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뒷모습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출애굽기 33:18-23, 야고보서 4:8-10, 마태복음 5:8 -

jangyoonjae_0512
(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권영상 시인의 <뒷모습>을 읽어봅니다. "깨끗이 세수를 하고 / 거울을 들여다본다. / 단정한 / 내 앞모습이 / 거기 있다. / 그러나 / 그때마다 마음에 / 걸리는 것은 / 거울 속에 뵈지 않는 / 내 뒷모습이다. / 외로울 때 / 나의 뒤에서 / 뒷심이 되어주던 뒷모습 / 거기 혼자 있는 / 뒷모습이 보고 싶다. /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뒷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스스로 볼 수 없고, 거울로도 볼 수 없는 모습을 말입니다. 남들만 정확히 볼 수 있는 그 모습 말입니다.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란 말이 있지요. 제 아내는 저의 앞모습에 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쓸쓸히 돌아선 제 뒷모습이 가여워서 사랑하게 됐다나 뭐라나 합니다. 하긴, 제 얼굴이 '여대에 있기에 안전한 얼굴'이라 안심하고 뽑았다는 전직 총장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제 아내의 고백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뒷모습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누추한 모습인가요?

성서에도 뒷모습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뒷모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나옵니다. 배경은 바로 앞 출애굽기 32장입니다. 홍해의 기적으로 파라오의 군대를 따돌린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러 혼자 산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모세가 오랫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이 매우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귀에 단 금고리들을 녹여서 수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의 부재를 신의 부재로 느끼고 눈에 보이는 신의 형상을 만들어 불안을 달래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모세는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그들의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라고 하나님을 가로막으며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님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대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셨던 그것, 곧 이스라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약속한 땅을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은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십니다. 하지만 정작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분노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손수 새기신 글자가 있는 돌판 두 개를 던져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레위 자손을 불러 그들의 친족과 친구와 이웃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게 했습니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림잡아 3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이렇게 끔찍한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제 출애굽의 대역사는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너는 가서,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 백성을 이끌고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고 그들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올라가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3장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사실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쪽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므로,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를 없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지키시겠지만, 이제부터는 혼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절망을 의미했습니다. 출애굽의 실패를 의미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세는 지혜로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가 회막(會幕), 즉 만남의 장막을 쳤습니다. 모세는 이 특별한 장막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 회막에 들어서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섰습니다. 백성은 그때마다 모두 일어서 저마다 자기 장막 아귀에서 엎드려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이제 백성은 신의 현존을 눈으로 보며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모세는 회막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담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저에게 이 백성을 저 땅으로 이끌고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누구를 저와 함께 보내실지는 저에게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먼저 모세가 말을 꺼냅니다.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혼자 가라고 하시느냐는 반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실 만큼 저를 잘 아시며, 저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주님을 섬기며, 계속하여 주님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부디 저에게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께서 이 백성을 주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정녕 자신을 하나님의 눈에 든 사람으로 생각하신다면 자신의 갈 길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 진솔함과 간절함에 감동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세를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

하지만 모세는 확실한 보장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다시 간청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친히 함께 가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친히 동행해 주실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확증을 얻기 위한 노력입니다. 치밀하고 집요합니다. 인자하신 주님은 모세의 말을 받아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잘 안다.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리라."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가시겠다고("I will go"), 그리고 모세의 요청을 다 들어주시겠다고("I will do")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의 걱정은 다 사라지고 바라는 것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시내산 앞에서 일어난 황금 송아지 사건으로 깨졌던 관계는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담판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전히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모세는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동행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약속하셨는데, 모세는 그것으로는 불충분하고 확실한 보증을 눈으로 보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눈으로 보지 못하면 불안에 떨었던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도 별반 다름이 없었던 걸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나는 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개역개정)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다"라는 이 말씀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처음 뵈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거기에 답하신 것과 똑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출애굽기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개역개정)라는 번역도 있지만, "나는 곧 나다"라는 말씀은 이름을 알려주기를 거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여쭈었는데 '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 규정되는 분이 아닙니다. 모세는 다시 처음으로 소명 받을 때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주다"라는 말씀은 곧 "나는 나다"(I am I am)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혹은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먼저 당신이 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주권자는 자유롭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영광을, 혹은 당신의 모든 선한 모습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는 하겠지만 당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그러니까 하나님의 앞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유한(有限)은 무한(無限)을 감당할 수 없지요. 인간은 신의 광채를 볼 눈이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모세를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게 한 다음 그 바위틈에 그를 집어넣고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 앞을 다 지나갈 때까지 손바닥으로 그를 가려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은 이 유명한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앞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미켈란젤로는 1511년에 그린 작품 <식물의 창조, 해와 달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뒷모습을 그렸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상하 혹은 좌우로 비스듬하게 바라보는 '단축법'을 구사하여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깊숙한 공간감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엉덩이가 무척이나 생생하게 그려져 살짝 불경스럽기는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본 하나님의 뒷모습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뒷모습은 하나님의 외모나 생김새에 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혹은 앞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용모나 겉모습에 관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신 그의 영광, 그의 선함, 혹은 그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어떤 광경(sight)이 아니라 그가 어떤 분이신지, 그가 어떤 존재이신지에 대한 묘사(description)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외모(appearance)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character)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는 갈 길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계획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행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지 않으시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가시겠다고("I will go") 또 모든 요청을 이루어주시겠다고("I will do") 확언을 하셨을 때 모세는 확실한 증거(proof)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만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선함과 현존의 뒷모습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올 한해도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내 눈앞에 보인다면, 혹은 내 앞길을 미리 소상히 알려 주신다면 안심하겠는데 하나님의 존엄한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런데 한해의 끝에 가서 뒤돌아보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지난해 말의 경험이었고, 매일 저녁 저의 경험입니다.

출애굽기 33장 맨 끝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뒷모습 이야기는 모세가 실제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지나고 나니 그분이 하나님이었다는 모세의 고백일 것입니다. 지나고 나니 그 길을 하나님이 동행하셨다는 모세의 깨달음일 것입니다. 모세는 갈 길을 몰랐습니다. 아니 모세 앞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적과 같이 애굽을 탈출해 온갖 고난 속에서 약속의 땅 앞에 당도해 뒤를 돌아보니 갈 길을 열어주시고, 언제나 동행하시며, 항상 자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우리도 지금은 하나님의 섭리나 계획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아, 그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일을 하신 거구나'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미리 하나님의 일을 알거나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아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앞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인간은 알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절대 우연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뒤늦지만, 우리는 마치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뒷모습입니다. 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겉으로 보기에 구원받은 자, 성공한 자, 하늘의 뜻을 아는 자, 온전한 자, 고통이 없는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앞모습입니다. 하지만, 캐롤 위머(Carol Wimmer)의 시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구원받은 자임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죄인이었음을 속삭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 교만한 마음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실수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 강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 성공했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내가 진 빚을 다 갚을 수 없다고. /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혼란스러움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구한다고. /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믿는다고. / 삶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몫의 고통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찾는다고. /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권위가 내게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의 출생과 신분과 같은 앞모습이 아니라 그가 과연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았는지와 같은 뒷모습으로 평가됩니다. 그가 어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가보다는, 그가 포근한 위로의 말로 늘 남의 눈물을 닦아주고 웃음꽃을 선사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졌는가로 평가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그가 무슨 교회에 다녔는가보다는 그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였는가로 평가됩니다. 그가 어떤 교리를 가졌는가보다는 그가 진정 이웃의 진실한 벗이 되어주었는가로 평가됩니다. 우리는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뒷모습>입니다. "뒷모습이 어여쁜 / 사람이 참으로 / 아름다운 사람이다 //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 또 하나의 표정 // 뒷모습은 / 고칠 수 없다 /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거울 속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 내 뒷모습입니다. 오로지 타인만이 볼 수 있는 모습,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모습, 또 하나의 나, 진정한 나의 모습이 바로 뒷모습입니다. 우리는 그걸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손을 가질 때 우리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손은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친구를 위해 내미는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외로움에 허덕이는 사람을 위해 편지를 쓰는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하루 종일 수고한 아버지의 어깨를 주무르는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낙망하고 좌절한 이에게 내미는 격려의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사랑하는 사람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나 아닌 남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손 / 그 손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 그 아름다운 손은 지금 당신에게 있습니다." 내 뒷모습은 꾸밀 수 없어도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손은 지금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용하십시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은 단지 외모만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려가 깊고 이웃을 배려하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유언>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며 친절한 말을 하십시오.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십시오.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당신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십시오.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십시오. 아름다운 자태를 갖고 싶으면 당신 자신이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해서 걸으십시오.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며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합니다. 결코 누구도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도울 손이 필요하다면 당신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쓰면 된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당신의 손이 두 개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입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의 말씀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또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야고보서 4:8-9).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에, "마음이 청결한[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영광을 먼저 추구하면 하나님의 현존은 감추어집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볼품없는 예수님의 얼굴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인간이 찾는 영광은 다 그림자입니다. 영광을 먼저 추구하면 하나님의 참모습은 감추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뒷모습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해도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친히 동행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영광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내 앞으로 지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얼굴은 나에게 보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그의 뒷모습만 보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섭리를 미리 다 알 수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 눈에 아무 증거 보이지 않아도 나와 세상 끝까지 함께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이 곧 나의 확증입니다. 내 귀에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사랑이 곧 나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그분처럼 뒷모습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문은 이화여대 대학교회 장윤재 목사의 1월 19일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신학대학 살아남으려면 여성신학 가르쳐야"

신학대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성신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백소영 교수(강남대 조교수, 기독교사회윤리학)는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