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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21 10:09
루터신학에서 율법과 복음의 문제
글쓴이 : 손규태
1. 서론적 고찰
 종교개혁이 성숙단계로 접어들 무렵인 1530년대에 와서 종교개혁 운동 안에서도 각기 다른 신학적 사상적 흐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s)의 사상적 흐름이다. 이 사상적 흐름은 1535-40년 사이에 루터의 개혁 운동 일반과 특히 비텐베르그를 중심으로 심각한 대립현상으로 나타났었다. 이러한 반율법주의 논쟁은 이미 152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심에는 당시의 루터의 젊은 동료였던 요한 아그리콜라(Johann Agricola=1494-1566)가 서 있다. 루터의 고향인 아이스레벤 출신의 아그리콜라는 1515년에 비텐베르그 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동년배인 필립 멜랑히톤과 더불어 루터의 신실한 추종자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잠시 동안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비텐베르그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1525년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직을 얻으려했으나 실패하고 나서 매우 실망했다. 그는 결국 자기 고향 아이스레벤에 새로 생긴 라틴어 학교의 교장 자리를 얻어서 거기로 내려갔고 그 후에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namespace prefix = o />
멜랑히톤의 글교회의 목회사찰에 관한 글”(Articles of Visitation)이 첫 번째 논쟁의 계기를 제공했다. 이 글은 원래 1527년에 삭센의 선후제의 소속 교회들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서 베텐베르그로부터 파견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루터의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한 가르침이 몇몇 지역들에서 잘못 해석되어서 신학적 오류와 함께 도덕적 방종을 가져왔다는 확신에서 멜랑히톤은 그 글에서 복음뿐만 아니라 율법도 계속해서 설교해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를 고발하는 율법설교는 할 필요가 없고 오직 복음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멜랑히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단지 죄사함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고 회개에 대해서는 거의 혹은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죄를 고발하는 율법의 설교를 통한 진정한 회개와 참회가 참된 신앙을 위한 필수전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 즉 십계명의 설교는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선행을 위한 안내로서 기독교인에게도 유효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과 율법설교의 강조에 대해서 아그리콜라는 반대하고 나선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율법의 강조는 개신교 신앙의 기본 명제에 반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회개와 참회는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 단지 그 결과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통회하고 거기로부터 떠날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설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즉 복음의 설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지침서로서 제시되어야 할 것은 십계명이나 다른 율법의 요구들이 아니라 복음에 기초를 둔 사도적 권면들(Apostolic admonition)이라는 것이 아그리콜라의 생각이다. 
아그리콜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그의 의인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죄인-의인의 동시성”(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명제가 내포하고 있는 변증법적 긴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그리콜라, 루터, 멜랑히톤, 보겐하겐 사이의 협의회에서 만들어진 타협적 협정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신앙은 회개에 선행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은 단지 심판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 신앙을 말한다.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회개에 선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그리콜라의 주장의 핵심이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1537년 루터는 아그리콜라를 비텐베르그로 불러서 자기가 출타 중에 그곳에서 설교하는 일이나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을 맡긴다. 그렇지만 그해 여름 루터는 다시 율법을 주제로 한 아그리콜라의 설교와 당시 익명으로 출간되어 퍼져 있던 일련의 논제의 이단적 요소를 문제 삼았다. 거기에는 율법설교에 반대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루터와 멜랑히톤 두 사람의 글에 나타난 이 주제에 대한 오류들이 지적되어 있었다 
루터는 몹시 화가 나서 1537년에 행한 두 개의 설교에서반율법주의적 입장이 내포한 도덕적 태만과 신학적 오류와 위험을 지적한다. 두 신학자들은 그 직후 서로 타협하고 화해하려고 한 것 같으나 아그리콜라가 루터의 하락도 없이 교회력을 위한 복음서 본문들을 논제형식으로 요약해서 인쇄에 부친 것이 화근이 되어 논쟁은 다시 불붙는다. 긴 서론과 서문을 통해서 아그리콜라는 회개와 용서는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기초해서만 설교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논지를 발전시킨다. 신학부의 책임자의 권한으로 루터는 이 인쇄된 글을 압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익명의 논제들을 출판하고 아그리콜라와의 공적 논쟁을 열 것을 고집한다. 첫 번째 반 율법주의 논쟁 1537 12 18일에 열렸으나 아그리콜라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협상이 있은 후 아그리콜라는 다른 회합에서 자기 잘못을 공적으로 시인하고 루터의 견해를 따를 것을 선언하기로 한다. 그는 그것을 1538 1 12일에 열린 두 번째 논쟁에서 실천했다. 루터는 그리스도 안에서 달성될 수 있는 위대한 구원의 사건 전에 율법설교를 통한 죄인의 참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고히 했다. 율법은 복음에 의해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인간들에게 복음을 가져다주는 일에 봉사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도 그가 항상죄인이고 동시에 의인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율법의 책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동시성이 율법을 폐기할 수 없는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와 아그리콜라 사이에 공적 화해가 이루어졌으나 루터는 아그리콜라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원탁대담(Table Talk)에서 루터는 몇 차례 아그리콜라에 대한 가혹한 논평을 가한다. 루터는 그를 토마스 뮌쳐, 칼슈타트, 쯔빙글리, 그리고 다른 반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계열에 두었다. 1538 9 6일 세 번째 논쟁이 열리는데 아그리콜라는 다시 참석하지 않았다. 1538 12월에 아그리콜라는 다시 한번 화해를 위해서 루터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자기의 입장을 바꾸었다는 내용을 담은 합의서를 루터 자신이 작성해 주도록 까지 했다 
아그리콜라는 자신이 너무나 불공평하게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의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그리콜라를 지지하고 그를 인문학부의 학장으로 뽑으려고 했었다. 루터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논쟁이 계속되자 아그리콜라는 먼저 대학의 총장에게 문제해결을 호소했고 그 다음에는 1540 3 31일에 선후제에게 사건에 대한 공정한 조사를 요청했다. 이것에 대해서 루터는아이스레벤 사람에 반대하여”(Wider Eisleben)라고 하는 강력한 답을 쓰게 된다. 여기에서 아그리콜라는 신학적으로 미혹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율법주의는 퍼져나가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았다. 선후제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그가 비텐베르그를 떠나지 말도록 명령했다. 아그리콜라는 논쟁에 지쳐서 1540 8월 중순에 베를린으로 도망치고 거기에서 브란덴부르그의 선후제 요하킴 II세의 궁중설교자가 되었다. 결국 그는 루터에 대한 소송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취소하고 삭센의 선후제의 정치적 신학적 권위에 의해서 복권되었다. 
2. 루터 신학에 있어서 방법론의 문제로서 율법과 복음 
필자가 보기에는 1540년대 종교개혁이 성숙되고 개신교가 어느 정도 제도와 조직을 갖추어 갈 시기인 1535-45년대에 들어와서 루터의 사상은 좀더 정교하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고 하는 루터뿐만 아니라 이후의 루터교 안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루터나 루터 이후 루터교에서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 즉 이 둘의 상관관계의 문제는 루터와 루터교의 신학적 사상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구약성서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율법이다. 모세 오경은 말할 것도 없고 예언서나 성문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준거는 율법이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구약성서의 전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율법은 하나님의 총체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복음이다. 복음이란 그리스도 사건과 그의 율법의 새로운 해석에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운 행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로운 행실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17-20). 이렇게 예수는 사실상 구약성서의 율법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의 바른 이해 없이 복음의 핵심내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신구약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 특히 이들의相關關係”(Correlation)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성서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루터는 이미 1515년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창세기,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의 주석을 통해서 그리고 1520년대 상당히 긴 논문인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을 통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규정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카톨릭 교회가 지시하고 있는 선행들, 예를 들면 금식, 순례, 정해진 기도문 암송, 미사참석 등은 율법적 의인을 위한 행위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우월한 종교적 선행은 하나님이 받아들이고 열등한 세속적 선행들은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선행에 관한 카톨릭 교회의 왜곡된 이원론을 그는 문제삼았다. “모든 선행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고 가장 높고, 값진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는 대 전제 하에서 그는 당시 교회가 요구하던 종교적 선행들을공로를 위한 선행으로 규정함과 동시에종교적 선행세속적 선행사이의 이원론을 극복한다. 종교적 순례를 떠나는 것보다 믿음 가운데 집에 남아 가족을 돌보고 아내나 자식을 보살피는 것이 진정으로 참된 선행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라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믿음이 모든 진정한 선행들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루터는 이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자만이 참된 의미에서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 양자의 관계를 혼돈하거나 또는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내세우거나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교회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서 초대교회에서 구약을 부인했던 마르시온에게서 볼 수 있고, 또 루터 당시에는 과도한 율법에 의한 의인 혹은 공로를 내세운 카톨릭 교회에서 볼 수 있다. 그는 1535년 판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을 적절히 구별하는 법을 아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자신이 참 신학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기술(복음과 율법의 구별)을 아는 사람은 참된 신학자라 불릴 자격이 있다.” 따라서 루터 신학에서 율법과 복음의 이해야말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이 양자의 구별(distinction)이 곧 그의 신학의 방법론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골비쳐에 의하면 루터가 성서에서 복음을 새롭게 발견한 결정적 계기는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즉 그들 사이의 구별하는 방법을 터득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이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루터 신학의 몇 가지 주제와 관련해서 방법론적으로 고찰해보자.
 첫째, 루터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의인론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부터 살펴보자. 루터에 의하면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의인(義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만, 율법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정제함으로써 인간이 깊은 시련에 처해서 참회에 이를 때 복음을 만나게 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강력한 율법의 설교를 통한 참회 없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설교에 더 강조점을 두어 공로의인을 내세우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일방성과 복음만의 설교를 통해서 인간이 회개하고 구원에 나간다는 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 율법과 복음의 구별 즉 상관관계를 오해한 데서 기인하며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오류라는 것이다. 
둘째, 설교론에서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자. 앞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율법설교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두면 인간은 공로의인을 추구하게 되거나 아니면 율법성취의 불가능성에 직면해서 좌절하게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인도한다. 반면에 복음 설교에만 강조점을 두게 되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책과 참회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하는값싼 은혜”(billige Gnade)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복음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복음 설교의 문제점은반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서 잘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절제 없는 방종에 떨어지게 하며, 공짜근성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 사건 즉 은총의 사건을 싸구려로 만들게 된다 
이런 대표적 예들은 서구에서는 부루좌 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난자유주의 신학에서 볼 수 있고, 근래에 와서는 미국의 교회성장론자들의 설교 즉적극적 사고론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70년대 중반 한국에서는 순복음 교회를 중심으로 설교되기 시작한 이른바 3박자 축복론과 여기에 영합한 교회성장론자들의 설교들 특히 대교회주의자들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말끝마다 축복을 외치고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책의 문제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함으로써그릇된 안심”(falsche Sicherheit)에 떨어지게 만든다. 루터가 말한 대로 사람의 골수를 쪼개는 양날을 가진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피하고꿀같이 단 것만을 설교함으로써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총을 헐값으로 팔아치우는 상인으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루터의 교육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녀를 교육할 때 복음(사랑)만 제공하고 율법(회초리)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자식은 무절제하고 방종하게 되며 그 반대로 회초리만 사용하고 사랑을 주지 않으면 그 자녀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용기를 상실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완성할 수 없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복음은 엔진이오 율법은 브레이크다. 이 둘 중에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브레이크가 없으면 차는 설 수 없어서 사고가 나게 된다. 따라서 부모는 율법과 복음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식을 교육할 때 절도 있고 창의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셋째 루터의 정치윤리에서도 율법과 복음의 도식이 적용되고 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네 개의 기본적 질서들, 교회, 정치적 권위, 결혼, 경제생활을 허락했다. 그 중에서도 교회와 정치의 문제는 그의 정치윤리의 핵심적 내용이다. 루터는 이 두 개의 제도들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두 개의 정부들을 제정했는데 하나는 영적인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기독교인과 의로운 인간들을 통치하고 다른 하나는 세상적인 것인데 그것은 비 기독교인들과 사악한 자들을 통제하여 외적 평화를 유지한다. 
 우리는 시민법과 통치권을 위한 건실한 기초를 만들어서 누구도 그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질서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성서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서 13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벧전 2[:13-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혹은 세속적 영역은 루터에 의하면 율법의 영역에 속하고 교회적 혹은 거룩한 영역은 복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율법의 용법을 제1용법(primus usus legis)과 제2용법(secundus usus legis)으로 나누어 다루면서 제 1용법 즉 정치적 용법으로서 정치적 권위에 속하며 제2용법은 신학적 용법으로서 교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의 정치적 용법은 세상의 권력이 행사하는 법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악한 자들을 통제하여 외적 평화를 이루는데 사용된다. 그리고 율법의 신학적 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하게 하여 복음을 찾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이 두 정부 혹은 두 왕국의 관계와 과제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개의 정치적 권력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이 두 개는 지속적으로 남아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 하나는 의를 낳고 다른 하나는 외적 평화를 가져오고 악행들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다. 세상에서 어떤 하나도 다른 하나 없이는 불충분하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영적 정부 없이 세상의 정부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영향권을 확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수의 사람들 한가운데 소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세상의 정부와 법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비록 계명들이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 해도 위선이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성령이 없다면 하는 일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누구도 진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 다른 한편 영적 정부만이 온 나라와 사람들을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악성이 마음대로 지배하며 모든 종류의 악한 행실이 난무하게 된다. 왜냐하면 전체로서의 세계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루터는 그의 정치윤리에서 교회와 국가 즉 두 왕국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서도 율법과 복음이라는 도식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7율법과 복음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상론하지 않는다
 3. 율법의 폐지의 문제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율법의 폐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5:17이하). 그러나 다른 한편 바울은 로마서 10 4절에서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에 끝마침이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복음 혹은 그리스도 이후의 율법의 신분과 역할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자인가 아니면 폐기자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말이다. 이 주제는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루터교와 다른 교파들 사이의 신학적 동질성과 차이를 말하는 데서도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루터는 1535년 갈라디아서 4 21-5:1절을 해설하면서복음과 율법그리고 율법의 폐기의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여종인 하갈에서 난 자녀들과 본처인 사라에게서 난 자녀들을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로 구분하고 전자를 율법 하에 있는 존재로 후자를 은혜 안에 있는 존재로 나눈다. 그리고 나서이 율법과 은혜는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이 구절은 율법의 폐기와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해서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매우 고귀하고 가장 중요한 교리를 알려주는 것과 같이 정반대로 율법의 폐기에 관한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함으로써 복음이 오면 율법은 폐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들 특히 토마스는 그리스도가 온 다음에 시민법과 의식법(ceremonial law)은 폐기되었으나 도덕법은 폐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루터는 전체 율법, 市民法, 儀式法, 道德法 구별 없이 전체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법은 그리스도가 은총을 통해서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양심을 저주하거나 위협할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권리를 용도폐기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에게서는 전체 율법이 폐기되었다.” 
한편 루터는 율법의 전적 폐기를 말하면서도율법의 적절한 기능혹은율법의 적절한 사용에 관해서 말함으로써 율법의 폐기 주장과는 모순되는 진술들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적절한 기능은 우리에게 죄책을 알려주고, 겸손하게 하며,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며, 우리로부터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지만 또한 이와 같은 목적들과 함께 우리를 의롭게 하고, 높이고 살리고 하늘에 올라가게 하고 모든 것을 수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단순히 죽이지 않고 생명을 위해서 죽인다.” 이러한 언급은 루터에 의하면율법의 제2용법에 관한 것으로서 복음과의 상관관계에서 필요한 율법을 말한다. 따라서 루터는 율법에 관한 한폐기를 말하면서 동시에성취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여기서는 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란 주제에 대해서 몇 사람의 루터파 신학자들의 해석을 살펴보자
(Seeberg)는 그의 루터 연구에서 삶의 형식으로서 율법과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구분하고 전자는 복음을 통해서 폐기되었지만 후자는 복음 후에도 존속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총체적 의지인 율법과 복음이 내용적인 면 즉 그것들 자체로서는 서로 대립하지 않으나 인간과 만나는 방식에서 철저하게 대립함으로써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인간에게 죄를 알려주어 회개하게 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죄인에게 복음이 사죄를 선언함으로써 그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하나님의 뜻인 율법과 복음이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상호 대립하는 관계에서(Gegeneinander) 활동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에 의하면 루터가 율법의 존속이나 폐기에 대한 일련의 상반되는 논제들을 말할 때 여기에서 그것들을 말하게 되는 하나의 명백한 규범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義認 관한 한 율법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으로서 죄와 투쟁하야야 하는 한에서는 율법은 세상 끝까지 항상 존재한다. 그는 또사죄는 율법을 폐기한다. 그러나 율법은 존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율법의 폐기나 혹은 성취를 말할 때 율법 자체의 변화나 무효화를 말하지 않고 복음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것들을 말한다. 즉 인간이 율법을 통해서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그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을 찾게 하는 기능에서 율법은 존속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율법은 더 이상 그 효력을 미치지 못하며 이 때 율법은 폐기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을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으로서 파악함으로써 인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안에서도 항상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죄인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은 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 즉 그리스도 이후에는 할례가 폐기된 것처럼 율법도 폐기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루터는 율법은 어떤 시간적인 것(etwas Zeitliches)이 아니고 항상 존속하면서 인간의 실존의 상태에 따라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 있은 한에서는 율법은 폐기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은 약한 존재로서 다시 죄를 지을 때는 율법은 다시 정죄하는 자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4. 율법의 용법의 문제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셨다. 그 첫 번째 용법을 제1용법(primus usus legis) 혹은 정치적, 시민적 용법(usus politicus, usus civilis)라고 한다. 루터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두 가지 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범법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시민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모든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첫째 되는 이해와 사용은 사악한 자를 억제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온 세상을 다스리며 사람들을 온갖 부끄러운 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통치자, 부모, 교사, 쇠고랑 등 모든 시민질서들을 제정했다.”  
(1)율법의 제1용법은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모든 행위를 억제하기 위해서 창조와 더불어 주어졌는데 이것을 책임지고 감당하는 곳은 바로 정치적 권위(Obrighkeit)이다. 루터는 이러한 정치적 권위를 국가경영(political economy), 가정 경영(domestic economy), 그리고 영적 권위로 구별했다. 따라서 국가경영을 책임지는 정치적 권위가 바로 율법의 제1용법의 담당자로서 국가의 제반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진다. 덴마크의 루터파 신학자 프렌트(Prenter)는 외적 질서와 도덕생활은 율법의 제1용법에서 주장하는 시민적 의와 관련되며 이것은 인간들 앞에서(coram hominibus)에서 그 정당성을 갖는다. 여기에 비해서 영적 권위에 속하는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만(coram Deo) 그 정당성을 갖는다. 
반면에 율법의 제2용법(secundus usus legis)은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으로서 인간의 실존을 밝힘으로써 복음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의 다른 용법은 신학적 용법 혹은 영적 용법으로서 범죄를 증가시키는데 봉사한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의 일차적 목적이다. 그것을 통해서 양심에서 죄가 증가하고 많아진다... 따라서 율법의 참된 기능과 중요하고 적절한 용법은 인간에게 그의 죄, 맹목성, 비참함, 사악함, 무지,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기만, 죽음, 지옥, 심판 및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가장 적합함을 보여준다.” 루터에 의하면 이 율법의 제2용법이야말로 율법의 본래적이고 참된 기능인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이 율법이 인간에 대한 진노의 수단이 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진노, 심판, 지옥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통해서 의에 이르려고 하는 율법적 의는 잘못된 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이렇게 인간의 양심의 공포를 일으키게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 목적은 아니고 오히려 복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 본래의 목적이다. 따라서 율법은 복음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낮선 행동(strange work)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됨의 깊이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내적 반역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의와 자기신뢰를 깨뜨리는 하나님의 햄머이며 은혜로의 길을 예비하는 봉사자며 교사인 것이다. 율법의 제1용법인 정치적 용법이 정치적 권위 혹은 국가에 주어진 것이라면, 율법의 제2용법인 신학적 용법은 교회에 주어져 있다. 따라서 율법의 제2용법을 수행하는 것이 교회의 직무이다. 율법의 제2용법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선포된다. 율법의 제1용법을 국가가 담당하지 하듯이(물론 중세 카톨릭 교회는 그렇게 했지만) 또한 율법의 제2용법은 오직 교회에 의해서만 감당되어야 한다. 이것이 잘못되어 중세기처럼 율법의 제1용법을 교회가 장악하거나 아니면 독재 군주들의 시대처럼 율법의 신학적 용법을 국가가 차지한다면 커다란 문제들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루터의 두 王國論 성서적 신학적 근가가 도출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율법의 제1용법을 정치적 권위에게 제정해 줌으로써 행악자들을 억제하고 그들을 벌하여 세상의 질서를 지켜나가며, 동시에 율법의 제2용법을 교회에 제정해 줌으로써 교회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얻게 한다. 따라서 정치적 권위와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되었고 하나님을 봉사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세상의 권력으로 다른 하나는 영적 권력으로 이 일들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해 가고 있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정치적 권위의 기원과 목표 모두가 하나님에게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제 5장 정치윤리에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손규태(성공회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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