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64)




제10장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 

18세기 중엽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영국 교회의 각성과 부흥을 위해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가 속한 영국성공회는 영적으로 퇴락해 있었고 목사들도 무기력하게 목회하여 신도들의 신망을 잃고 잃었다. 목사를 신사(gentleman)로 통칭하였고 신도들이 목사를 만나 인사 삼아 “신사님, 우리 같이 지옥에 갑시다”라고 하면 목사의 농담 섞인 대답은 “먼저 가시오, 뒤따르겠소”(After you)였다. 지난 세기에 청교도들의 거센 도전으로 영국성공회가 반세기 동안 넘어지기도 하였으나 다시 회복한 지 한 반세기가 되어 이제 국교로서 성공회의 위치는 안전하게 되었고 국회가 정한 신앙고백과 예배의식에 따라 통일된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들의 목회와 교회 운영에 영적 긴장이 없어져 갔다. 그 교회는 가톨릭적이지도 않고 또 아주 프로테스탄트적이지도 않은 중간 상태의 특색 없는 교회가 되었다. 이때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으며, 국내적으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나라의 경제가 성장해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로자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고 여러 식민지에서 식민정책으로 생긴 도덕적 비행과 노예상과 같은 악덕이 자행되고 있었고 정치는 부패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이 빈곤하고 비참하였고 무지와 과음과 범죄가 심하였고 반면에 법은 엄해서 작은 범죄도 엄벌하였고 자녀의 생산보다 사망률이 높았고 교회 생활은 태만하였고 공중예배는 형식적이고 설교는 대체로 도덕적인 수준에 그쳤다.

소수의 신실한 신학교수들이 모여 교회 문제를 토론하는 단체들이 있었다. 한 성공회 신학교 교수들의 단체는 교회가 국가정치를 토론하지 말 것과, 기도서에 있는 기도 외의 기도는 하지 말 것과, 필요 없이 선술집에 출입하지 말 것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도덕적 개혁보다 종교적 관심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영국의 청교도들 중에 경건과 영적 각성을 희구하여 책을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 사람들이 있었다. 청교도 공화국 시대의 젊은 군목이었던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국교로 제도화된 교회의 형식적인 신앙을 싫어하고 내적이고 자발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쓴 책 「성도의 영원한 안식」(The Saints' Everlasting Rest)은 많은 사람이 애독하였다. 또 윌리엄 로우(William Law, 1686~1761)가 쓴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로의 소명」(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 「기도의 영」(The Spirit of Prayer), 「그리스도인의 완전」(The Christian Perfection)은 모두 영적 각성을 일깨우는 좋은 책들이어서 존 웨슬리도 이러한 책의 감화를 받았다. 또 웨슬리가 대학에서 공부할 무렵에 독일의 슈페너의 경건운동이 영국에 들어와 있었고, 특히 슈페너의 영향을 받은 모라비아 교회의 형제단의 선교사들이 영국에도 와서 부흥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교회를 영적으로 또 복음적으로 진동시킨 사람은 존 웨슬리였다. 그는 성공회 목사의 아들이었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에 부지런하고 능력 있는 학생이었고, 광범위하게 독서하였다. 고전어와 함께 현대어도 몇 가지 배워서 알고 있었고, 희랍어 신약성서를 많이 읽었고, 특별히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을 애독했다. 172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의 ‘그리스도교회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링컨대학(Lincoln College)의 조교가 되었다. 그는 재학 시절에도 수, 목, 금요일에는 금식하였고 형무소를 방문하여 설교하였다. 그는 설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마음의 할례’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도 있었다.

그의 동생 찰스(Charles)도 같은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729년에 존이 부친의 교구에 보조목사로 있다가 옥스퍼드대학으로 돌아와서 동생 찰스가 3~4명의 학생을 모아서 조직한 「홀리클럽」(Holy Club)이라는 단체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의 회원 수가 점점 늘어나서 25명 정도 되었고, 1733년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한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도 1735년 그의 나이 20세 때 가입하였다. 화이트필드는 웨슬리에게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목사 존 스코갈(Henry Scougal)이 쓴 「사람 마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을 소개하여 웨슬리가 애독하였다. 그 밖에도 이때 이 클럽의 동지들이 읽을만한 스코틀랜드 목사들의 책들이 있었다.

웨슬리 형제는 1735년에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조지아 주에 선교하러 떠났다. 대서양 항해 도중에 강풍이 불어와서 배가 심하게 흔들려서 사람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존이 갑판에 나와서 풍랑과 폭풍을 보면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한 사람은 조금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태연히 있었다. 대화를 통해 존은 그 사람이 보헤미아의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의 교인인 것을 알았다. 존은 생명의 위험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를 보며 자기의 연약한 믿음을 반성했고 큰 감화를 받았다. 이 경험이 금후에 그의 목회생활에 큰 전기를 줄 것이었다. 존은 아메리카에 도착한 후 그곳에 있던 모라비아 교회 목사 스판겐베르그(Spangenberg)를 찾아가서 대화했는데, 그가 존에게 묻기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고 하여 존이 “예, 그는 구세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존에게 “내적 확신이 없다”고 일러주었다.

찰스는 병이 나서 곧 영국으로 돌아왔고 존은 남아서 소수의 독실한 신자들을 모아서 교회를 시작하여 목회하였다. 그는 영국의 「SPGFP」(외지복음전파단체)의 파송을 받아 갔었다. 그가 그곳에 갔을 때 선교기간을 몇 년으로 정하고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자기 교회의 한 여인과의 연애가 실패한 후 173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라비아 교인들과 접촉하면서 즉각적(卽刻的)인 회심과 확신이 넘치는 구원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배웠다.

1738년 5월 21일 웨슬리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열린 성공회 교인들의 어떤 비공식적인 집회에 참석하여 마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같이 읽던 중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루터가 회심 전에 고민했던 문제가 자기의 문제임을 알고 그 고민이 해결되는 마음의 뜨거움을 경험했다. 이것이 자신의 회심의 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모라비아 교회의 친젠돌프를 찾아가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왔다.

웨슬리는 홀리클럽 회원들이 실천할 경건훈련의 내용을 만들었다. 그 훈련의 주요 목적은 회원들의 영적 생활을 개선하고 이웃에 선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그 방법은 주일에 만나서 고전서적과 성서를 읽으며, 교회가 정한 생활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명상을 통하여 자기를 성찰하며,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기도하며, 매주 한 번씩 성만찬을 가지며, 형무소와 병자와 가난한 자를 방문하며,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모든 행동을 엄격한 규율로써 수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을 “Methodist”라고 불렀는데, 방법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후일에 웨슬리가 세운 교회의 이름이 되었다.

웨슬리는 설교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처음에는 종교단체와 교회에서만 설교하면서 영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반대가 많아서 한 번 설교한 곳에는 다시 못 가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성화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강조했다.

조지 화이트필드가 1739년부터 교회가 아닌 옥외의 한 장소에서 광부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광부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을 보고서 웨슬리에게 같은 방법으로 설교하고 다니도록 권고했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브리스톨(Bristol) 지방에 가서 노천광장에서 광부들과 일반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지금까지 성공회 목사로서 가졌던 고답적인 선입주견이 절로 물러가게 되었다. 당시 영국성공회는 목사가 교회당 밖의 장소에서는 설교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제 웨슬리는 기회와 필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설교하는 설교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누구의 교구에서든지 노천에서 설교하였으므로 반대와 배척이 심하였다. 그는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말하고 영국 전역을 다니며 설교하였다.

웨슬리의 복음적 설교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영국 청교도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성서주의적 경건과, 다음으로 친젠돌프의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로부터 배운 열정과 구원의 확신과 회심의 경험, 마지막으로 영국성공회의 신학인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만인구원사상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신앙이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으로 회심을 위해 노력할 것과 힘써 선행과 경건을 실천하여 성화하고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협력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신학을 ‘협동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웨슬리는 매년 5천 마일을 전도여행 다니며 일주일에 15번 정도 설교하였고, 흰 말을 타고 여행했다. 그가 설교할 때 광부들의 눈물이 얼굴에 흘러내렸고 즉각적으로 회개한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산업현장은 주로 광산과 공장이었는데 성공회나 다른 교파 교회들은 이러한 산업현장에 와서 근로자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설교하는 일이 없었다. 교회들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기를 바랐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을 돌보았다. 주일날 교회에 나갈 수 없었던 근로자들이 웨슬리에게 감사해 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그는 가는 곳에서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 힘으로 거듭날 것을 설교했다. 그는 가난한 근로자들에게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가르쳤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할 것과, 일해서 번 돈을 허비하지 말고 되도록 많이 저축할 것과, 남을 돕는 일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빈약한 임금을 받아가지고 술 마시고 노름하여 돈을 허비하는 버릇이 있어서 가족들이 언제나 가난하게 살았다. 웨슬리의 이 같은 설교를 듣고 실천한 사람들은 조만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웨슬리는 산업전도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위하여 정부와 기업가들과 고용주들에게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근로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제한하고 근로환경을 개선하여 근로자들의 건강을 보전할 수 있게 하라고 말하였다. 또한 근로자 후생과 복지에 힘쓰고 연소자 고용을 중단할 것을 말했다. 고용주들이 임금을 적게 지불하기 위해 연소자를 채용하고 성인 고용을 기피하는 비리가 많았다. 그리고 웨슬리는 노예매매업자들을 공격하여 노예상업을 폐지하라고 외쳤다. 그의 이 같은 설교와 운동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회구원을 위한 사회적 복음운동이다.

영국성공회는 웨슬리의 설교운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별수 없었고 오히려 웨슬리가 성령을 강조하고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성공회와 같은 국교제도와 로마가톨릭교회처럼 강력한 제도와 법의 힘으로 지탱하고 있던 교회는 성령 강조를 싫어하였는데, 그 까닭은 성령은 언제나 새로운 영감을 주어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나뉘어 다른 교파를 만들 생각이 없었으나 영국교회는 웨슬리의 운동을 수용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져 갔고, 이에 따라 웨슬리 혼자서 그들을 지도하거나 혼자서만 설교하고 다닐 수 없어서 그를 보조할 전도사들이 생기게 됐다. 그리고 그 전도사들도 정식 목사의 기능을 해야 할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을 목사로 안수할 수밖에 없는 단계가 되었다. 이때 웨슬리는 아메리카에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785년에 신도회합을 열고 이것을 ‘컨퍼런스’(Conference)라고 부르고 장로 100명을 안수하여 세우고 그들이 성례전도 집행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결국 웨슬리운동이 영국성공회로부터 갈라지는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감리교회의 총회를 ‘Conference’(연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식으로 갈라진 때는 1795년이다.

웨슬리의 교회를 감리교(Methodist Church)라고 부르게 되었고 영국에서 북아메리카로 선교활동이 확장되어 북아메리카에서 감리교회가 더 큰 교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운동이 성령을 강조하고 중생의 즉각적인 경험과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열광적인 운동이 되었다. 그를 따른 전도자들의 부흥집회에서 신기한 현상들이 생겼다. 성령을 받고 갑자기 몸을 떨거나 넘어져 말문이 막히는가 하면, 비명을 지르기도 하였고, 공중 높이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웨슬리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웨슬리가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그 교회와의 유대가 끊어졌는데 그 교회에는 성만찬 예식이 없는 것이 주원인이었고 그 밖의 신학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조지 화이트필드의 영향과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그와 한동안 동역자였다가 나중에 나뉘어진 까닭은, 웨슬리가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을 견지한 것과는 달리 화이트필드는 온건한 칼뱅주의 신학을 견지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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