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Sep 23, 2019 05:24 AM KST

- 예레미야 9:23-24, 야고보서 3:13-18, 마태복음1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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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의 소록도.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소록도'(小鹿島).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섬입니다.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센인들은 한반도 땅 끝 이 섬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 이미지에 방해가 된다며 전국의 환자 6천여 명을 소록도에 강제 수용했습니다. 한센인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유전병이라 하여 단종수술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굶주림과 구타, 탈출하다 붙잡혀 감금실에서 죽고, 검시실에서 해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병이 나아도 돌아갈 가족이 없었습니다. 가족에게조차 버림을 받아 사망신고도 못 했습니다.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거나, 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습니다. 소록도의 모든 소나무는 자살의 상처를 기억합니다.

한센병은 합병증과 후유증이 더 무서운 병입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눈이 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센병은 낫습니다. 유전병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1990년대까지 전염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소록도 안은 환자들이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장소는 면회소입니다. 탄식이 흘러내렸기에 이곳의 이름은 '수탄장'입니다. 운 좋게 아이를 낳아도 보육소에 맡기고 멀리 떨어져 눈으로만 자식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은 바람을 등지는 쪽에 세웠습니다. 바람결에 병균이 날아갈까봐였습니다.

2005년 11월 23일, 소록도의 모든 집 앞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두 간호사가 보낸 편지입니다. 43년간의 긴 세월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보살펴온 푸른 눈의 두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보낸 마지막 편지입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말이라도 하고 떠나야지 너무 무정하게 ..." "서울에 가셨나요? 아, 본국에 가셨다고요...." "울타리가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며칠을 울었습니다." "떠나고 나서야 그분들이 어떻게 오게 됐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 85세)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 84세), 이 두 사람은 약 반세기 전에 가방 하나 들고 소록도에 찾아왔습니다. 나이 20대에 와서 70을 넘겨 이 섬을 떠났습니다. 처음 올 때처럼 떠날 때도 아무 예고가 없었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의 한 가톨릭 재속(在俗) 회원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수녀'라고도 부르지만 사실 수녀는 아닙니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수녀보다는 친근한 '할매'로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자적인 삶'이 '수녀'란 호칭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마리안느는 1934년생으로 2남 5녀 중 장녀입니다. 한 살 적은 마가렛은 1935년생으로 2남 2녀 중 셋째입니다. '작은 할매' 마가렛은 14살에 소명(召命)을 받았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온 한 선교사님이 강론에서, "왜 쳐다보며 서 있느냐, 세상으로 나가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마가렛은 평생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복음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려운 이웃의 옆에 있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때부터 마가렛은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살았습니다. 일생 청빈과 독신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후 19살의 마리안느도 마가렛을 따라 이 삶에 합류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으로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마가렛은 1954년에, 마리안느는 1962년에 종신(終身) 서원, 즉 목숨을 다하기까지 평생을 주를 위해 살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둘은 같은 간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기숙사 방에 머물렀습니다. 같이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한국에 왔습니다.

'왜 한국에 왔느냐'는 질문에 '작은 할매'는 "아무도 한국을 지원하지 않을 거 같아 한국을 택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소록도에는 벨기에 의료팀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국 의료진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둘은 다른 병들 중에서도 한센병을 돕는 사람들이 너무 없다는 말을 듣고 그걸 택했습니다. 기차역에서 식구들이 모두 울었습니다. '거기 가지 않고 여기서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소록도에 올 때 마가렛은 겨우 25살이었습니다. 마리안느는 26살이었습니다.

소록도에 도착한 두 사람은 환자들의 상처를 맨손으로 만지며 약을 발라줬습니다. 환자들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한센병 환자는 인간 이하로 취급당하던 시절, 모두가 장갑을 끼고 진찰하던 그때, 두 사람은 맨 손으로 상처를 만지며 약을 발라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간호사들이 고무장갑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간호사들도 감동하여 장갑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두 할매의 신분은 '자원봉사자'였습니다. 한 푼도 월급을 받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2005년에 떠날 때까지 그렇게 둘은 한국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소록도에서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않고 평생 봉사했습니다. 철저하게 빈손으로 살다가 철저하게 빈손으로 소록도를 떠났습니다.

떠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이 43년간 멈추지 않고 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아침마다 우유를 끓여서 큰 주전자에 담아 입원실을 다니며 누워있는 환자들에게 한 잔씩 나눠주는 일입니다. 밥을 못 먹어도 우유를 마시면 오랫동안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침의 그 달콤한 우유 한 잔은 '영양 + 사랑'이었습니다. '간호는 환자 앞에 있어야 간호다'라는 말을 두 사람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차트 정리에 시간을 버리지 말라'고 주문했습니다. 또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 간호다'라고 했습니다. 의사들은 응급환자가 있어야 가지만, 두 사람은 밤에도 마을을 돌고, 늘 환자들과 접촉하며 돌보았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헌신의 생활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은인들에게 정성껏 편지를 써서 약을 지원받았습니다. 연말이 되면 편지가 수백 통씩 오곤 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있는 한 가톨릭 부인회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기간에 절식한 돈으로 후원금을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어떤 해는 30만 달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후원금으로 한센인 공중목욕탕을 짓고, 결핵 병사를 짓고, 맹인 병사를 지었습니다.

그랬던 두 할매가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훌쩍 떠났습니다. 올 때처럼 갈 때도 아무 예고가 없었습니다. 올 때처럼 갈 때도 작은 가방 하나 들고 떠났습니다. 사실 떠나기 한 달 전부터 두 사람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던 그릇들을 포장해 평소 갖고 싶어 하던 분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사실 떠나야 했던 절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큰 할매' 마리안느가 직장암에 걸린 것입니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고, 보험도 없었습니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봉사한 병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짐이 되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자 주저 없이 결단했습니다. 2015년 11월 22일에 적은, 그 다음날 소록도의 모든 가정에 배달된 편지의 내용입니다.

"이제는 저희가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잘되어 있어서 우리는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없어도 환자들에게 잘 도와주는 간호사들이 계서서 마음 놓고 갑니다.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큽니다. 그 큰마음에 우리가 보답할 수가 없어 하느님께서 우리 대신 감사해주실 겁니다. 항상 기도 안에서 만납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가렛과 마리안느. 2015년 11월 22일."

떠나기 직전까지 두 사람은 우유를 나눠주고 아침 미사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그 둘을 지켜보던 나무와 바람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바람은 어제보다 약간 더 세게 불었고, 꽃들은 작은 손들을 흔들어 배웅했습니다. 떠나기로 한 날, 사실 그날은 마가렛의 비자 만료 하루 전이었습니다. 신분이 자원봉사자라 그날이 법적으로 한국 땅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소록도에서 봉사한 이들은 43년 전 처음 올 때와 똑같이 작은 가방 하나씩 들고 배에 올랐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5-10).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미켈란젤로는 고집이 세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부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도 내키지 않으면 절대 작품을 제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미켈란젤로에게는 독특한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든 <피에타> 상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그릴 때입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된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출입을 완전히 막고 4년 동안이나 그 안에 틀어박혀 오직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 작업은 매우 고된 것이었습니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야 했습니다. 이 일로 나중에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지만 그는 여기에 정성과 열정을 다 바쳤습니다. 드디어 그림을 완성하고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사인을 한 후 흡족한 표정으로 붓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성당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편히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문을 나설 때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눈부신 햇살과 높푸른 하늘, 거기 날고 있는 새들 ...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미켈란젤로의 마음에 이런 울림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 그 어디에도 사인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 놓고 그걸 자랑하려고 사인을 했다니 ...' 그는 즉시 성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작업대 위에 서서 자신의 사인을 말끔히 지워버렸습니다. 이후부터 자신의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랑하며 삽니다. 자랑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입이 간지러워 참질 못합니다. 그런데 그 '자기 자랑'으로 인해 평화가 깨지기도 합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철모르고 '꿈 자랑'을 하다가 이복형들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다 보니 이복형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습니다. 이후 노예로 팔려가 많은 연단을 거친 후에야 요셉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랑하는 마음을 이겼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것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는지, 상대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자랑은 다툼을 일으킵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고, 오히려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킵니다.

성서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1서 2:15-16)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생의 자랑'이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성서는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것'으로, 새번역 성서는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으로 번역합니다. 이런 이생의 자랑을 성서는 또한 '허탄한 자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런데]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야고보서 4:16). '허탄한 자랑'은 무엇일까요? 공동번역 성서는 '허영에 들떠 하는 장담'으로, 새번역 성서는 '우쭐대며 하는 자랑'으로 번역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남유다 왕국의 제13대 왕인 히스기야는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고 성전을 정화하는데 앞장섰던 임금입니다. 그는 기도로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에도 기도로 15년간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연장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생의 자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허탄한 자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이 외교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진 히스기야는 들뜬 나머지 이 제국의 사절단에게 자신이 가진 진귀한 보물들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주며 위세를 자랑했습니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히스기야 왕은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뺏기고 말았습니다(이사야 39:1-6).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고린도전서 1:19, 공동번역).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고 하셨던 이사야의 말씀(29:14)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20-29, 공동번역).

하지만 바울은 모든 자랑을 폐하지는 않습니다. 자랑 중에서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고후 10:17)고 권면합니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새번역)는 뜻입니다. 자랑 중에는 질투와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자랑이 있고, 사랑과 평화를 불러일으키는 자랑이 있습니다. 후자는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서 6:14)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것이 간질병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세 번이나 바울은 하나님께 이 가시를 뽑아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후에 그가 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고후 12:9, 공동번역). 바울은 주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약한 그 때에 오히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고후 12:10).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며 살았습니다(고린도후서 1:12).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한다고(고린도전서 13:4)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의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시편 34:2).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9:23-24). 하나님을 아는 명철이 자랑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땅 위에 실현하는 것을 기뻐하는 분임을 아는 그 깨달음이 참 자랑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할매가 고향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 돌아와 보니 익숙하던 마을과 길들을 모두 사라졌습니다. 정든 고향은 낯선 타향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했습니다. '큰 할매' 마리안느는 파킨슨병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작은 할매' 마가렛이 선배를 간호하고 남는 시간에 다른 노인들을 돌봅니다. 하지만 마가렛에게도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 남을 도울 수 없게 되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우울증이 와 치매로 발전했다고 주치의는 말합니다. 치매가 시작되자 '작은 할매'는 가족들에게 양로원에 가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큰 할매' 마리안느의 방문 앞에는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붓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다며 끝내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진실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작은 할매' 마가렛이 겨우 인터뷰에는 응했습니다. "다시 소록도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지금? 노노. 일할 때는 좋았어. 근데 지금 가면 사람들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나 이거 싫어. 그래서 안 가고 싶어요. 상도 받고 뭐도 하고 나 이거 싫어. 안 원해요. 그래서 안 가요. 이 마음속으로 봐요. 보고 싶지만. 다들 좋아했어... 이제 지났어. 소록도 시대 이제 지났어. 행복 있게 살았어요. 저기에서. 아주 좋았어."

성서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자매]를 구원하지 못한다"(시편 49:6-7)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수많은 형제자매를 구원했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의 서신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야고보서 3:13). 이 말은,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공동번역)라는 뜻입니다. 마리안느 스퇴거 간호사와 마가렛 피사렉 간호사가 바로 이렇게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성서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고린도후서 10:18)라고 말합니다.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믿기 어렵다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이국땅에 빈손으로 와서 평생 보상 한 푼 받지 않고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는 한센인들의 몸을 손으로 만지면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은 두 할매의 사랑이 기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기적입니까? 비록 우리가 그분들처럼 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기적을 기적이라 증언해야 하지는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정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나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나의 삶을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친구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친구로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좋은 동네에 사느냐가 아니라 내 동네의 이웃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도록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그 약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고전 1:25). "내가 약한 그 때에 강"(고후 12:10)합니다. 그런 자랑은 다툼이 아니라 사랑을 낳습니다. 그런 자랑이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낳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같은 자랑스런 그리스도인들로, 주께 칭찬받는 사람들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아멘. (2019.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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