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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길에서][5][시골다방의 추억]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계획을 변경하든 뭘 하든 주변에 사람이 있고 인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갑자기 조상님들의 길을 바꾸어 버린 인간들이 미워졌다. 지금 걷고 있는 55번 국도는 조선시대에 살던  조상님들이 걷던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도로 바뀌었고 차만 쌩쌩 다닐 뿐 그 어느 누구도 걸어서 여행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이 길을 걷는 이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물론 119로 전화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오래 전 조상들은 이 길을 걸어서 여행했어야만 했었고 그때는 지금보다 길 주변에 나그네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장치들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백화리에서 허무하게 앉아서 쉬다가 대월을 거쳐 신전에 가까스로 도착하였다. 북일에서 걸어온 거리만 보면 해남읍에서 지금까지 걸은 것에 비해 별 것 아닌데도 무척 힘든 여정이었다.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더 이상의 도보여행을 포기하였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왕복 2차선 도로의 야간보행은 정말 걷는 이들에겐 위험천만이었다. 여하간 신전에 도착하여 바로 강진으로 나가는 버스편을 알아보기 위해 신전 버스정류장 앞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의 문이 오래된 나무 여닫이로 된 빈티지 만물상회였다.

가게엔 갖가지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니, 널부러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거의 생산중단 된 과자류들이 햇빛에 바랜 포장지 안에서 널 부러져 있었고, 누렇게 바랜 공책들, 아직도 저런 제품이 있나 싶은 세제류들, 거기에 고등어자반까지 정말 없는 것이 없는 상점이었다. 들어가니 의외로 아주 젊고 세련된 도시여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강진 가는 버스표를 달라고 하자 그녀는 매우 메마른 표준어로 “방금 출발했는데요”라고 대답한다. 당연히 나는 다음 버스의 시각을 물었고 그녀는 막차가 7시 20분에 있다고 하면서 차표를 내게 내밀었다. 막차시간까지 45분이나 남아 있었다. 차표를 끊고 가게를 나온 나는 45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며 두리번거리던 중 주작다방이란 간판을 발견하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 시골에 다방이라, 게다가 주작산 아래 주작다방이라. 그래 한번 가서 시골 커피 한 잔 마셔보자는 심정으로 다방문을 열었다.

알루미늄 문을 밀고 들어가자 다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중늙은이 하나가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두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내일 보자며 곧 자리를 떳다. 다방의 주인인 듯한 여자는 족히 50대 후반은 되어 보였는데 그 짙은 화장이 우스꽝스럽다가 천박해보이다가 나중엔 서글퍼 보였다. 그 아주머니가 ‘애기’라고 부르는 여자 역시 40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복부비만이 심각해 보였다. 내가 들어서고 노닥거리던 중늙은이가 나가자 이 두 여자들은 에어컨을 틀어줬다. 게다가 내 앞에 스탠스 선풍기를 돌려줬다. 아마도 내가 너무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게다.

차림표를 보고 기가 막혀서 몰래 피식 웃었다. ‘커피 1500원’. 물론 원두커피도 아메리카노도 아닌 다방커피다. 그래도 그렇지 천 오백원이라니? 커피잔 설거지 비용이나 물 데우는 비용도 안 될 듯싶다. 사실 나는 다방커피나 커피믹스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날은 강행군 덕에 달고 진한 커피믹스 같은 다방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에어컨을 틀어주고 선풍기를 대준 그분들의 가게에서 천 오백원짜리 커피 한 잔만 먹고 나가긴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그 집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주문했다. 냉매실차 무려 커피의 2배인 3천원.

복부비만이 냉매실차를 탁자에 내려놓더니 내 앞에 펄썩 앉았다. 더위와 여행이 지친 나는 얼음 가득한 냉매실차를 한 모금 입에 넣었는데, 이런 웬걸, 의외로 매실차는 정말 맛있었다. 커피는 인스턴트를 팔지만 매실차는 아마도 이 지역에서 나는 오리지널 매실을 이용한 것 같았다. 새콤달콤한 맛이 피곤한 여행자에겐 정말 일품이었다. 내가 매실차의 맛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복부비만은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나는 피곤하고 귀찮아서 건성건성 대답하고 묻는 말에 예, 예를 반복했다. 너무도 다행히 그 여자는 몇 마디 내게 묻고는 곧 자리를 뜨면서 내게 차 시간 될 때까지 티브이를 보라면 내 앞에 티브이를 틀어줬다.

아마도 그 여자는 내게 끈적한 웃음을 날리며 커피 한 잔, 냉매실차 한 잔 사달라고 하며 매상을 올리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녀에게 커피는 물론 매실차라도 사줄 용의가 있다. 사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도시에는 가지도 않을 뿐 아니라 피치 못하게 가더라도 돈을 쓰지 않는다. 그 도시의 통계 속에서 나 하나 오지 않았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지라도 나는 그 도시의 방문객 숫자에 내 몸뚱이 숫자하나 더 올리고 싶지 않고 외지인의 지출내역에 내 돈을 한 푼이라도 보태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매실차를 몇 잔이라도 살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몹시 피곤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의외로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막차시간 15분전 나는 그 다방을 나와 정류장에서 강진행 막차를 기다리며 하룻밤을 강진에서 지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막차는 쉽게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조바심을 참고 참았지만 막차 시간인 7시 20분이 지나자 내 조바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소쿠리를 들고 정류장을 지나치다가 나를 발견하였다. 내게 눈길을 주자마자 나는 기회다 싶어 물었다. 막차 시간이 지났는데 차가 왜 안오는 것인지 물어보자 그 할머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시길 원래 막차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일찌감치 휙 지나가버린다나? 마을 주민을 훤히 다 아는 운전기사가 그날 저녁에 강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미 지나간 지 오래라는 거다. 이게 말이 되나? 도시의 정확한 삶에 익숙한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막차를 기다리느라 다방에서 죽치고 있었는데, 게다가 무려 10분 이상 일찍 나와 기다렸는데 막차가 가버렸다니 내겐 너무도 황당한 일이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조금 젊은 할머니가 그 앞을 지나시다가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보시고는 “성님, 뭔일이랑가요?” 하고 참견을 하신다. 자초지종을 들은 젊은 할머니와 그 성님 할머니 두 분은 그때부터 나와 함께 내 고민의 동반자가 되셨다. 두 분은 나에게 이장님 집에서 자고 가라고 제안을 하셨다. 자신들의 집에 방이 있으면 재워주겠지만 방이 없다면서 이장집에 가면 방이 있으니 재워달라고 부탁해주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저 돈 만원이나 만 오천원만 주면 아침도 챙겨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미 주변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졌고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계속 할머니들과 함께 “워쩔까나?” 하며 고민을 계속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이틀째다. 대책 없는 도보여행을 시작하여 초짜가 치른 첫날이다. 몸은 말도 못하게 피곤한데다 땀투성이고 오늘 밤엔 옷세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샤워시설도 없고, 세탁장도 따로 없는, 게다가 에어컨은커녕 모기가 공격을 할 시골집, 친절하다 못해 사사건건 충고와 잔소리를 하실 어르신들, 이런 상황을 생각하니 나는 이장님집에서 하루 밤을 보내기엔 너무 도시화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걷는다는 것은 자살행위이며 내 사타구니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에게 택시를 여쭈어 보니 강진까지 택시비가 장난이 아닐 거라고 하시면서 마을의 콜택시 기사집을 알려주셨다.

할머니들하고 헤어져 콜택시 기사집에 도착하자 마당에서 차를 애지중지 꾸미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차는 도시에서 부자들이나 타고 다닐 만한 시커먼 대형 승용차였다. 급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는 다짜고짜 그 기사님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기를 택시비가 내 계획보다 많이 나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장님집에서 잘거라고 말했다. 사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기사아저씨는 잠시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내게 “차 타슈”하며 명령했다. 그리고 그 시커먼 고급 승용차는 강진을 향해 정말 거짓말 보태지 않고 레이싱 카처럼 달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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