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모든 것이 변화할 때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1장 1-9절, 시편 14편 1-4절, 마태복음서 6장 25-34절

김 은 숙 권사/한 문 덕 목사

[여신도주일과 평신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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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우리교회의 두 번째 목표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입니다. 다양한 목회활동에서 평신도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할 것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하고 있고, 실제 목회운영위원회 중심의 교회운영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사나 장로가 중심이 되어 예배위원이 되는 일반 교회들과 달리 우리는 목회기도를 일반 제직들이 돌아가면서 함으로써 예배에서도 평신도들의 참여가 활발합니다. 설교 또한 목사만의 전유물일 수 없기에 작년부터 평신도 설교를 시도하고 있는데, 작년 여신도 주일은 채경숙 장로가 해 주셨고, 올해는 평신도 강단교류로 동녘교회에서 설교를 한 경험이 있는 선교부장 김은숙 권사께서 강단에 섭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를 마음이 있고,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깊이 묵상했던 말씀을 나누고, 삶에서 실천했던 경험들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평신도 설교는 전문적으로 신학적 훈련을 받은 목사와는 여러 지점에서 다를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당사자는 많은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말씀을 훨씬 다양한 관점에서 묵상하고, 교인들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마음에 더 깊게 다가가는 시간이 됩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 전교우가 한 번씩은 설교를 준비하고 해 보는 경험을 꼭 해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정관에 따라 2년 뒤에는 저에게 6개월의 안식년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때에 많은 교인들이 주일 설교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면서 큰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의 전체를 살피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제 김은숙 권사의 설교를 듣겠습니다.(한문덕 목사)

[평신도 강단교류의 경험과 기성세대들의 특징]

오늘 여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지난번 평신도 강단교류에서 했던 내용으로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여신도보다는 평신도에 중점을 두고 오늘 말씀에 임하겠습니다.

그날 제 설교의 내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성세대 기독교인들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는지, 우리가 더 나이들었을 때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 그 때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는 것들이었는데 돌이켜보니, 이 원고는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같이 공부하고 이야기 나누었던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성세대란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제 은퇴를 하거나 은퇴를 앞둔 우리 베이비붐 세대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회 변화를 겪어 왔기에 기존 부모 세대와는 다른 생활양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농경사회와 고성장 산업사회를 거쳤고, 인터넷 세상을 넘어 4차 혁명시대까지도 살게 될 세대입니다. 무엇보다도 국가 고성장기에 20,30대를 보냈고, 졸업 후엔 바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경제적으로 윤택한 부류들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거의 대부분 취업을 했고 알뜰하게 저축하여 부동산으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으며, 자녀들도 두 세 명 정도라 웬만한 집이면 자녀들을 고등교육까지 마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환갑을 넘나드는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젊은 언니, 오빠들로 남고 싶어 미용과 건강 정보로 무장하고 웰빙(well-being)의 삶을 추구하는 꽃중년들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백세시대가 이제 보통명사가 되게 만들어버린 주역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시점에서 그들이 은퇴 시기가 되었고,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예전 부모세대 때는 은퇴하면 당연히 집에서 손주들 돌보고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노인 대접을 받았지요. 그게 자연스러운 생의 한 과정이었기에 특별히 고민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너무 달라지고 변하였기에 그 어느 것도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녀의 봉양을 받기는커녕 취업 못한 자녀들 뒷바라지가 남아 있어 아직도 봉양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결혼을 안 하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안 낳기에 돌봐주고 싶어도 돌 볼 손주들이 없습니다.

아들을 결혼시킨 시어머니들이 며느리에게 잘해주는 방법이 요즘 젊은 며느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답니다. '며느리에게 뭐 시키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말고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고.....' 또는, '효도는 셀프다..... 각자 자기 부모는 자기가 알아서 모셔라' 뭐 이런 말들이랍니다. 우리 교회 며느리들은 안 그런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 말대로라면 서로 인연을 끊고 사는 게 잘 사는 길인 거죠.

그러니 이제 우리 세대들이 믿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얼마 가지고 있는 돈과 그동안 사이가 원만한 부부였다면 아내와 남편밖에 안 남은 거죠. 이 두 가지라도 남은 사람들은 인생 성공한 분들입니다. 여기에 건강만 특별히 나쁘지 않다면 큰 무리 없이 여생을 마치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변화는 앞으로 달라질 세상과 비교한다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세상의 변화 앞에서 교회는?]

앞으로 다가올 세상, 소위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세상은 좋건 싫건 현재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변화로 우리의 삶을 뒤바꿔놓을 거라고 합니다. 이제 이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도 대중화 되어 AI라든가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이란 용어를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로봇이 인간의 모든 생활패턴을 인식하고 수집하여 인간의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게 된다는데, 앞으로 2030년이면 인공지능(AI) 기술이 거의 완성되고 2045년이면 범용화 된다고 합니다. 범용 AI가 범용 로봇에 탑재되는 게 일상화 되면 인간의 이성은 물론이고 정신과 감정도 인간만의 전유물이 되지 못하고, 감정을 가진 로봇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되는 시대가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이 안 된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그 시대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올 것은 자명한 일인 듯 합니다. 그러니 우리 자녀들이 그 때에 가서 로봇인간과 결혼 하겠다느니, 로봇을 몇 개 들여 놓고 키우겠다느니 할 걸 생각한다면, 지금 사람과 결혼해서 비록 각자도생 하며 살자고 하더라도 그것이 훨씬 인간적이고 눈물겨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견뎌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매주 섬기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무엇보다도 교회가 급속도로 고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교인 수가 자연적으로 감소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 거는 작금의 추세가 분명합니다. 물적으로 많은 투자를 하는 몇몇 대형교회나 젊은 목회를 지향하는 마인드를 가진 목사님이 계시는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많은 교회가 이 같은 현실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세상은 변하고 다양화 되어가는 데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한쪽에서는 교인들이 세상에 귀 닫고 눈 감고 교회 안에서만 있기를 바란다면, 또 한쪽에서는 왜곡된 정치참여에 교회가 교인들을 동원하려고 힘쓰고 있지요. 태극기 부대를 앞세워 종북몰이를 한다든지,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일에 앞장선다든지, 타 종교를 배척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들입니다. 결국 교회 신자들의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시켜, 안으로는 교회를 자본화 시키고 목사를 세습하게 만들고, 권력을 이용한 비리를 덮으려는 거지요. 이런 기독교 현실 속에서 젊은이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젊은 교우들이 밖에서 교회 다니는 것을 드러낼 때 '커밍아웃'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힘들다는 뜻이겠지요.

한편, 지극히 세련되고 엘리트적이며 고급 취향을 향유하는 중산층 교회들도 그들만의 울타리를 치고 작은 교회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며 종교를 소비하고 있다고 봅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당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현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에 젊은 세대들은 교회가 지극히 낯설고, 자신들이 처한 현실의 고통을 나눌 수 없는 교회를 외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젊은 세대들은 이전보다 더 발전한 사회에서 살기에 더욱더 그들은 우리 사회에 촘촘하게 나누어진 계층별 불평등에 더 분노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고용형태가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냐, 집이 있느냐 없느냐, 어느 지역에서 사느냐 등이 그들의 존재가 되어 그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1대 99'의 사회보다 '20대 80'의 사회의 불평등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보면서, 그 원인이 바로 세대 간 불평등에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앞 세대가 부를 너무 많이 차지하여 다음 세대가 가져갈 몫을 빼앗고 있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과거 고성장기에 시장에 진입한 우리 '86' 세대들이 이제 상층 노동시장을 너무 오래 점유하고 있기에 청년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논리지요. 이 논리가 현실 문제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젊은 세대에게 기회가 줄어들어 같은 계층 내에서도 계급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은 일정 부분 맞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재력을 나누어 받은 부류들과 그렇지 못한 많은 젊은이들로 나누어지기에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말이 생기는 거지요.

그러므로 이제 교회가 살려면, 이런 젊은이들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안식처가 되고,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있어야 교회도 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우리 '86'세대들이 자신들의 방식과 생각을 내려놓고 젊은이들의 후원자, 지지자, 도우미가 되어야 합니다.

[꼰대가 되지 않는 법]

여러분은 '꼰대'라는 말을 다 알고 계시죠? 얼마 전 BBC방송은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꼰대'를 선정 했는데, 이 말의 정의를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항상 틀리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여러분은 '꼰대'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으신지요. 혹시 내가 꼰대는 아닌가 생각해 보셨나요? 우리가 꼰대가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몇 가지 지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의 특별한 취향이 아닌 요즘 세대의 흐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젊은이들에게 놀랐던 경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많이 저지르는 꼰대 유형의 하나죠. '안물안궁'이란 말이 있습니다. 안 물어보고 안 궁금한데 자꾸 가르치려 하면 100% 꼰대라는 거죠. 또는, "나도 해봐서 아는데...." "그거 지나면 별거 아니야...." "그러니 너무 유난 떨지마라....." "너네는 그것도 못하니......" "한심하다 한심해....." "그렇게 의지가 없어서야......"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 "요즘 애들은 왜 그러지....." "이해가 안 되네." 이런 말들이 다 이 유형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셋째는 잔소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많이들 쓰는 영어 알파벳 TMT가 뭐의 약자인 줄 아십니까? "too much talk" 맞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일이죠. 노파심에서, 아이들의 무심함에 마음이 안 놓여서, 우리들은 일상에서 젊은이들에게 TMT를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위의 지적들은 우리의 젊은 시절로 되돌려 봤을 때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들에게 하던 모습들입니다. 그 때는 그런 어른들의 '꼰대질'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 한마디로 먹히는 시대였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규범이 된 거지요. 기존의 농경문화식 위계질서로는 그들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이해 안 될 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과 의견이 다를 땐 내 의견을 내려놓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우리의 신앙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아직 어리숙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의 어리숙함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그들의 방식이 어설프고 낯설더라도 우리가 맞춰가고 나아가 우리도 그들의 방식을 배워가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는 전통적인 것을 지켜야 한다는 분들과 시대에 따라 교회도 달라져야 한다는 분들의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두 진영의 의견을 발전적으로 해석하고 합일점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같이 공부하고 상상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제 백세시대이니 노인들도 힘 될 때까지 계속 일을 하라며, 그게 보람 있는 삶이고 자식들에게 경제적으로도 폐 안 끼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퇴직을 하고도 또 다른 일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하니까요.

오늘 마태복음서의 본문은 이런 우리의 마음을 마치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 말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공중에 나는 새도 들에 핀 백합도 주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시니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고....."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니 주실 것이라고......"

오늘날의 하나님은 국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십니다. 그런 걱정은 이제 우리가 할 게 아니라 국가에서 해야 합니다. 퇴직연금 국민연금 주택연금.... 안 되면 노령연금까지..... 국가에서 생애주기 별로 확실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돈 없어 돈을 안 쓰면 내수가 돌아가지 않아 국가와 기업이 더 걱정해야겠지요? 그러므로 기본 소득도 과감하게 시행해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시혜나 복지가 아니라 미래에 온 인류가 함께 살기 위한 방식입니다. 반면에 우리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소비지향적인 삶을 은퇴 후에도 유지하려고 애쓸게 아니라 조금씩 덜어내고 줄이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또는 교회를 통해서 해야 할 일들을 찾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족 같은 공동체가 되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새롭게 배우면서, 함께 우리 노년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노년의 삶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입니다. 교회학교 일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세상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촛불 들고 길 위에도 나서고, 사회선교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기부하며, 세상에 동참해 보는 겁니다.

동년배들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시대에 부응하는 생산과 소비, 주거를 공유하는 새로운 공동체적 삶의 방식도 도전해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이 사이보그 시대에 진정한 인간됨의 가치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나 혼자만의 변화가 아닌 우리 함께 변화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는 새로워지고 기독교인들은 말 그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 함께 가는 길이 기쁨이 되고 축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김은숙 권사)

[모든 것이 변화할 때!]

오늘 김은숙 권사께서 정한 설교제목은 "모든 것이 변화할 때!"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응합니다.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들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며, 심지어 죽음의 위기를 더 많이 맞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는 환경에 적응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에도 잘 적응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야 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는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유한함을 넘어서는 초월 경험들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성공에 도취하고, 실패에 좌절합니다. 돈이든 권력이든 그것을 소유하는 것에만 주로 집착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혼란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착한 일을 하는 백성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시인이 탄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할 때 필요한 것 중에 하나는 집단 지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모여서 서로 돕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여서 한 마음 한 뜻이 되면 능히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잘 경청하고 수용하여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며 가장 좋은 생각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묵살해서는 안 됩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 없이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함께 뜻을 모을 때 또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모두가 뜻을 모아 가는 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그것만큼이나 큰 실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바벨탑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시날 평지에 도시를 세우고 바벨탑을 쌓기로 계획했던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려는 잘못된 방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업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지배자들은 백성들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백성이 지닌 저마다의 의견들은 무시하며 흩어지지 못하도록 억압했습니다. 고대 제국의 도시들이 건설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착취와 억압, 강요된 획일성을 흩어 버리신다고 성경은 두 번(8절, 9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2월 1일 포도나무회는 "4차 산업혁명, 이미 와 있는 미래"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합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는 이미 현재에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와 있는 미래에 우리 모두가 잘 적응하려면, 모든 것이 변화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향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모두에게 경청하며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것입니다.

생명사랑교회 또한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준비하지 못하면 변화의 홍수에 쓸려가고야 말 것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집도 한순간에 흔적 없이 사라지듯이, 1000만 성도를 자랑하는 한국교회도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넘으려면 무엇보다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공중의 새와 들판의 꽃 한송이에서 하나님의 섭이와 은혜를 누리셨던 예수님의 그 믿음과 여유를 지녀야 합니다. 부드러운 갈대처럼 유연함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하는 일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더 나은 일들에 도전하고 시도하며 함께 해 나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기도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기도는 먼저 내 뜻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듣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명사랑교회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참된 아들이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 예수를 따라 하나님의 효성스런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책임지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새해가 밝았고, 벌써 20여일이 지나갑니다. 매일이 새롭습니다. 모든 것이 변화할 때, 그 변화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붙드시고, 변화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해 가시는 생명사랑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여신도 주일로 예배를 드리며 모든 것이 변화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그 변화를 타고 새롭게 다시 태어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입히시고 먹이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총 속에서 변화의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불안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여유를 갖게 하여 주소서.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며 앞서가는 생명사랑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 일에 온 교우가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게 하여 주소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성령의 도움을 받게 하여 주소서. 이 사회에 생명사랑교회를 세우신 당신의 뜻을 기억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굴곡이 있고, 그늘이 있고, 때때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이 있더라도 감사를 놓지 않게 하여 주소서. 불평과 불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헛되게 소비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보이는 것에 취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작은 일에 얽매여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건져 주소서.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모두 받아주소서. 받으셔서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빵은 필요하지만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준비된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변화에 휘둘리지 말고 변화를 주도하는 삶이 되십시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 이 설교문은 생명사랑교회 한문덕 목사의 1월 19일 주일설교 원고입니다.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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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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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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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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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7] 중세교회 대중들의 신앙생활

중세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스콜라주의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콜라주의 문헌들은 라틴어로 쓰여졌는데, 이것을 읽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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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학 6] 중세 신학의 대략적 지도: 서방의 '스콜라 신학'과 동방의 '비잔틴 신학'

'중세 신학'이라는 용어는 통상 이 시기의 서방 신학을 가리킨다. 지리적으로는 유럽 지역이다. 초대교회 신학은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시작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