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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정승환 목사의 책 이야기(5)

입력 Oct 09, 2019 07:02 AM KST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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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새물결플러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지음 / 배덕만 옮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504쪽 / 2만 2000원

"우리가 세상을 바꿉시다!" 청년, 청소년 수련회에서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문구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나의 변화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저자는 그동안 미국의 기독교가 다수의 내적 변화를 통해 세상 속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었을까? 저자는 그동안의 접근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시도했다.

세상의 변화는 문화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존의 기독교는 문화는 사람들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바른 선택을 함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기독교는 개개인의 영적 갱신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 속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이는 정치에 대한 강조로 연결되었는데,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통해 바른 법을 세워감으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기존의 문화가 기독교 세계관과 어긋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그릇된 선택과 법 제정을 통해 이루어졌으니, 이에 반대로 시도할 경우 세계를 기독교 가치관 속에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문화변형의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음을 지적하고, 문화가 변화될 수 있는 요소의 복잡성에 대해서 1부에서 이야기했다.

2부에서는 그들이 이와 같이 시도했던 일이 적절하지 못함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기독교는 국가 권력을 통해 세상을 강제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를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라 이름 붙였다. 이는 초기 교회 때,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바탕으로 국가적인 강제력을 통해 교회를 일으키려 했던 시도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파는 세상의 세속성에 분노하여 정치적 접근을 통해 기독교적 법을 세우고, 이러한 강제력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반면 기독교 우파의 정치권 장악에 분노하던 기독교 좌파도 정의, 평화, 평등을 지지하는 정치적 세력과 함께 정치적 접근을 하여 관련된 법을 세우고 세상을 바꾸려 했다. 둘의 지향점은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정치적 권력을 통해 강제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를 범했다.

이에 반해 신-재세례파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를 극복하고자, 권력을 통한 폭력적 방법을 거절했다. 그들은 대안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세상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은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권력을 부정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권력의 형성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러한 부분은 그저 분리주의에 그칠 위험이 있었다.

저자는 3부에서 세 공동체의 모습을 극복하는 대안을 내세운다. 이는 "신실한 현존"이다. 이는 국가의 권력을 장악해서 폭력적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그렇다고 신-제세례파와 같이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도 거부한다.

신실한 현존은 기독론을 기초로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성육신하여 거하시며, 사랑으로 선을 위해 기여하셨던 것과 같다. 기독교는 세상 속에 거하지만, 권력의 장악을 통한 폭력적 방법이 아니라 영성에 기초한 대안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세상 속에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 번영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기독교의 길이다. 기독교는 창조세계의 선함을 긍정하고 추구하되, 세상의 타락한 흐름에는 저항하는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 속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변할까? 세상에는 강력한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가 정확히 어떠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모든 타인을 위해 신실한 존재로 함께 하며, 샬롬을 추구하고 실천한다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성찰, 겸손과 헌신

부정적인 역사의 흔적에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는 성찰하여 진보하려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성찰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저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지나온 역사의 흔적들을 보며, 이를 계속해서 성찰하고 진보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미국 기독교의 이야기를 적었는데, 그 이야기 속에 한국 기독교도 보였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성찰의 결과물은 우리에게도 가치가 있다. 그들의 반성적 성찰을 향한 노력과 결과물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세상을 변화시키자" 이는 얼핏 보면 좋은 구호다. 하지만 책을 통해 좀 더 깊숙이 생각해보면, 이는 순진한 구호다. 세상이 변화되는 데에는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세상의 변화를 위한 한 가지 법칙을 상정해 놓고, 이를 통해 기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일 수 있다. 사람이 세상을 온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겸손이 필요하다. 세상은 선동적인 구호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겸손과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이 우리의 통제 아래 있지 않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묵묵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저자는 이를 신실한 현존이라 표현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실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 권력을 통해 세상을 강제적으로 장악하기보다 사랑으로 창조세계의 선을 지향하는 일, 선한 가치와 어긋나는 일들에 묵묵히 저항하는 일, 선을 지향하고, 번영을 추구하는 문화를 묵묵히 창조해가는 일 등이다.

하나님의 선과 무언가 어긋나 보이는 세상에 분노하며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 가운데 세상 속에서 신실한 현존의 문화를 묵묵히 창조해가는 일에 헌신함이 필요하다. 묵묵한 헌신 속에 잔잔한 변화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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