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이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끝까지 주파해야 성공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신 것도 자신의 길을 성실하게 완주하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도가 되어 그 분을 평생 닮아 산 바울이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자신의 온 생애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싸움'이었으며, 자기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한 바울은 마지막으로 "믿음을 지켰다"(I have kept the faith)고 말합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서약(誓約, pledge)을 지켰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맹세하고 약속한 것'이 서약입니다. 결혼도 서약입니다. 준법도 서약입니다. 사랑도 서약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태어남도 서약입니다. 어느 작가(고 장영희 교수)의 말처럼, 만약 이 세상에 나무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한여름에 맘껏 푸르름을 뽐내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 꽃으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 슬픔 많은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선사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 작은 풀 한 포기로 태어났다면 그것은 광활한 우주의 신비와 생명의 고리를 잇겠다는 귀중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가장 큰 약속이고 축복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미워도 하겠지만 미움 끝에 용서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비판 끝에 이해하며, 질시 끝에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생명의 하나님과 이 사랑의 약속을 지켜나가겠다는 다짐이고 맹세인 것입니다, 믿음도 서약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맺은 헌신의 언약을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다했습니다.

2019년도 어느새 절반이 지나고 나머지 절반이 시작됐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어떻게 시작했느냐 보다 어떻게 끝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달려야 할 경주가 있습니다. 혹 지금까지의 삶이 절망적이었습니까? "화가 난 마음으로 과거를 보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지도 마십시오. 다만 깨어있는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십시오"(제임스 터버). 거기서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승자입니다"(He/she who laughs last, laughs best!). 끝까지 버티십시오. 지금은 버티고 견디는 게 이기는 것입니다(Hang in there!).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그가 우리의 앞길을 지키시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여러분이 '달려갈 길'을 끝까지 완주하십시오. 누구나 도중에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하느님, 이 가여운 영혼을 받아주세요"라는 연약한 기도는 드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바보, 그럼 천 번쯤 넘어지면 되잖아!' 조약돌 하나라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쓸모없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열심히 삽시다. 운명에 도전하고, 삶을 선택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웁시다. 그래서 우리가 경주를 다 마치는 날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환희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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