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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규]오늘을 사는 웨슬리: 사회성화를 중심으로

이봉규 사관(구세군사관학교)


6개 신학대학원 학술제 발제문

1. 서론

신학이 그 시대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으로 다가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지 못할 것이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당시 영국사회에 다수에 속한 빈민들의 삶 속에 다가가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웨슬리 신학을 논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신학이 실천적이고 산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도 ‘오늘을 사는 웨슬리의 심정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는 매우 빠른 속도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웨슬리가 당시 산업혁명과 이성의 시대를 잘 극복해 나갔듯이 오늘의 웨슬리의 신학은 격변하는 이 시대 속에서 실천적이고 산 신학을 해야 한다.

먼저 웨슬리 신학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웨슬리 신학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오늘의 시대를 의식하면서 기술해 나가려고 한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사회성화는 신학의 몸통과도 같다. 모든 신학이 사회성화를 향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두 번째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이라는 새로운 시대 속에서 웨슬리 신학을 만나는 시도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연약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이끌어 가는 모습이어야 하는데 세상에 변화당해서 세상의 가치관에 이끌려 가는 모습이다. 특히 세상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를 망각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질책을 쏟아 놓고 있다. 오늘 존 웨슬리가 다가와서 외치는 그 음성이 희미하게나마 들려오기를 바란다.  

2. 웨슬리 신학

웨슬리 신학은 일반적으로 구원론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선재적 은총, 회개, 의인화, 거듭남, 성화, 완전성화, 영화라는 구원의 여정을 통해 그의 신학을 논한다.

  1) 선재적 은총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은 먼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갖고 다가오신다는 것이다. 선재적 은총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재 은총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응답 없이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선재하는 은총은 그 시대의 인간에게 다가가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응답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인간의 응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대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2) 회개
 
선행 은총에 의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는 회개를 종교의 현관으로 보았다. 회개에는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로 나눌 수 있다. 율법적 회개는 율법에 의해 죄를 철저히 깨닫는 단계이다. 자연인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의 모습이다. 복음적 회개는 죄를 깨닫고 자기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단계이다. 회개한 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3) 의인화 

의인화(義認化)는 선행 은총에 의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 사람에게 임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의인화 과정은 인간의 어떤 행함도 개입하지 않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지하는 객관적인 은총(imputation)으로 우리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게 하는 관계적 변화가 일어난다.

  4) 거듭남

어거스틴의 은총의 이해의 양면성과 동방교회의 영성 이해를 수용한 것으로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은총(impartation)이다. 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으로 우리의 내면에 실제적 변화를 일으킨다. 거듭남으로부터 성화는 시작된다. 성화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5) 성화

웨슬리 신학은 동방 교회의 영향을 받아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의 모습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과정 전체를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설명한다. 웨슬리의 성화 개념은 먼저 개인의 성화가 전제가 되고 동시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사회 속에서 이루어 나가는 사회적 성화를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일직선적인 개념은 아니다. 사회적 성화는 또한 내면의 성화, 개인 성화에 영향을 주어서 더욱 성숙된 모습이 되게 한다. 웨슬리는 특히 사회적 성화를 강조했다. 사회적 성화가 아닌 성화는 참 성화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사회성화는 웨슬리 신학의 중심부이다. 창조와 새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우주적 성화까지 확장된다.

  6) 완전성화
 
웨슬리는 은총의 낙관주의를 갖고 신학을 했다. 물론 시대상을 나타낸다는 의견도 있다. 루터가 가톨릭 신학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칭의에 무게를 두었듯이,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너무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웨슬리의 완전성화는 이 땅에서 죄가 없는 상태를 강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성화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에 강조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죄성에 강조점을 두면 인간이 성화해 나가는데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인간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 되어가는 측면을 더 강조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낙관적은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에 접근해 갈 수 있다. 계속적인 완전에로의 성숙이 있기 때문에 사실 완전 그 자체는 아니다.

  7) 영화
 
완전성화는 무의식적인 죄가 남아 있다. 단지 의도에서 순수한 성화이다. 하지만 천상에서는 자범죄와 더불어 무의식적인 죄까지도 모두 사함 받는 완전한 상태가 된다. 이 단계가 바로 영화의 단계이다. 무지, 실수, 연약함, 유혹에서 자유하고 몸도 신령한 몸을 입는다.

  8) 웨슬리 신학과 사회성화
 
마치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문을 열면 집의 거실이 나오듯이, 웨슬리 신학은 의인화와 거듭남을 통해 대문과 현관문을 열고 성화라는 집에 거하는 것과 같다. 사회성화는 성화라는 집에 거실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가정에 식구간의 대화와 협력, 사랑이 없다면 참다운 가정이 될 수 없듯이, 사회적 성화가 없으면 성화 자체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사회적 종교가 아닌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웃 사랑이 빠진다면, 이웃과 나누고 서로 돕고 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다. 웨슬리는 이것을 간파하고 매우 강조했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혹시 자신들의 전용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리고 나오지 않는 그런 모습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되물어야겠다. 이런 삶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웨슬리의 진단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아주 큰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3. 웨슬리 신학의 특징

  1) 대중신학(folk theology), 실천적 신학(practical theology), 산 신학(living theology)이다. 당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중심으로 한 신학이었다. 웨슬리 당시 영국 사회의 최저 생계비는 약 30 파운드로 추정된다.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 최저 생계비 이하의 인구가 절반을 약간 상회하였다. 이에 반해 웨슬리의 목회 현장에는 65%-75%가 최저 생계비 미안인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65%는 20파운드 미만의 극심한 생활 보호 대상자였다. 웨슬리는 이들을 위해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것보다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를 위해, 목회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신학을 하였다. 웨슬리 신학은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현실 속에 들어가 거기서 평민들의 문제 안에서 신학이 나왔다. 대중의 필요와 맞닿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신학이다.

   2)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응답하는 신학이다. 웨슬리의 신학은 구원의 처음 단계부터 인간의 응답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재하는 은혜가 모든 인간에게 다가가서 전적인 타락 상태를 극복하고 희미하나마 하나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된다. 인간은 법적으로만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요청에 반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자가 된다. 의가 하늘로부터 전가되어 오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고 닮아간다. 루터나 칼빈의 신학에 비하면 인간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인간이 반응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간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제가 되는 신학이다.

  3) 웨슬리의 신학은 치유와 변화가 전제되어 있다. 웨슬리는 동방교회의 마카리우스(Macarius the Egyptian)등의 영향을 받아 구원의 과정을 치유적 과정, 회복의 과정으로 본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다. 띠라서 웨슬리 신학은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해야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과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성장하지 않고 치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4) 사회적 성화를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웨슬리 신학에서의 사회적 성화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사회봉사,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은혜의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적 성화가 없이는 성숙이 어렵다.

  5) 웨슬리 신학의 종합하는 힘이다. via media(신학적 중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웨슬리 신학은 사변형 즉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서, 전통이 초월적인 부분에 가깝다면 이성과 경험은 인간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이 강하다. 그러나 이 네 가지의 신학의 방법론을 갖고 신학을 하면 초월성도 내면성도 채워진다.

웨슬리 신학은 초대교회, 동방교회, 서방교회의 신학전통을 모두 종합하고 있다. 의인화는 서방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고 성화는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웨슬리는 늘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사회를 소망했다. 그의 신학에는 가톨릭적인 행함의 부분과 개신교적인 믿음의 부분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6) 웨슬리 신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준 것은 1738년 5월(날짜 확인)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거듭남을 체험한 사건이다. 이를 통해 성령 중심의 신학, 성령 중심의 삶을 살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응답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성이 더 강조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신학을 했다.

  7) 소그룹 공동체를 통한 신앙 훈련과 영성 생활이 웨슬리 신학의 큰 특징 중에 하나이다. 웨슬리 시대는 이성주의의 영향 등으로 신앙이 많이 약화되고 형식화 되어 있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이 소사이어티(society)를 만들어 신앙 훈련을 했다. 웨슬리는 그의 목회에 소그룹 공동체인 속회, 밴드 등을 도입한다. 공동체 영성을 통한 신앙 훈련 과정이을 도입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평신도를 치유하고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는 평신도 중심의 목회를 하였다.

  8) 웨슬리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았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자전거의 두 바퀴다. 앞바퀴는 이끄시는 하나님이고, 뒷바퀴는 뒤따르는 인간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내려놓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걸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것도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뒤 따르는 것이었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배우지 못한 자들 모두를 위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충실한 하나님의 뒷바퀴가 되었다. 

  9) 웨슬리 신학은 열려져 있다. 그는 성공회의 교구 개념을 뛰어 넘었다. 사역도 평신도 중심이었다. 교회나 국가 권력에 하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종교 개혁의 만인제사장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해 나갔다. 삶의 터전에서 누구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만인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선교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웨슬리의 청지기 의식은 자연에까지 확대되어 우주적 성화에 까지 확장되어 갈 수 있는 신학이다.

  10) 웨슬리 신학의 특징과 사회성화
 
이상의 웨슬리의 신학의 특징을 보면서 또 다른 측면의 사회성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즉 웨슬리 신학은 시대를 뛰어 넘고, 인간의 부패의 정도를 뛰어 넘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성화는 그렇게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매우 빠른 속도로 가치관이 바뀌고 있고, 세상의 삶의 방식이 바뀌고 있다. 교회가 혼란스러워 하고 성도들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고 도와줘야 할 대상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쉽게 단정 짓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11) 오늘을 사는 웨슬리
 
웨슬리 신학은 오늘의 현상을 정의 내리기에 앞서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간다. 같이 살면서 그들이 느끼는 것을 느끼고 그들의 결핍을 경험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철저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인간이 정의해 놓은 신학에 앞서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낙관주의의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신학이다. 시대마다 신앙을 잠재우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인간의 사상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으로 차오를 수 있다.

웨슬리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였다. 이신론이 신학을 주도해 나갈 때였다. 웨슬리 신학이 시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이성을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 시대의 경험론을 그의 신학에 포함시켰다. 웨슬리는 그 시대의 사람이었고 그 시대의 사상을 그의 신학 속에 넣고 이성과 경험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물론 그가 사용한 이성과 경험은 성서와 전통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성과 경험으로 다시 정리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성과 경험이 없는 성서와 전통도 또한 생각할 수 없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상, 패러다임이 기존의 신학에 큰 짐을 안겨 주었다. 전통적인 신학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상과 패러다임이 다시 하나님의 신학하기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수용하고 받아 들여서 다시 복음 안에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웨슬리는 18세기의 신학자였다. 그 당시에 외쳤던 그 복음의 모습이 아닌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맞는 21세기를 사는 웨슬리의 모습으로 나갈 때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3. 새로운 시대
 
우리 앞에 다가 온 새로운 시대를 후기 산업화, 정보화, 지구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부른다. 후기 산업화 시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정보화다. 이전의 금융 자본보다 이제는 지식과 정보가 더 중요한 경제 활동 요소가 되었다. 지구화 시대란 지구 전체가 하루 생활권이 된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이러한 현상을 시간과 공간의 압축으로 표현했다. 항공기가 이를 가능케 했다. 통신의 발달로 지구 어디에서나 누구에나 통신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전 세계 어디에나 참여하고 간섭하고 통제할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이성과 보편성에 기초한 진리의 개념이 개별성과 다원성에 기반을 둔 진리 개념으로 바뀌었다. 감성, 다양성의 시대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핵에너지, 인간의 복제, 유전자 조작 등 많은 새로운 분야가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지식의 소유, 공유, 나눔이 매우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세상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다양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장소와 시간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웨슬리 시대의 산업화와 같이 가진 자를 더 가지게 하고 못 가진 자는 더 못 갖게 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가진 나라는 못 가진 나라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만 정보 능력이 떨어지는 나라는 격차를 감수해야 한다.

 
기존의 전통과 기존에 억제력을 가졌던 규범들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정보화 시대의 가난한 자는 정보를 덜 가진 자다. 정보 시대의 소외된 자는 정보에서 소외된 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악성 댓글에 상처를 받고 있고 자살까지 시도한다. 자살 사이트가 있다. 자살 동영상이 유포되기도 한다. 인터넷을 통해 불건전한 이성 관계가 이루어진다. 컴퓨터 게임에 중독된 사람들이 생긴다.
 
이 시대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자연에 관심을 갖게 하는 시대다. 지구 온난화, 자원의 고갈, 기상 이변 등으로 인해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구는 이제 우리의 이용 대상만이 아니다. 우리가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지구의 재앙은 곧 인간의 재앙이 되었다.

교회도 새 시대에 무관하지 않다. 이런 시대가 고스란히 교회 안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인들은 설교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무분별한 성경 지식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다원화, 정보화, 지구화를 경험하며 살고 있다. 기존의 죄 의식, 기존의 생활 규범이 변하고 있다. 성결함에 대한 기준이 흐려지고 있다. 
 
4. 새로운 시대의 웨슬리 신학

 
알버트 C. 아우틀러(Albert C. Outler)는 그의 책 「웨슬리 영성 안의 복음주의와 신학」에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세 가지 측면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으로 들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양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급진적 상대주의라는 것이다. 서양 사회에서 거의 천년 동안 작용을 하던 도덕적 통제 시스템이 급격히 약화되어 가고 해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 심판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어졌다. 그들의 마음속에 심리학적 두려움과 종교적 죄의식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우틀러는 지금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150여 년 전에 충분했던 미국의 1, 2차 대각성 운동으로는 지금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개념
 
예전에는 농촌에 방앗간을 갖고 있으면 부자였다. 농촌에 땅을 많이 갖고 있으면 부자였다. 그러나 더 이상 농촌에 방앗간을 갖고 땅을 많이 갖고 있는 농민이기를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젊은이들 중에는 집을 먼저 사기 보다는 차를 사겠다는 말도 들었다. 집을 갖고 있는 것보다 좋은 차를 소유하는 것을 더 만족스럽게 여기는 경우일 것이다.
 
현대 사회가 지구화, 정보화, 지식화, 기술의 시대라면 거기에 맞는 가난에 대한 정의, 나눔에 대한 정의, 그 밖의 여러 가지 변화에 대한 정의들이 다시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웨슬리의 사회성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가난한 자에 대한 돌봄, 나눔이다. 웨슬리 당시의 가난한 자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는 분명 차이가 날 것이다.
 
웨슬리 당시 영국 사회는 대 다수의 민중을 이끌 영적이고 사회적인 힘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다. 평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상류층들은 자기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난한 영국 민중들은 교회를 버렸고 교회도 영국 민중들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당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육체적, 사회적, 영적인 구원이었다. 웨슬리 신학이 구원론 중심인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에 맞는 복음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웨슬리는 당시 옥스퍼드의 교수였지만 평범한 노동자들을 위해 단순하고 쉬운 복음을 전했다.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형태가 아닌 평범한 평민들에게 맞는 실질적인 형태의 실천신학, 실천적인 영성으로 신학을 했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복음의 대상자들에게 그들이 알아듣기 쉽고 그들이 변화 될 수 있는 그런 복음의 전달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죄의 개념, 새로운 시대의 성화, 새로운 시대에 전도 등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복음의 옷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우틀러는 영원한 복음의 진리를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언어로 변화시킬 능력을 소유했을 때에는 언제든지 부흥이 일어났다고 보았다.

  2) 새로운 시대정신 속에 복음
 
알버트 C. 아우틀러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복음적 회심의 경험이 야외 설교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의 회심의 경험, 내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한 야외 설교는 진정한 복음 선포자로 거듭났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이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고 이런 변화가 메마른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한 사람이 복음으로 변화 받고 그 진정한 복음을 가슴에 품고 선포될 때야 비로소 진정한 복음이 선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우틀러는 새로운 부흥의 각성 운동은 복음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현대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찾아 가야할 장소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를 잘 나타낼 수 있는 현대성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복음을 전할 복음성이 있어야 한다. 웨슬리는 그 시대의 사상, 시대정신을 알았고 그 시대성과 함께 복음으로 무장되었다. 그 시대에 가장 복음이 필요한 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변혁시켰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성의 시대, 경험주의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갖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소화해 냈다. 이 시대의 정신인 다원주의, 개인주의가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는다면 건강한 다원주의, 건강한 개인주의가 된다. 문제는 그런 사상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컴퓨터를 인정해 주고, 인터넷 안에서의 자유로운 공간도 인정해도 된다. 인터넷의 언어, 인터넷의 삶의 공간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낙관성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고통스러울 때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선행 은총, 은총의 낙관주의를 세상의 모든 가능한 공간으로 확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도 죄인을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3) 새로운 시대로 찾아가는 이웃 사랑
 
아우틀러는 새로운 시대에는 섬김의 형태와 방식이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과 그 사람을 만날 장소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나타내는 정보 통신 속에도 찾아가야 한다. 지구화에 맞추어 다국적 NGO 단체 등을 통해서도 세계에 있는 어려운 이웃에게 찾아가야 한다. 다원주의의 다양성 속에도 복음이 필요하다. 너무 획일화된 교리나 조직으로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필요한 하나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감성의 시대에 복음 전하는 매체도 새로운 시대에 맞는 매체여야 할 것이다. 찾아가야 그들의 참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을 학문적으로 정의하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같이 고민하면서 해결해 내야 한다. 
  
찾아가는 이웃 사랑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웨슬리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론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초대하는 것으로 구원을 이해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성과 웨슬리 당시의 개인주의 정신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웨슬리 신학의 특징은 모든 신분, 제도, 시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사랑이 평등하게 모두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하심이 폐쇄성을 깨뜨리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직접 이루어짐을 고백하게 하였다.

웨슬리는 당시의 고교회인 성공회의 교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설교의 자리인 교회를 떠나 거리에서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의 사회 성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에게 찾아갔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웨슬리의 사회성화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감옥, 알코올, 노동 개혁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대출기금을 만들었고, 노예무역과 인신매매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으며, 무료 진료소를 열고 의약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실직 문제를 풀기 위해 일했으며, 궁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개인적으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내놓았다.
 
런연(Theodore Runyon)은 웨슬리 신학을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서 보았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시고 구원 얻은 인간과 함께 창조 세계를 갱신하는 일에 협력하게 했다는 것이다. 창조와 새 창조의 시각에서 웨슬리 신학을 보았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완전에 대하여”(On Perfection)에서 에베소서 4장 21-24절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의도를 따라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고 보았다.  이웃을 생태계로 확대해야 한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고 그것은 곧 바로 같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피조물로서의 이웃인 우주의 신음으로도 찾아 나서야 한다. 청지기 의식은 사람과 사람 사회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김홍기 교수는 성화의 역사는 창조 전체가 모두 해당된다고 보았다. 내면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 나아가 우주적 차원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4) 새로운 시대를 이끌 경건 훈련
 
웨슬리가 감리교도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소그룹 공동체인 속회(class)와 반회(band)를 통해서였다. 웨슬리의 소그룹 운동은 소수의 사람들의 실제적인 변화의 삶이 목적이었다. 공동체적 사랑을 추구하였다. 웨슬리의 훈련 대상은 평신도였다. 그들은 설교자로도 세움 받을 정도로 당시의 교회 전통을 깨는 일이었다. 소그룹 운동을 통해 웨슬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켜 영국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려 하였다. 웨슬리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의 목회 속에서 보면 평범한 것이지만 웨슬리 당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웨슬리는 성령론을 강조한 동방교회의 마카리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는 성령의 변형적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우틀러는 이 시대의 새로운 각성은 “성령 중심적”(pneumatological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웨슬리 신학의 성령 중심성은 동방 영성에서 영향을 받은 신인협력론(synergism)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인협력론은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성이 강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또 하나가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응답과 책임이다. 하나님이신 성령의 역동적인 이끄심과 인간의 영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그룹 영성 훈련은 성령 중심의 강력한 영성이 뒷받침 해 주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다양성, 개체성이 매우 강조된다. 소그룹과 이미지가 맞는다. 다양성은 성령의 구체적인 역사가 각 사람에게 임해야 함을 알게 한다. 정보화 시대에 혼잡한 많은 이론들이 신앙을 방해할 것이다. 이럴 때에 가장 강력한 영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속삭임과 강력한 힘이다. 오직 진리의 영이 이 시대의 사람들을 이끄실 것이다. 이런 면에서 소그룹 훈련, 영적인 추구는 매우 효과적인 오늘의 영성 훈련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더 나아가 특별히 개체화 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공동체의 사랑, 공동체 교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5)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웨슬리 신학
 
웨슬리는 인간과 사회와 우주 전체가 타락으로 인해 신음하는 것으로부터 치유, 회복되어 새 창조로 성화되어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다.  이후정 교수는 기독교적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사랑, 기쁨과 평화, 의와 성결과 행복으로 정의하였다. 김홍기 교수도 ‘존 웨슬리의 성화론’에서 성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웨슬리에 있어서 성화와 완전은 행복(happiness)이다. 그래서 성화와 완전성화를 이루어가는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표시(sign)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성화와 완전성화의 사역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를 성화를 체험한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강조하며, 완전성화를 체험한 성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도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안에서 기뻐하고 그의 뜻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끊임없이 그를 기쁘게 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완전이다.  
 
요즘 한국에는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 많은 운동을 하고 있다. 몸에 좋다는 것은 시간을 투자한다. 연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 그리고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 신앙생활이 이렇게 신명나고 자발적으로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화, 완전성화에 대해 부담감을 느낀다. ‘어느 정도 신앙인’이 되고 싶지 ‘완전한 신앙인’이 되고 싶지는 않는 것 같다. 현대인의 웰빙 바람이 신앙생활에도 불어 와야 한다. 성화가 행복으로 다가갈 때, 신앙생활이 항상 기쁘고 감사가 넘칠 때 최고의 웰빙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올 것이다. 성화가 인간의 건강에 주는 유익을 연구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도우라고 하지 말고 남을 돕는 것이 자신을 최고로 행복하게 만드는 일임을 알 때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동참하게 된다. 물론 이런 행복은 곧 하나님의 행복과 일치해야 할 것이다.
 
  6) 새로운 시대의 웨슬리 신학과 사회성화
 
지금까지 18세기의 웨슬리 신학을 21세기의 새로운 시대 다시 바라보면서 새 시대에 맞는 웨슬리 신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로 보았다. 사회적 거룩이 없는 거룩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논의된 5가지는 모두 사회 성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기독교는 사회 성화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논의 과정에서 사회 성화가 내재 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5. 나가면서
 
지금까지 웨슬리 신학을 오늘 이 시대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신학이 신학 그 자체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18세기의 웨슬리 신학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 맞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그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웨슬리를 깊이 알면 알수록 웨슬리는 우리를 오늘의 삶의 현장으로 이끌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대해 알고 있고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해 접근해 나가는지 반성을 해 볼 때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웨슬리의 사회 성화를 생각해 본다면 매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새 시대를 말하기 전에 18세기의 웨슬리가 외쳤던 사회성화만이라도 실천했으면 한다. 어려운 이웃을 향해 가진 자가 손을 벌리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교회가 많이 침체되어 가고 있다. 웨슬리가 말한 섬김의 영성, 이웃 사랑의 영성이 사라진 것도 큰 이유 중에 하나다.    
좀 아쉬움이 있다면 실천신학, 민중신학, 산 신학을 계속 외쳤지만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접목시킨 신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 신학을 통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한 것이 작은 불씨가 되었으면 한다. 


출처: NCCK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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