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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7 08:40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
글쓴이 : 손규태

     1. 들어가는 말

 

필자가 요청받은 주제는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평화이다. 이 주제가 기대하는 것은 첫 번 째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강제로 분단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분단된 채 대결과 반목상태에 있는 한반도의 평화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이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지역 국가들과 가졌던 과거의 전쟁과 대결의 시대를 경험했던 역사적이고 정치적 유산들과 문제들을 청산하는 것일 것이다. 세 번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협력관계를 위한 틀을 어떻게 형성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국아시아의 평화의 내용과 질을 장공 김재준의 관점에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심화시키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1990년 소련과 동구라파의 붕괴이후 미국의 초극적 패권주의에 직면해서 대안모델로 새롭게 논의되고 등장하고 있는 지역 공동체들 모델들과 그것들이 지향하는 평화와 협력의 의의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에 와서 미국 발 경제위기는 미국의 패권이 강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미국에 맞서는 G2 국가로 성장했다. 미국은 여전히 군사적 면에서는 그 힘을 과시하고 있지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패권이후의 다극적 세계질서, 즉 지역주의 흐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다극적 세계질서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엔과 같은 세계기구는 그동안의 성과로 봐서 전 세계적 문제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데는 한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유엔은 동서냉전체제에서는 미소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냉전체제 이후 미국의 이해관계에 과도하게 의존함으로써 전체 회원 국가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했다.

이러한 지역주의 흐름에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첫째로 자본축적의 중심축이 되는 미국, 유럽연합, 아시아 국가들의 경쟁이다. 이제까지의 자본축적의 중심축이었던 미국은 경제위기에 직면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고, 여기에 대항할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은 서서히 아시아의 독자적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 유럽은 이미 유럽공동체를 경제통합단계에서 정치통합의 단계로 들어섬으로써 유럽지역의 확고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남미국가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친미우파정권들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부패에 실망한 국민들에 의해서 좌파지도자들이 집권함에 따라서 베네주엘라 대통령 차베스가 주도하는 남미국가연합, 남미은행, 남미안보협의회 등을 구성하고 미국에 도전하는 연대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역적 통합을 통하여 자신들의 몫을 찾고 세계무대에서의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동북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은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미국과 일본에만 의존해 왔는데 이들 나라들의 정치적 경제적 쇠퇴와 함께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인도 등의 부상으로 한국은 모든 면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과 일본에 의지해서 국가안보를 보장받고 다소나마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급부상과 함께 북한정권과의 밀착관계가 가져올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직면했다. 이러한 심각한 도전은 금년 11월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회의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동북아시아라는 개념을 지리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의 조건들

 

동북아시아란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의 북부지역으로 중국, 한국, 일본을 주축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몽고와 대만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는 이 지역은 한자문화권에 속하며 따라서 문화적으로 중국이 중심적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그동안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북아시아의 제반 사정은 급변했다. 서구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의해서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국가들은 강제적인 문호개방이나 식민지화의 수모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재빨리 서구화의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함으로써 아시아의 강자였던 중국(1896)과 러시아(1904)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한다.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1910) 동남아시아 제국들을 식민지화하고 나아가서 만주국과 중국의 일부를 장악했다. 일본은 역사의 후발주자였던 독일, 이태리와 더불어 역사의 선두주자였던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에 대항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한반도는 일본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나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승리자인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으로 인해서 식민지라는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이라는 동족간의 전쟁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휴전이 되었으나 지금도 한반도에서는 분단과 냉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분단으로 인해 남북한은 전후 60여 년 동안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립을 계속해왔고 그 결과 남북한 국민들은 모두가 비정상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휴전체제 하에서 남북한의 대립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분단체제의 사생아로 탄생했던 이승만 독재정권이후 박정희로부터 시작하는 군사독재가 30여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이들 독재정권들은 깨어 있는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서 극복되고 민주정권들이 들어섰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약 10년 동안 남한에서는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고 나아가서 북한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국민들이 남북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으로 이어지는 세습정부의 일당독재체제와 선군정치체제로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말살 당해왔고 근래에는 국민들의 인권은 물론 생존권마저 위협당하고 있다. 남한에는 친미 일변도의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경제에서는 친 재벌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서민대중들은 빈곤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남북한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어 대화에서 대결로, 평화에서 안보로 전환됨으로써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이명박정부는 미국과 일본에 의지하는 한반도의 안보정책을 추구함으로써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던 민족의 자주적평화정책을 완전히 무효화 해버렸다.

이러한 현재의 대결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의 내적 조건은 무엇일까? 그 다음으로 한반도 평화의 외적 조건들로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의 제반 정치적 조건들과 협력관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 것인가?

 

1) 한반도 평화의 내적 조건들

 

. 한반도 특히 남한 내에서 진보적 평화세력의 역량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해방 후 지금까지 남한은 수구적 안보세력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영역을 장악해 오고 있다. 이 안보세력은 과거의 친일세력과 현재의 친미세력들로서 국가의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두고 있다. 그들은 친미사대주의적 사고에 매몰되어서 민족문제를 민족공조를 통한 평화적 통일보다는 미일공조를 통해서 남한의 안보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 남한 내에서 진보적 평화세력은 안보세력인 한나라당을 제외한 야당들과 진보적인 시민단체, 진보적인 종교 세력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은 절대 다수의 노동자와 농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적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추구하며, 경제적으로는 자유 시장경제보다는 사회적 시장경제와 분배의 정의를 추구한다. 이들은 외교에서 미일공조보다는 민족공조를 추구하기 때문에 북한과의 화해와 민족의 자주적 통일과 평화를 추구한다.

. 따라서 남한 내의 진보적 평화세력의 역량이 그동안 크게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지반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반은 사회 각 분야 특히 야당과 시민단체 그리고 교육기관 등을 통해서 점차 강화되는 추세이다. 앞으로 이러한 추세는 미국과 일본의 패권의 급격한 약화와 중국과 인도 등의 급부상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의 세계정치에서의 역량강화로 더욱 급진전될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진보적 평화세력은 미국의 쇠퇴하는 패권주의에 맞서서 동북아시아의 지역 공동체들의 강화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남한의 평화세력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보세력이 추구하는 미국과 일본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동북아 지역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다변화된 외교와 경제협력을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이러한 평화세력들은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위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청소년 단체들, 시민단체들, 문화단체들, 종교단체들의 남북한 교류와 협력은 경직화된 남북한 관계를 완화하고 서로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된다. 각 지방 자치단체들과 경제단체들을 통한 경제적 교류와 협력은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절대 필수적 조건이 된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국회나 정부의 남북교류와 협력은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나갈 것이다.

 

 

2) 한반도 평화의 외적 조건들: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

 

. 세계는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의 패권주의 시대 이후의 세계, 즉 다극화 체제 혹은 지역적 공동체를 통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동북아시아국가들도 이제는 정치적 경제적 협력 체제를 만들어 공동의 안보와 번영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이러한 길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이미 사라졌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들의 새로운 패권주의를 극복하고 협력적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이다. 이 세 나라는 모두가 강대국들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패권주의는 내세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은 일찌감치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과 러시아와 국교를 맺고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와 함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의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 일본은 북한의 무조건적 굴종을 강요함으로써 관계를 개선하지 않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위협하고 있다. 이것이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의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은 전근대적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위협과 불 평화를 해소하고 상호협력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협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패권주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의 화해와 협력은 남북한의 통일과 평화의 기본적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미국과 북한의 화해 없이는 미국과의 공조를 통한 안보에 족쇄를 차고 있는 한국정부는 민족공조를 통하여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하여 한반도에서 평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한 정부는 쇠퇴해 가는 미국의 일극체제의 패권주의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다극화되어 가는 지역공동체라고 하는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국제무역에서도 미국위주에서 다변화를 추구하고 있고 중국은 제1의 무역파트너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화해와 통일은 이러한 변화되어가는 세계질서에서 삶의 계명이다.

.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 그리고 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의 건설은 상호 밀접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남북한의 통일 없이 아시아 지역공동체의 구성은 어렵고, 반대로 지역공동체의 구성의 열망은 남북한 통일의 촉진제가 된다. 왜냐하면 근래에 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형성의 씨앗들이 여러 방면에서 싹트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꿈: 동북아시아의 집

 

근래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꿈으로서 동북아시아의 집 구상을 본격적으로 제안하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의 동경대학교 정치학부 교수인 와다 하루끼(和田春樹)이다. 그는 원래 러시아 연구가였으나 박정희 시절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투신함으로써 동북아시아에 대한 연구로 전환한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구상하고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는 첫째로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초국가화가 발생시키는 문제들, 특히 북한과 이란 등에 가하는 엄청난 위협들과 여기에 대항하는 북한의 핵무기개발로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비이성적 공세와 여기에 대한 북한의 핵무기로 대항하는 것은 인접국인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도 평화와 안전보장에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의식 있는 일본의 학자들은 물론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동북아시아의 평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둘째로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ASEAN), 즉 동남아시아 공동체의 움직임이다. 200011월 말레시아에서 열린 제5ASEAN+3(중국, 한국, 일본)정상회담의 동아시아 비전그룹이 보고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하여 -평화, 번영, 진보의 지역이 제출된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동아시아 국민들은 지역 내 모든 국민의 전면적 발전에 기초한 평화와 번영, 진보의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n Community) 창조를 희구한다.” 이 보고서가 중요한 것은 아세안 국가가 아닌 중국, 일본, 한국 등의 지도자들도 여기에 참석했고 그 보고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회담에서는 다른 지역 공동체들처럼 동북아시아에도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적 협력을 통해서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공동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셋째, 한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2000615일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한 후 평양선언에서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한국과 일본, 남북한, 북한과 일본 - 3국간의 평화적 협력관계구축이 동북아시아의 지역협력의 중심적 핵이 된다.”는 것이 골자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공동으로 서명한 평양선언 제 4항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정일 위원장도 서명했기 때문에 이 동북아시아의 지역 협력제안은 남북한 정치지도자들의 공동의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쌍방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서로 협력해 나갈 것을 확신했다. 쌍방은 이 지역에 관련된 각 나라 사이의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협력관계 구축의 중요성을 확신하면서, 동시에 이 지역 관계국 간의 관계 정상화와 더불어 지역의 신뢰조성을 도모하기 위한 틀을 정비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에 합의했다.”

 

넷째, 2003225일에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평화공동체를 자기 임기동안의 최우선과제로 삼는다고 그의 취임연설에서 선언했다.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는 중국, 일본, 대륙과 해안을 이어주는 가교이다. 유럽연합처럼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북아시아에서도 구축되는 것이 내 희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개선에 선행해서 우선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추진함으로써 남북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무현대통령의 구상은 그 후 크게 발전되지 못하고 그의 임기가 끝남으로써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동북아 지역협력체에 대한 구상은 아직도 개별학자들의 연구에서나, 한국 내 연구모임들 그리고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공동세미나에서 주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연구나 학회들의 발표에서 주된 논의의 방향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우선 분단된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에 가장 큰 장애요소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으로서 동북아시아 지역협력체가 요구된다.

2)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에 있고 또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동북아 지역협력체를 구성하는 데는 통일된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3) 다수의 한국인(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이 동북아 국가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동북아시아의 인간적, 평화적 협력을 위해 활동할 가장 적합한 주체가 된다.(와다 하루끼)

4) 동북아시아 지역공동체는 공동의 안전보장, 공동의 번영, 공동의 복지를 지향하게 된다.

 

4. 한반도의 평화건설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명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궁극적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첫 설교에 가장 잘 요약되어 나타나 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마가 1:15).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러 이 세상에 왔다. 그러면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성서는 그 나라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지만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평화의 나라를 말한다.

구약성서의 평화란 말 shalom은 그리스어로 eirene라고 번역하는데 이 말은 장차 올 메시야와 관련된다.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들에 보면 장차 메시야가 와서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이룩할 나라를 평화의 왕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평화의 왕으로 규정하고(9:6) 그의 나라를 정사와 평화가 무궁한 나라로 묘사한다(9:7). 시편에 보면 이 메시아는 그의 백성에게 평화를 주며... 그 날에 의인이 흥황하며 평화가 풍성하다”(72:3,7)고 했다. 장차 올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평화의 나라를 세우고 그의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게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메시아)의 탄생기사에서 그의 오심의 목적은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 2:14).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가 1:79). 그는 흑암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고통당하고 억눌리는 사람들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가 지상에 건설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이다.

사도들의 전승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라고 했다. 베드로는 평화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다(10:36). 에베소서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했고 그 분은 모든 막힌 담을 헐고 사람들 사이에 원수 되게 하는 법조문들을 폐하여 평화를 이루게 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2:14).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어떻게 다른가? 즉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평화는 다른 사상이나 종교들이 말하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요한복음에 보면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자신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화란 어떤 것인가?

1. 첫째 것은 그리스적인 평화다. 그리스적 평화는 마음의 평정”(ataraxia)이다. 그리스어 ataraxia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이 없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평화는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방법은 다르지만) 학파들이 추구하던 평화이다. 물론 피타고라스학파도 이러한 마음의 평화를 추구했었다. 동양에서는 주로 道敎에서 仙人들이 추구하던 평화가 이와 비슷한 것으로 인간이 속세를 떠나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곧 평화이다. 그들은 복잡한 속세를 떠나서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식의 평화를 추구한다.(宋時烈靑丘永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에서는 무아해탈의 경제에 들어간 상태의 평화, 니르바나의 평화 즉 평화 그자체도 기대하지 않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2. 둘째는 로마의 평화다. 로마의 평화는 안보(securitas)란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평화라기보다는 안보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란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군사적 무력지배를 통해서 평화를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는 수많은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로마제국을 건설했다. 그래서 로마는 점령당한 국가들에서의 해방운동이나 봉기를 강력한 군사력으로 평정했다. 이 것이 곧 로마의 평화다. 따라서 로마의 평화를 공동묘지의 평화라고 말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을 남겼다.

따라서 예수가 말하는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 즉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그리스적 평화도 아니고 무력으로 억눌러서 침묵시키는 무덤의 평화 즉 로마의 평화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활동하면서 특히 로마의 평화에 대해서 반대했다. 왜냐하면 이 로마의 평화는 지배세력과 가진 자들이 추구하는 평화 즉 자기들의 패권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평화 아니 안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지배자와 억압당하고 억울해서 자기들의 권리들, 정의를 추구하는 자들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기득권만을 지키려하는 자기안보에만 관심을 갖는다.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평화는 빼앗긴 권리와 정의를 되찾는 것이 곧 평화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주의 백성과 그 경건한 성도에게 평화를 약속하실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춘다.”(시편 85:8-10). 신약성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로마의 평화 즉 억압적인 안보세력을 물리치고 억압당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평화세력을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다.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10:35). 즉 그리스도의 평화는 약자의 권리를 찾아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정의를 베푸는 희브리적 평화를 말한다.

 

그러면 이 로마적(혹은 미국적) 안보세력을 물리치고 희브리적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9). 예수는 평화란 만들어가는 것,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평화를 깨뜨리는 세력들과 싸워 이겨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와야 할 사람들로 규정한다. 평화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 평화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당시 안보의 세력들( 로마제국, 안보세력에 빌붙은 헤롯당, 사두개파, 제사장 등)과 투쟁하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오늘날 한국에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1. 첫 번째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그리스적 마음의 평화(ataraxia)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는 무관심하고 죽어서 천당가는 것만 꿈꾸며 종교행사에만 몰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들과 비유된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화하다 말하나 평화가 없도다.”(6:12-14). 이러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장공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증발한 그리스도인들”, “무사안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비판했다.

둘째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 대다수는 평화를 안보와 동일시하여 강대국, 특히 미국의 군사력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는 안보세력을 추종하고 그들의 하수인들로 전락했다. 예수 시대의 헤롯당과 사두개파들이 로마세력에 빌붙어 자기들의 보잘것없는 기득권, 즉 안보를 지키고 자기의 동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것처럼 강대국의 안보논리에 매달려서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의 평화를 외면하는 수구적 친미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독일의 보수파 루터교인들이 미국의 핵은 고무찬양하며, 소련의 핵은 정죄하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행동한다.(핵무장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논제 7.8항 참조) 핵무기는 어느 나라의 것이든지 생명을 파괴는 것이므로 모두 반 그리스도적이다.

 

5. 마치는 말

 

결론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혼을 상실하고 희랍적 평화, 마음의 안위나 추구하거나 아니면 강대국이나 거기에 의지하는 안보세력에 붙어서 안일만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혼이 증발된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에 직면해서 장공은 하나님 나라건설을 위한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의 평화운동을 위한 방안들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서 평화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함에 있어서 어떤 세상세력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강대국의 안보논리에 의존하거나 교회지상주의나 교회성장주의와 같은 맘몬의 힘에 의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는 장공은 이러한 그리스도인 혹은 인간들의 상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별했다. 첫째는 불의에 굴하지 안았던 사육신들처럼 獨也靑靑, 落落長松하고 당당한 그리스도인들과 자주하지 못한 채 주변의 힘센 나무에 휘감기며 사는 칡넝쿨과 같은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낙락장송과 같이 머리를 하늘높이 들고 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다른 나무들을 거느리는 소나무의 기상을 가진 주유인이 되어야지 칡넝쿨처럼 남에게 빌붙어 살려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장공은 지상에 하나님 나라 즉 평화를 건설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적과 싸우기 위해서 단단히 무장한 용사의 자세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세를 바울서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제시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입니다."(에베소서 6:14-16). 이렇게 무장한 그리스도인의 기개를 장공은 청년 남이장군의 시에 나타난 기상에 비유한다. 백두산에 칼을 가니 그 산이 달아서 먼지가 되고, 두만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니 강물이 말라 없어지더라(白頭山城磨刀塵이요 豆滿江水飮馬無).

장공 김재준박사 기념강연(20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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