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창세기 6:5-8, 로마서 1:18-23, 요한복음 12:4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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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오늘부터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11월 말까지, 즉 대림절 직전까지 총 14주입니다. 창조절의 상징 색깔은 생명 창조를 뜻하는 녹색입니다. 사실 조금은 생소하게 여겨지는 창조절은 그리스도교 2천 년의 역사에서 최근 들어 지키게 된 절기입니다. 그 역사가 2~30년에 불과합니다. 동방 정교회는 1989년부터, 로마가톨릭교회는 2015년부터 이 기간에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창조절의 제정에는 우리 시대에 대한 신앙적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자연, 또는 환경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고, 매일 수많은 생명이 멸종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한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꿀벌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꿀벌이 없으면 가루받이, 즉 수분(受粉)을 못하고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해 곧바로 대규모 식량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시대는 지구와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제의 하나가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 뜻과 의미를 돌아보는 절기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는 것과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과연 무슨 연관이 있나요?' 창조절에 가장 일찍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정교회(Orthodox Church)의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 Bartholomew)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별명은 '녹색 세계총대주교'(Green Patriarch)입니다. "'신성한'(sacred) 가르침에 관심을 두는 종교 단체의 수장이 '세속적'(secular)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얼핏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과 하느님을 따로 분리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적인 시선이나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생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존중하는 태도의 위기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이 선물을 받아들이고, 유지하고, 전달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의무입니다." 지구를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못하면, 무신론적인 신앙을 가질 수도 있다는 그의 경고가 새롭습니다.

올해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지 만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는 뜻깊은 행사를 많이 가졌습니다. 1969년 7월 20일, 미국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달에 첫발을 내디디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도약(跳躍)이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류에게 진정한 도약은 아폴로 11호가 아니라 아폴로 8호에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약 7개월 전인 1968년 12월 24일, 성탄절 전날이었습니다. 지구 바깥의 전체를 탐사한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8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궤도를 돌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달의 뒷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달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네 바퀴째를 돌고 있을 때, 우주 비행사들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지구가 달 표면에서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떠나온 행성이 달의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경이로운 장면이었습니다. '해돋이'(Sunrise)를 보신 적이 있나요. 우주 비행사들은 '지구 돋이'(Earthrise)를 본 것입니다. 깊은 우주의 어둠 속에 작고 외롭게 홀로 떠 있는 푸른 지구를 본 것입니다. 지금은 익숙한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지구 안에 사는 인류는 한 번도 지구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인류는 최초로 자신이 사는 행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광활한 우주 안에 '창백한 푸른 점'(blue pale dot)으로 떠 있는 지구 위에 잠시 왔다 떠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음날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riders)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습니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입니다. 최희준의 노래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모르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줄 알았는데, 인간이 발 붙여 사는 지구가 고작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구슬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류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지구와 거기 탑승한 모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적, 영적 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3세기 후반에 '사막의 수도자'라 불리는 이집트의 안토니오스 성인(251~356)은 "내 책은 피조세계의 자연이다.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작품들을 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주이자 주인을 큰 소리로 선언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성서적인 견해입니다. 시편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4)라고 노래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로마서 1;20)고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두 대표적인 '자연계시'에 관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성서는 '이 세계'를 부정하면서 '저 세계'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저 세상'만의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지 않고 물질의 세계, 즉 자연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읽은 공동기도문의 성 패트릭(St. Patrick, 389~461)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입니다. 그는 켈트인이 살던 아일랜드를 복음화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매년 3월 17일이면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아일랜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성 패트릭의 날'(Saint Patrick's Day)을 성대하게 기념합니다. 그의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모든 사람의 하나님 / 하늘과 땅, 바다와 강들의 하나님 / 태양과 달의 하나님, 모든 별들의 하나님 / 높은 산과 낮은 계곡의 하나님." 패트릭은 이런 하나님이 "하늘 위에, 하늘 안에, 그리고 하늘 아래"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 그것들 안에 있는 만물 안에 거하십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놀라운 생태적 영성의 기도입니다.

켈트인들의 기도와 영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자연을 매우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지구와 그 위의 모든 생명이 아름답고 선하다고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아름답고 선하다고 말합니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켈트인들에게 하나님은 분명 '타자'이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데, 사람들 안에 그리고 우주 만물 안에 깊이 내재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켈트인들은 이것을 '허드'(hud)라 불렀습니다. '만물 안에 거주하시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패트릭은 계속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와 함께 하소서. /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 우리 위에서 우리를 끌어당겨 주시며 / 우리 아래서 우리를 지탱하여 주소서. /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 우리 뒤에서 우리를 제지하여 주시며 / 우리 사방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주소서." 하나님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의 존재와 같이 우리를 위에서, 아래서,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때문에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현존은 지금 여기서 깨닫고, 발견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이렇게 볼 수 있을까요? 켈트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처럼,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숭고하심으로 가득 찬 은총 입은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과 태양, 달과 별들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의 말처럼,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는 자기모순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성경 본문이 전하는 이 이야기의 깊은 메시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더욱이 노아의 대홍수 상황과 비슷한 어느 단계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인 창세기 6장 5~8절은 홍수 이야기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읽으면 읽을수록 경이로운 본문입니다. 먼저 5절은 고발입니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세상이 자신의 의도를 거역했다고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개탄한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로마서 1:25). 하나님은 지금 이 현실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7절에서 심판을 선언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지면의 생물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신 세상을 '멸절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5절과 7절에서 '고발-심판'이라는,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메시지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과 7절 사이에 참으로 기이한 이야기가 샌드위치처럼 끼어들어와 있습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절은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한탄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나함'으로 후회하다는 뜻입니다. 근심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나짭'으로 슬퍼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후회하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분노하시지 않고 슬픔에 가득 차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분노하는 독재자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자식들과 멀어짐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부모와 같은 모습입니다. 6절에 쓰인 '슬퍼하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하와에게 벌로 주셨던 그 고통과 동일한 말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하나님은 같은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사랑으로 지으신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여 세상에 사람의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형언할 수 없는 깊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5절 '고발'과 7절 '심판' 사이에 이렇게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의 마음이 끼어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끝장내실까요? 더 이상 사람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세계가 바뀔 거라는 기대는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통치 아래 있는 세계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보시기에 좋았다고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창조하셨던 세계를 쉽게 포기하실 수 있을까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혹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실 수는 없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며, 하나님은 멀찍이 서서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성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은 상처를 입으시는가 하면, 기뻐하시고, 응답하시며, 놀라울 만큼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하시는 완전한 인격이십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지금 위기에 빠진 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그 인격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는 홍수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기는 세계의 반항적인 속성 때문에 생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갈등하십니다. 심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정하십니다.

8절에 갑자기 노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구절 전에 우리는 노아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노아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돌연히 등장합니다. 창조주와 피조세계 사이에 있는 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런 관계 속으로 대안처럼 무대에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과연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성경은 노아를 가리켜 그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걸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여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신 걸까요? 그렇다고 합시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아가 '완전한 자'여서, '의인'이어서,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여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누가복음 6:35)고 말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 6:5)인 사람들에게도 은혜의 햇빛을 동일하게 비추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왜 노아와는 달리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까? 그 답의 실마리가 바로 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무슨 말일까 오래 고민했습니다. 여러 다른 번역을 찾아보았습니다. 공동번역은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번역합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새번역은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합니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어성경들이 해결해주었습니다. "But Noah found grace(favor) in the eyes(sight) of the LORD." '그러나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 저는 이 번역이 창세기 6장 8절의 뜻을 가장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고 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 안에서 은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연민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통과 슬픔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쓸어버려야 하겠지만 후회하고 슬퍼하시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 고통과 슬픔이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다]"(요엘 2:13)는 것을 알았습니다.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친 요나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요나 4:2) 노아도 알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눈동자 안에서 노아는 그 은혜를 보았기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조롱해도 오직 그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노아를 하나님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주를 짓기까지 120년을 옆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그런 '새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는 그런 새로운 신앙의 모델로 창조주와 피조세계 사이의 그 혼란스럽고 고통스런 관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심판의 이야기로 읽으셔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하나님의 슬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반항하는 사춘기 자녀에게 부모들이 심한 고통을 느끼듯,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느낀 깊은 고통과 좌절과 아픔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노래가사처럼 하나님은 '마음 약해서' 자식과 같은 피조세계를 끝장내지 못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세계에 분노한 나머지 자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멸하려 하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본문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구원이 세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속 시원히 다 쓸어버려 멸망시키고 끝장내면 될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한이 없어서 하나님의 분노를 이기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분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스스로 자신의 결심을 바꾸어 새 것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자유와 온전하신 자기희생과 겸손하신 자기 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핵심입니다. 칼 바르트가 일찍이 성찰했듯이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성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변함없이 완악한 인간을 품어버리신 은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무서운 물조차 그것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인간의 성취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 자신의 변화에 의존합니다. 홍수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세계와 맺는 관계방식을 바꾸셨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라 어려서부터 악"하지만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겠다 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겠다 결심하셨습니다(창 8:21). 아무리 완악하고 저항하고 반역해도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의 피조물과 함께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항하는 자녀를 끝까지 고통으로, 연민으로 품는 부모처럼 말입니다.

이제 죄와 징벌 사이에 있던 일대일의 대응관계가 깨졌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인과응보의 관계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마음속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로 인해 그 관계는 이제 무조건적인 은총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경이로운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연민과 슬픔과 고통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은혜입니다. 그 마음이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계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 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의 눈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분의 눈 안에 있는 은혜,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롬 8:22)을 겪었고, 이제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롬 8:19)고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노아와 같은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2019년 창조절 아침에, 우리 모두 그런 신앙의 새로운 존재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2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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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