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때론 침묵이 천둥보다 울림 더 커"

박경양 목사·평화의교회 담임

prayer
(Photo : ⓒ베리타스 DB)
▲기도하는 성도의 모습. 위 사진은 해당 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스승이자 존경받는 예수회 신부 페레이라가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일본 선교를 자원합니다. 둘은 현지 안내인 키치지로의 도움으로 일본 잠입에 성공하지만 이내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신자들이 처형되는 모습을 본 가르페는 그들에게 달려가다 목숨을 잃습니다. 로드리고는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할 뿐입니다.

이후 키치지로의 밀고로 체포된 로드리고는 나가사키 봉행소에서 스승인 페레이라를 만나고, 페레이라는 한밤중에 로드리고를 찾아와 배교를 설득합니다. 순교를 각오한 로드리고는 이를 거절하지만 그를 괴롭히던 코 고는 듯한 소리가 고문당하는 신자의 신음소리이며, 그들은 배교했음에도 로드리고가 배교하지 않는 한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신앙을 고수하다 순교할 것인지, 아니면 배교함으로써 고통 받는 신자들을 구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빠집니다.

로드리고는 페레이라도 같은 이유로 배교했다는 사실을 알고 마침내 배교의 의미로 예수의 성화상을 밟기로 합니다. 새벽에 배교를 위해 동판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을 밟는 로드리고는 발을 통해 전해오는 격렬한 통증을 느낍니다. 그 순간 성화 속 예수는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성화를 밟고 절망하는 로드리고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찾아 온 키치지로의 얼굴을 통해 예수는 "나는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너희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 배교가 순교보다 괴롭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은 후 예수의 가르침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고 자신이 일본에 최후로 남은 기독교 사제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17세기 가톨릭교회의 일본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과 기록에 기반한 엔도 슈사쿠의 역사소설《침묵(沈黙)》의 줄거리입니다. 성공회 성프란시스수도회 요한의 집에서 하고 있는 10일간의 침묵기도 중에 문득 대학시절에 감동하며 읽었던 이 소설이 생각났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누구든지 한 번 쯤은 했을 경험입니다. 그리고 이 침묵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무신론자로 변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무정함과 비겁함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침묵은 가장 강렬한 소리일 수 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이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예수는 로드리고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순교보다 너의 배교가 더 힘든 선택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일상에서도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또 아무리 기도하고 매달려도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 불의에 모두가 분노하고 소리칠 때에도 침묵하는 하나님,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의 사정과 이해할 수 없음과 분노를 그분은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침묵은 때론 가장 큰 그분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박경양 목사(평화의교회 담임)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본보는 앞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신앙성찰에 도움이 되는 유의미한 글을 게재키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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