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무소유의 공동체
손원영 목사(서울기독대학 신학대학원 전 교수)

입력 Dec 20, 2019 09:54 A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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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사진 = 지유석 기자 )
▲서울기독대학교 신학대학원 손원영 교수

한국인들에게 있어 '무소유'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일 것이다. 이 책은 비록 지금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절판되었지만, 1976년도에 첫 출판된 이래 지금까지 여러 일화를 남기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본래 법정이 첫 남방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를 번역하면서 그것에 영감을 얻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숫타니파타』에서 우파시바가 석가에게 물었다. "석가시여, 저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큰 번뇌의 흐름을 건널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건널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분이시여." 그러자 스승은 대답하였다. "우파시바여, 무소유에 의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생각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 모든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집착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피라." 여기서 암시하는 것처럼 무소유는 단순히 모든 소유를 갖지 않는다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법정의 책 『무소유』에서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다름 아닌 법정 자신이 애지중지 키우던 '난초'에 자신이 너무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것을 친구에게 넘기는 모습이다. 그 일을 결행한 뒤, 그는 '무소유'에 대하여 이렇게 소회를 적고 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사실 무소유는 불교만이 전유하는 가르침이 아니다. 그 유래를 찾는 학자들은 인도의 종교 중 금욕을 특히 강조하는 자이나교에서 그것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는 주장도 있고, 혹은 고대 그리스의 무소유 철학자인 디오게네스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종파를 불문하고 무소유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예외 없이 강조되는 핵심적 가르침이다.

물론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 안에도 무소유와 관련된 말씀이 무수히 많다. 특히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무소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마 6:19~21) 그리고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 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 두는 무소유의 사람이 되라고 권하신다. 법정 스님이 말한 집착이 없는 청정한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무소유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출판된 같은 해에 소위 성서의 전통을 강조하는 유대인의 '무소유' 철학자 에릭 프롬(Eric Fromm)이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출판한 것이다. 두 분 사이에 어떤 세상적인 인연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두 분 다 물질문명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사회를 걱정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소유 지향적 삶에 저항하며 그 대신 존재 지향의 삶을 살라고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프롬의 말 역시 오랫동안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는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인간은 그가 과거에 축적한 것(돈, 땅, 명성, 사회적 신분, 지식, 기억)에 묶여 있다."

사실 우리가 소유 곧 자본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에 살면서 '무소유'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모순적인 일이요 더 나아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마치 그것은 e-스포츠 경기 중 플레이어가 어처구니없이 자신의 유닛을 잃어버리는 경기를 펼쳤을 때 '무소유!'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삶은 과거의 축적된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충실한 존재 지향의 삶에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 하나는 기독교의 무소유란 그 어느 종교들보다 '공동체적 무소유'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개인수덕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라면, 기독교의 무소유는 보다 더 적극적인 '공동체적 무소유'에 가깝다.

그 정신은 예수께서 세상 재물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라고 교훈하신 말씀 속에,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체험 후 초대교회 신자들의 유무상통의 모습 속에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기독교의 무소유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제자들(공동체)이 함께 추구해야 할 공동체적 무소유이다. 이것은 공동체적 나눔을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곧 공동체적 무소유를 추구하는 공동체로서, 교회 자신이 먼저 가난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부동산이나 금융자본 같은 소유의 추구 대신에 철저하게 공동체적 자유와 사랑을 실천하는 무소유의 공동체이다.

※ 이 글은 손원영 목사(서울기독대 신학대학원 전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글은 앞서 <주간기독교> 『218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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