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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과 초점(13)] 몸과 맘과 얼, 그 정기신(精氣神)의 변증법
숨밭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입력 Nov 18, 2019 11:57 AM KST

사람 생명의 3차원: 몸과 혼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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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사진= 지유석 기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성경은 사람을 통체로 보는 것이지 그 구성성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체로서의 사람생명을 그 질적 차원의 측면에서 특징을 또렷이 하고 구별하기 위해서 몸(soma/ body)과 혼(pschche/soul)과 영(pneuma/spirit)이라는 어휘를 쓴다.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b)"라고 데살로니가 전서의 성경구절이 그 대표적 표현이다.

다석 유영모선생의 우리말 표현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크게 보아서 3가지 존재양식 혹은 존재차원이 있는데 이름 하여 '몸으로서 나'(몸나), '맘으로서 나'(맘나), '얼로서 나' (얼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상적 한국인들의 생활언어로 표현하자면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이라고 귀에 익숙한 말로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생명의 위 세 가지 양태(樣態)를 동북아시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면 정기신(精氣神)에 해당 한다.

정리하면 사람생명의 3차원을 몸 혼 영, 몸나 맘나 얼나, 육체 정신 영혼, 정기신 따위 다양한 표현으로 표시할 때, 그 각각의 3중적 동심원(同心圓)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생명의 세 가지 차원(three dimensions of human life)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 3가지 차원의 상호 관계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 세차원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 제약하고 초월하는 변증법적 논리가 무엇인가 라는 문제가 항상 사람다움과 사람됨의 본질적 문제가 된다.

불가분리적인, 불가혼동적인, 불연속적 연속성을 지닌 세 차원간의 변증법

사람이란 자연생태계 안에서 살고 있는 '하나의 생물체'라는 기본적 인식이 우선 절대로 중요하다. 성경은 그 엄숙한 사실을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다"라는 말로 짧게 선언한다. 사람은 흙 곧 자연에서 취한 흙으로 빚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몸둥이, 육체성, 위와 창자, 식욕과 성욕, 종족보존과 번식욕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성경은 그 점을 부인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근육질이 발달한 운동선수도 플라톤 같은 철학자도, 콩알보다 더 작은 치명적 '약 한알'만 먹더라도 곧바로 모든 육체기능과 정신기능은 마비 중단되고 죽고 만다. 뇌신경이 손상되면 시인, 철인, 종교적 성인도 모두 치매증 환자로 백치처럼 변한다. 이 모든 현상은 결국 인간은 '한갖 연약한 고등생물'에 불과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런데, 사람은 몸이면서 동시에 맘이요 정신이요 생각하는 존재다. 진흙 바닥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물질적 생물체 안에서 정신이 꽃피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육체 곧 생물학적 유기체에 직간접 영향도 미친다. 감정이 과열되면 혈압이 올라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암세포가 발생한다. 감사와 칭찬을 많이 받으면 엘돌핀이 많이 형성된다. 물론 그 반대도 진실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슬로건이 진실이듯이 맑고 깨끗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지탱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생명을 유물론적 생물학이나 유심론적 종교철학 입장에서만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더욱 기이하고 신비한 것은 사람생명은 단순하게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원 구조적 존재가 아니라 그 양자를 포괄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초월하는 영적 존재라는 점이다. '얼로서 나'는 '몸으로서 나와 맘으로서 나'와는 차원이 더 높은 생명현상이다. '정기신'(精氣神)이라는 3중적 표현이 그 점을 명시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제단에는 대림절에 촛불을 주일마다 하나씩 더해가면서 밝히며 '세상의 참 빛'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 제단의 초나 등유나 원유는 동물이나 식물의 화학적 분자물질을 고체나 액체로 만든 것이다. 에너지의 엑기스를 말한다. 정유(精油) , 정미(精米) , 정액(精液) ,정성(精誠)에 모두 한문글자 정(精)이 들어가는 이유이다.

정(精)이 보이지 않는 기체로 변하면 기(氣)가 된다. 그리고 그 기(氣)가 발화점이라는 임계점을 넘으면 전혀 다른 밝은 빛(光)으로 변한다. 빛은 마침네 자기의 본래 기체(基體)였던 물질과 물질에 메인 정신을 초월하여 자유로움과 자기 비판적 자기초월성을 지닌다. 인간의 참다운 인간다움은 바로 이 '자유로움과 자기 비판적 자기초월능력'에 있다. 그것 없으면 단순한 진화한 고등동물이거나 자기편견과 이기심과 당파성이라는 동굴에 갇힌 '이데올로기 노예'가 된다. 요점은 정기신(精氣神), 몸나 맘나 얼나, 육체 정신 영혼, 그 세 가지 인간의 존재현상 사이엔 불가분리적, 불가혼동적, 불연속적 연속상이 있다는 점이다.

전태일의 몸나 맘나 얼나를 되새김 함

11월이 다 지나가기 전, 아기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 초반을 지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꼭 한번 생각해야할 젊은이가 있다.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삼봉은 지난 11월13일 모일간 신문에 <씨알의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특별 기고문에서 전태일의 짧은 생애를 씨알철학으로써 조명했다. 1970년 11월13일은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청계천로 평화시장 봉재공장에서 인간이하로 대접받는 동생 같은 여공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호소하려고 분신자살로서 말했다. '근로기준법'을 제발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간절한 호소에 한국사회와 지식인들 그리고 종교계에서 조차도 아무 반응이 없고 무관심과 냉대와 억압으로 다가오자 분신자살로서 동물왕국 같은 한국사회에 맑고 밝은 '사람 목소리'를 냈던 날이다.

당시 한국 재야 인권민주화 두 기둥 이셨던 함석헌 선생과 김재준 목사는 1901년 생으로서 두분 모두 당시 70세 고령이셨다. 그런데, 두 분은 . 전태일의 추모장소에서 "당신은 우리시대 선생이었소!"(함석헌)라는 놀라운 발언을 했고,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김재준)라고 말했다.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서광선등 민중신학 선구자들도 전태일의 분실자살의 빛과 열이 그들의 신학적 양심을 일깨우고 민중신학의 전개에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왜 그랬던가? 전태일은 한 사람의 청년 그리스도인으로서 <몸나> 를 넘어 <맘나>로 거듭났고, 마침네 <맘나>를 넘어 자신을 <생명 정의 평화>의 실현을 위하여 불사름으로써, 빛과 열을 발하는 <얼나>로서 참된 영성이 무엇인가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깊은 병에 든 한국사회 각계의 기득권자들이 보이는 인간추태와 욕망과 명예욕과 자기아집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생명 정의 평화>증진에 공헌 하기는 커녕 한국에 천문학적인 방위비 인상을 강요하는 국가이기주의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기독청년 전태일의 순수한 맑은 마음이 그리워진다. 대구지역에서 전태일을 사랑하는 새로운 기운과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기쁜 소식에 감사한 맘으로, 성냥개비 불꽃 하나 보태는 심정으로 서민들이 송금하기 위해 우체국을 찾아 나선다. 미국의 방위비 인상 강요의 부당성을 지적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최근에 발표한 성명서에 동참하는 기독자의 숫자가 점증한다. 이것이 이 땅의 작은 희망의 씨앗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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