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옹달샘과 초점(3)] 성주괴공과 숫양의 뿔
숨밭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입력 Jul 23, 2019 09:47 PM KST

싯다르타의 통찰로서 성주괴공의 진실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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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만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 한다"는 통찰은 고다마 싯다르타의 깨달음 실상을 평이하게 풀어 말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한문글자이어서 '생노병사'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루고(成), 머물다가(住), 허물어져(壞), 텅 빔으로 되돌아간다(空)"는 말이다. '생노병사'가 살아있는 생명체 특히 인간생명의 유한성과 한계상황을 지적하는 말이라면, '성주괴공'은 생명체만이 아니라 비생명체까지를 모두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원자와 바이러스로 부터 은하계와 공룡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하는 것은 불변하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도록 하려는 지혜자의 가르침이다.

옳은 말이고 바른 통찰이다. 잘 지은 100억짜리 재벌의 저택도 가난한 시골 초가삼간 집처럼 때가 되면 허물어진다. 천재소리를 듣던 저명한 인사나 미모로서 뛰어났던 미인이 늙어 치매에 시달리거나 병들어 그 심신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슬프고 괴로운 것이다. 사람 몸만 그런가? 제국, 문명, 국가, 단체, 종교, 각종이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잠시 필요해서 구성되고 만들어져 지탱되고 잠시 그 것의 존재를 향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내가 혹은 우리가 이룩한 값어치 있는 그 무엇이 영원하다고 착각하거나 실감하지 않고 집착한다. 그것들이 값어치 있거나 공들여 이룩한 것일수록 그 집착심은 더 가중된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하나님처럼 절대시하여 우상화 한다. 사람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실재는 정치적 이념, 철학적 체계, 종교적 업적 등에서 두드러진다. 역사적 종교들이 가리키는 그 진리자체가 영원한 것이지 일정한 역사적 형태를 갖추고 존재하는 그 종교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베드로 성당, 노트르담 성당, 구례 화엄사, 예루살렘 언덕이 있는 이슬람교 황금사원이라고 영원한가? 단일교회로서 교인숫자의 수량적 크기로서 10만명 이상 모이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나 명성교회는 예외일까? 서운할 말이요 벼락 맞을 소리인지 모르지만 그것도 '성주괴공'의 철칙에서 빗겨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삼라만상이 '성주괴공'한다는 진리를 보이는 상징물로서 표현한 것이 수레바퀴다. 수레바퀴는 윤회, 반복, 되돌아감의 상징이다. 싯다르타의 가르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중국종교의 쌍벽을 이루는 유교와 도교도 자연 그 자체가 영원히 '반복 순환' 한다는 통찰 위에 서 있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유명한 말 '반자도지동'(返者道之動)이 그것이다. "되돌아감은 곧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양의 대표적 종교들이 삼라만상의 반복과 순환을 강조한다고 해서 변화를 가치 없다고 보거나 삶은 허무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착을 경계하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얽히고 설킴으로써 형성되어간다고 강조하는 관계적 존재론 혹은 유기체적 실재관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배울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들과 실재관의 한계랄까 단점은 삼라만상의 반복 순환만을 보았고 '생명계에서 역사적 삶은 반복하면서도, 그 의미와 가치가 자라고, 전에 없던 새로움이 창발 되는 과정이다"라는 점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숫양의 뿔은 나선형으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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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pixabay)
▲숫양의 뿔은 나선형적으로 자란다.

구약성경 여호수아기 제6장에 나오는 여리고성 함락이야기를 보면,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수6:4)라고 되어있다. 양각(羊角)이란 숫양 뿔로 만든 뿔 나팔을 말한다. 고산지대에 늠름하게 서있는 숫양의 뿔을 보면 신비롭고 경외감마저 든다. 숫양의 뿔은 자라되 수소 뿔처럼 매끈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고 나선형을 이루면서 자란다.

나선형(螺旋形)이란 달팽이 껍질이 자라는 것처럼 원운동이 반복되면서 진행방향으로 전진하는 운동을 말한다. 나사못 정수리를 돌릴수록 나사못은 깊어져 간다. 나선형은 '반복하면서 자람'이라는 운동의 특징을 상징한다. 현대천문학이 보여준 은하계의 거대한 별무리 성단(星團)의 나선운동, 여름태풍 기류의 소용돌이 흐름, 숫양의 뿔과 달팽이 껍질의 자람 등을 보면 나선형 운동은 단순 반복적 원운동이 아니다. 무언가 깊어지고 단단해지고 강해져 간다.

함석헌은 그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자기의 사관을 '나선형사관'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했다. 나선형 사관은 단순한 직선사관이나 원 운동하는 반복적 순환사관을 동시에 부정 극복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전한 사관이다. 베르그송, 샤르댕, 화이트 헤드 등 현대 맑은 최고지성들의 공통된 목소리는 "공동체적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는 누적적(累積的)으로 현재 안에로 쌓여가며 새로움과 창조적 전진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짧게 보면, 역사엔 방향이나 의미도 없고 약육강식의 혼란과 혼돈의 아수라장 같이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역사는 전진하고 성숙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퇴하고 퇴행적으로 움직이는 때도 있다. 그러나 긴 눈으로 보면, 적어도 인류문명사 7천년을 뒤돌아보더라도, 역사라고 부르는 인간 공동체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숫양의 뿔처럼 '반복과 자람'을 지속한다. 생각, 비젼, 영성이 자라고 높아지고 깊어져 간다. 군왕을 절대시하는 절대군주 정치제도의 극복, 노예제도 폐지, 남녀평등권운동, 아직 멀었지만 노동자나 농민의 권익운동, 보편적 복지제도 구현을 위한 줄기찬 투쟁, 국가이기주의 극복, 종교간 배타와 전쟁반대 등이 그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역사란 무의미하거나 과거로 흘러가 버리고 망각되는 한갓 백일몽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종교계에서 '양의 탈을 쓴 이리'(羊頭狗肉)같은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역사를 우습게 알고, 진실과 정의와 자유와 평등을 냉소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우롱하고 동료인간의 고통과 고난에 무감각하고 심지어 '인간화'를 능멸하고 조소하는 무리들이 엄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예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명의 알곡과 가라지를 절대 혼동하거나 똑같이 처리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대자대비와 궁극적인 은총의 승리를 믿는 신앙에 기초하여 '만인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신학이론이 있다. 그러나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 후에 용서요, 심판 후에 구원이다.

생명과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공동체의 구현을 위해, 그리고 인간다운 진선미를 추구하려고 굶주림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삶과 역사를 지켜왔고 지켜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것을 능멸하고 자행자지하는 무리들이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면 생명과 하나님의 노력은 헛일거리가 되고 만다. 성주괴공의 진실을 직시하되,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내는 최후 추수 때의 천국비유 곧 역사의 엄숙성과 의미에 대한 신앙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연자 맷돌 돌리는 나귀의 수레바퀴 자국 같은 반복이 아니라 숫양의 뿔처럼 나선형으로 자라고 있다. 그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소망'(골 1;23)이어야 한다.

※ 숨밭 김경재 박사의 에세이 '옹달샘과 초점'을 연재합니다. '옹달샘과 초점'은 물처럼 순수한 종교적 영성과 불처럼 예리한 선지자적 비판과 성찰이 씨줄과 날줄로 엮어진 신학자 김경재의 신앙 에세이 글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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