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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길에서][3] 화려한 어머니의 옛날이야기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한눈에 봐도 이상야릇한 분위기다. 화려하지만 아주 촌스러운 리본이 달린 큰 챙모자로 가려진 얼굴은 새빨간 립스틱과 떡분칠로 변장을 했어도 족히 70 가까이 돼 보였다. 블라우스와 치마는 울긋불긋하다. 게다가 빨간 양말에 비닐 뾰족구두다. 큰 가방을 벤치에 턱 하고 던지시면서 내가 앉은 벤치 끝에 앉으신 할머니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우스꽝스럽고 농촌 마을 정류장 분위기와 전혀 조화롭지 못한 튀는 모습이었다. 물론 울긋불긋 등산복과 빨강배낭을 멘 내 모습도 그 분위기와 조화롭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정류장 벤치 양쪽 맨 끝에 앉아 있는 분위기 비슷한, 그러나 주변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른 잠깐의 침묵을 깬 사람은 그 할머니였다. 일어나서 특이한 할머니의 모습을 힐끗힐끗 보다가 갈 길을 떠나려고 주섬주섬 배낭을 추스르는 내게 그 분이 하신 첫 마디는 “사장님, 이거 한잔 하시쇼잉”이었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화려한 블라우스 사이로 삐져나온 새까맣고 주름진 손에 들려진 것은 내가 초등학교 때 교실의 물 컵으로나 사용했음직한 초록색 플라스틱 컵이었다. 컵 안엔 누런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 분의 다른 손에선 500미리 생수병 속에 역시 그 누런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컴퓨터처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하나.....“아, 전 괜찮습니다. 지금 막 물 한 병 다 먹었습니다”라고 아주 매력 없고 무색무취하게 거절을 했건만 몸에 좋은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먹으라는데 더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죽기야 하겠냐는 심정으로 그 누런 물을 받아 들었다. 다행히 아주 조금만 주셨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한입에 털어 넣자마자 사래가 들어 기침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 분은 다시 그 큰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서 싸구려 냅킨에 싸인 그 무엇인가를 내게 내민다. 그 안에선 오래된 땅콩, 색깔이 있는 제수용 과자, 그리고 오징어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할 수 없이 제일 만만해 보이는 오징어채를 하나 집어서 씹었더니 오래된 오징어의 고린 맛이 또 비위를 뒤튼다. “아차 실수했다. 차라리 색소 입힌 과자를 집을걸!”하는 순간적인 후회가 스친다. 간신히 표정관리를 하며 고린 오징어를 꿀꺽 삼키고나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산삼, 산삼 술이여, 몸에 엄캉 존거지라”

나는 체질적으로 삼을 먹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홍삼을 먹었다가 온몸에 열꽃이 돋아서 한동안 무척 고생한 경험도 갖고 있다. 그런데 홍삼도 아니고 산삼에 게다가 알코올과 합체(?)된 산삼이라? 그 말을 듣는 중에 이미 내 얼굴과 몸은 붉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난 속으로 가짜산삼이려니 생각했다.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잠시 벤치에 앉자 이 할머니가 말을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약주를 조금 하신 듯하다. 나에게 어디서 왔고 뭐하는 사람이며 고향이 어디며 등등 아무런 주저함 없이 속속들이 물으시더니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본인의 스토리를 풀어내시기 시작한다. 나는 아차 싶었다. 잘못 걸렸다 싶었다. 어떻게 이 말 줄을 끊고 도망을 가나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분의 이야기를 조금 듣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를 꽤 흉내 낼 줄 안다고 자부하고 살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진짜(?) 전라도 사투리는 알아듣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골 부잣집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야기, 일찍 부모를 여의고 소방관인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야기, 착하지만 술에 절어 살다 50도 되기 전에 쓰려진 남편, 병상에 누운 남편을 10년 넘게 병구완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추억,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슨상님이 다니신 목포상고를 보내려고 했더니 아무도 몰래 시험을 쳐서 광주일고에 진학한 후 육사를 나와 중령이 된 나와 동갑나기 큰아들 자랑, 자녀들 등록금이 없어 무작정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애걸했던 이야기, 경제력 없는 남편 때문에 혼자서 작은 땅뙈기를 경작하며 했던 수많은 고생담들을 대하소설처럼 줄줄 풀어내시던 어머니가 몸 구석구석이 아파 가방에 산삼술을 넣고 다니며 조금씩 먹지 않으면 하루를 버틸 수 없다고 하시는 대목에서는 나도 눈물이 날 뻔 했다. “이 산삼이 강원도 양구서 대장 노릇하는 큰 아들이 캐서 보내준 거랑께요” 결국 나는 가짜가 아닌 양구의 깊은 천연림 속에서 자란 진짜 산삼을 먹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동안 그분이 타셔야 하는 버스가 몇 대 지나갔다. 나도 급한 것 까맣게 잊고 마치 흑백영화 같은 그 분의 이야기를 그렇게 앉아서 다 들었다. 말씀을 거의 마치자 그 어머니는 내게 그만 가보시라고 인사를 건네신다. 그러면서 내게 한마디 하시는데 나는 너무 짠해서 차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사실, 오늘이 내 생일이랑께요. 혼자 살맹기로 누가 생일을 챙겨줄꺼여, 그래 그냥 이렇쿠렁 채려입고 휘커니 아무데나 나와 뿐졌써~ 에고, 사장님, 싸게 가쇼잉~”

나는 그때부터 그분과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다시 구멍가게에 들어가 요구르트와 과자를 사서 나누어 먹어가며 말이다. 그리고 버스에 그분을 태워드리고 창밖으로 손을 흔드시는 모습을 확인한 후 아무도 없는 정류장을 떠났다.

827번 지방도로로 들어서서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방금 만났던 그 어머니 생각에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신다면 과연 그분의 인생에는 몇 점을 주실까? 그리고 그분의 점수와 내 점수는 누가 더 높을까? 비록 신자는 아니셨지만 내가 들은 그분의 인생은 노력, 성실, 용기, 희망으로 가득하다.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삶 전체를 다 바쳐 남편을 돌보았고 세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니, 내 점수가 훨씬 더 낮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나는 감점요인도 많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그 어머니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셨으면 하는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절로 나왔다.

두륜산을 감싸 도는 827번 지방도로는 뜸하게 지나가는 차라도 없으면 너무 적막하여 두려움마저 이는 호젓한 산간도로다. 산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드디어 그 가벼운 배낭의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가 먼저 아프기 시작하여 배낭끈을 좀 풀다 보면 다시 오른쪽으로 통증이 옮겨간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까지는 참을만했다. 다 식었던 몸이 다시 땀으로 젖는다. 도로 표지판을 보니 도로의 정상에 약수터가 있는 모양이다. 희망이 있다 싶어 속도를 내본다. 아무리 덥고 땀이 나도 곧 얼음장 같은 약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절로 나는 듯 했다.

애초에 여행을 시작할 당시 나는 걷는 기도를 하고자 했다. 호흡과 기도를 맞추어가며 내 영혼이 흡족하도록 기도와 묵상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산고택과 대흥사를 다녀오는 동안 나는 첫 발걸음의 서먹함과 주변 경관에 취해 아직 기도를 시작하지 못했다. 다행이 오르막 도로를 걸으며 나는 기도에 살살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도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차가 끼익하고 급하게 서더니 나를 부른다. “워디로 가신다요?” 이렇게 또 한 사람의 예수님을 만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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