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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칼럼] 지거 쾨더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입력 Sep 14, 2019 08:51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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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블로그 갈무리)
▲지거 쾨더(1925-2015)의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는 독일의 사제 화가입니다. 그림이 묵상의 좋은 매개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그림에 주목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깊은 신학적 통찰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 있기에, 감상자들은 그림과 무언의 대화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작가가 숨겨놓은 메시지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림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조차 그의 그림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익숙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낯섦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인식의 지평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밝고 강렬한 색채는 그림 해석은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정서적 두려움의 베일을 벗겨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거 쾨더는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역의 작은 도시 바서알핑엔(Wasseralfingen)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베비슈 그뮌트(Schwäbisch Gmünd) 국립공예학교에서 조각과 금속디자인을 공부했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예술학교에서는 미술과 예술사를 배웠습니다. 작가와 미술교사로 살던 그는 뒤늦게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교구 사제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구민들은 물론이고 많은 기독교 대중들을 성서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그림과 성경 이야기를 담은 여러 권의 묵상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가를 기준은 우리가 교회에 속한 사람인지 여부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엠마우스 운동을 시작했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들은 이런 메시지가 불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밖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로 세상을 떠도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대개 세상에서 꺼림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합니다. 연루됨 그 자체가 삶에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연루되기를 꺼리는 순간 '거룩한 삶'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거 쾨더는 한 화면 속에 이 비유에 등장하는 여섯 부류의 사람들을 다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굶주린 사람과 헐벗은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굶주린 사람은 화면의 맨 아래에 손으로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못자국이 선명합니다. 감상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헐벗은 사람은 벽면에 그려진 포스터에 등장합니다. 그 포스터에는 독일말로 '제3세계를 위한 옷'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한 공간 속에 많은 인물을 그릴 수 없어서 이런 장치를 사용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간의 분할은 화가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의 손과 그에게 빵을 나눠주는 사람의 손만 등장시킨 것은 어쩌면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는 말씀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베푼다'는 말은 조금 불편합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시혜자와 수혜자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주는 사람은 자기의 선행에 만족할지 몰라도 받는 이들은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도 생색을 내지 않을 만큼 성숙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손으로만 표현된 나눔은 바로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도움을 받는 이들의 얼굴은 다 동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린 문 앞에 선 나그네가 등지고 서있는 저편에 붉은 대지와 맑고 푸른 하늘이 아스라히 보입니다. 그리고 무심한 듯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주 작게 그려진 그 십자가는 문 안쪽, 그러니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묶어주는 벼릿줄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손'입니다. 화면의 맨 아래에 등장하는 손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돌보고 어루만지는 이들의 손이 도드라집니다. 어루만짐은 치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과의 접촉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감행했던 것은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루만짐 혹은 접촉은 환대의 다른 표현입니다.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는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라고 말합니다.

'손'은 우리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입니다.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것이 또 있을까요? 악수하는 손, 노동을 통해 세상과 교섭하는 손, 누군가를 때리는 손, 밀어내는 손, 쓰다듬는 손, 어루만지는 손, 기도를 위해 모은 손.... 손은 발화되지 않는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장편시 '흰 손'은 우리가 하나님께 내보여야 할 손이 무엇인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심판의 자리에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모든 죄 대속해주심 힘입어/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들라시면서 "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손을 내밀어라./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 보여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예수의 피가 배었다면, 남 위해 땀 흘리고 피 흘렸다면, 우리의 손이 '흰 손'일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거 쾨더의 그림은 분주하기에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며 살라는 일종의 초대장입니다. 그 그림들을 읽으며 고요히 자신을 성찰할 때 일상의 삶을 거룩하게 살아낼 힘이 유입될 것입니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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