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설교] "끝까지 사랑하셨다"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입력 Nov 25, 2019 04:21 AM KST

- 시편 90:1-4, 베드로전서 4:7-11, 요한복음 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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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이집트의 스핑크스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과 사자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 하나를 내고 대답하지 못하는 인간은 모두 죽였다는 겁니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걷고, 점심때는 두 다리로 걷고, 저녁때는 세 다리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답은 '인간'입니다. 아기 때는 기어 다니니까 네 다리이고, 청년 때는 서서 다니니까 두 다리이며, 늙으면 지팡이를 짚으니 세 다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아침 해가 곧 서산에 지는 것처럼 인생이 그렇게 짧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살아보아야 신통치 않으니까 죽여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기피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캄캄한 밤을 무서워하듯, 죽음도 가급적 언급을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깁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Thanatophobia)은 인간에게 본능적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은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에 안고 산다"고 말했습니다. 어린아이도 4~5세부터 이미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 무엇인지 그것을 똑바로 응시할 때에만 비로소 참다운 삶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회피하려는 사람은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끝내 준비 없이 인생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수명이 얼마든, 50년을 살았다면 우리는 50년을 죽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살려면 용기 있게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늘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하듯,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돋는 풀"과 같고 "풀은 아침에 꽃이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릅니다(시편 90:5-6).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갑니다(시편 90:1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시편 90:12). 우리의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해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한 번밖에 없는 짧은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살 겁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의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수시로 존재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에 빠집니다. 공부하고, 결혼하고, 직장을 구하며 바삐 살 때는 모르지만 곧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달려가는지 회의에 빠집니다. 그나마 공부를 하면서 앞날을 준비할 때에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보람을 느끼지만, 일단 목표가 이루어지고 나면 허탈감에 빠져 개인과 가정에 위기가 닥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또 다른 목표를 세워 자신을 다그치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나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라는 비존재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목표를 좇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기가 그 목표에 쫓기는, 극도로 피곤한 삶을 삽니다. 아침 해가 곧 서산에 지는 것처럼 내 인생에도 곧 곤고한 날이 이르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 삶도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애써 잊으며 살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곧 우리가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이 성취되어야 행복할 줄 압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행복이란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입니다. 삶의 맛은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고 구차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재미고 사람 사는 멋이며 행복입니다. 일단 무엇이 성취되고 나면 행복은 또 다시 멀리 도망가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언제 행복을 느낄까요? 경기에 이겼을 때만이 아닙니다. 유니폼을 입고 흰줄이 새로 쳐진 경기장에 나가서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을 기다릴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합니다. 화가는 언제 행복할까요? 자신이 그림이 입선되었을 때만이 아닙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 화가의 행복입니다. 음악가는 언제 행복합니까? 그가 무대 위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갈채를 받는 순간이 물론 행복하겠지만, 그 연주를 위해 피와 땀으로 훈련을 쌓는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학생은 언제 행복한가요? 그가 박사학위를 따고 졸업식장에서 쏟아질 친지와 동료들의 환호성을 받는 순간이 행복하겠지만, 밤을 새워 책과 씨름하며 새벽 별을 보고 명상하는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등산가는 왜 험한 산에 도전합니까? 물론 산을 정복했을 때의 쾌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의 매력에 이끌려 벅찬 가슴으로 시내를 걷고 위험한 벼랑을 기어오르는 즐거움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결혼했을 때, 아기를 낳았을 때, 박사가 됐을 때, 집을 샀을 때, 그리고 새로운 직장을 얻었을 때 등, 무엇을 이루었을 때만 행복하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열 손가락 셀 정도의 행복만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 <행복>입니다. 그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단 세 줄짜리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그래서 성서는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룬 다음에 그 결과를 보고 기뻐하라거나 감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 그리고 범사에, 즉 지금, 여기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내일 기쁜 일이 있을까, 모레 감사할 일이 있을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행복의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기쁜 일을 찾고, 오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행복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뻐하라'나 '감사하라'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그리고 '범사에'입니다.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특별한 것에가 아니라 모든 것에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시작이 있음과 같이 '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종말이,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심판주로 임하실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요한계시록 22:13)입니다. 그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오늘도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은 모두 세상의 '끝'에서 이루어질 일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이를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이라 부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많은 가르침 가운데 이 종말론처럼 숱한 오해와 혼란을 불러온 교리도 없을 것입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 씨는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携擧)가 일어난다고, 즉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구원받는 사람이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일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가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무엇을 말하려는 교리일까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같은 무시무시한 우주적 파국의 예고일까요?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인데, 그 재림(再臨)이 목적이 '심판'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이 심판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다행히 성서에는 이 두려운 순간의 모습이 상세히 예고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 25:31-46).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모으고 그들을 영생의 복을 받을 무리와 영벌을 받을 무리로 구분하시는데, 그 기준이 참으로 뜻밖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이어받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칭찬하십니다. 그 말은 들은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언제 자기들이 예수님께 그렇게 하였느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거꾸로 영벌에 처해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것을 본 적이 있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판의 기준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 한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에 따라 영생과 영벌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교회에 빠지지 않고 매주 출석했는지, 헌금은 많이 했는지, 전도는 몇 사람을 했는지를 가지고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늘 함께 먹고 마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님은 그 자에게 우리가 어떤 삶을 나누었는가를 가지고 영생과 영벌을 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5장이 예고하는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우리가 퍼뜩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지금 여기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심판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로 나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우리의 눈을 먼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내 삶과 이웃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종말 신앙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의 한 대형 호텔에서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습니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2백여 명의 투숙객들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죽기 일보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지나고 한참 후에 한 연구소가 당시 기적적으로 구조된 2백여 명을 일일이 추적하여 화재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 호텔에 투숙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대단한 명망과 재력을 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그 사건 이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장애자를 돌보고, 말기 암환자와 함께 하고, 거리의 노숙자를 돌보며, 빈민지역에 들어가 무료진료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그 화재 현장이라는 생지옥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미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조된 이후의 삶은 덤으로, 그리고 선물로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사마리아인과 같은 선한 이웃으로 만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깨달았기에, 이전에 그렇게 이기적이기만 하던 삶이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삶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종말의 종교입니다. 인생에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것을 회피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고 죽음 앞에 용감하게 서서 지금 여기를 충만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영생'(eternal life)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서의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앞으로 올 미래의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지는 것입니다(요한 5:24). 어떤 생명의 시간적 (양적) 연장이 아니라 내용적 (질적) 변화입니다. 영생은 현재 안에서 변화된 삶인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죽음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을 충만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사랑하며 살라고 요청합니다. 사랑을 줄 시간이 많지 않다고 호소합니다. 사실 죽음 앞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읽은 복음서가 이렇게 전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요한복음은 모두 21장인데 그중에서 13장부터 21장까지 무려 아홉 장이나 유월절 전날 있었던 일과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과 그리고 부활의 새벽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며칠을 기록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만큼 그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 아홉 장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시며,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억해야 할 말씀을 당부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 하실 일이 많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그 모든 시간을 제자들을 사랑하는 데 쓰셨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실하지도 않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면서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하나도 나을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에도 그들은 서로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그들의 부모 중에는 그 와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자식을 위해 한 자리를 청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듣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가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직접 받아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장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형편없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나 같으면 전부 버리고 싹 갈아치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죽기 직전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유월절 전에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다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 안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그것이 자신의 몸이고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 몸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결국 이 사랑의 기억이 골고다 언덕에서 멀리 도망친 그 형편없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사자(使者)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한 호스피스 전문가인 오츠 슈이치(大津秀一)의 저서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를 보았습니다. 약 일천 명의 죽음을 목도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죽음을 코앞에 둔 이들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들이 나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지 않았던 것,' '유산을 어떻게 할까 결정하지 않았던 것,'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던 것,' '가고 싶은 장소를 여행하지 않았던 것,' '고향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 '담배를 끊지 않았던 것,' 그리고 '종교를 갖지 않았던 것'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뽑은 후회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마워요"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 사랑의 마음을 나누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이나, 더 많은 일을 성취하지 못한 것이나,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깊은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주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베드로전서 4:7-10).

교우 여러분, 잠들기 전에 기도하시는지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십니까? 나태주 시인의 시 <잠들기 전 기도>를 읽어드립니다. 짧은 시 안에 인생의 진리와 그리스도교의 종말신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 오늘도 하루 / 잘 살고 죽습니다. / 내일 아침 잊지 말고 / 깨워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죽고 다시 삽니다. 그것이 종말의 신앙입니다. 우리만 자고 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보다 앞서 고인이 된 사람들이 모두 "잔다"고 표현합니다(이하 데살로니가전서 4:13-5:28, 고린도전서 15:51-58). 그리고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과 같이, 그들이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모두 다 그 잠에서 깨어나 다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확언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당당한 개선가를 부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있느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며,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즉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과 우리가 다시 만날 그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이니 여기 남은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며 "사랑 안에서 [서로] 귀히 여기며 [서로]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바로 이 맥락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입니다. '범사에'입니다.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특별한 것에가 아니라 모든 것에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알프레드 디 수자는 성경의 이 위대한 종말의 신앙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춤추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디 수자,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기도합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편 90:10-17). 아멘. (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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