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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당] 요한복음과 도덕경(3): 말씀 안에 생명은 사람들의 빛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오늘 제3강 공부할 텍스트는 요한복음 1:1b-5절까지 이다. 본문은 이렇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된 어둠이 깨닫지 못 하더라”(요1:1b-5)

‘말씀’이라고 번역된 ‘로고스’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어떤 관계인가는 초대교회 때부터 민감한 문제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유일무이한 하나님 신앙을 지닌 유대교 신앙 전통에서 ‘로고스’를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를 매개하는 첫 피조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창조된 존재 곧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의 본질의 출현인가 양단간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는 문제였다. 동시에, 이 ‘말씀’의 화육체로서 예수의 생명이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려면, 유일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로고스(말씀)의 자리매김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자 도덕경 제42장 첫 문장엔 이런 말씀이 있다: “도에서 ‘하나’가 생겨나고, 하나에서 ‘둘’이 생겨나고, 둘에서 ‘셋’이 생겨나고, 셋에서 만물이 생겨 난다”(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노장사상에서는 ‘도’란 유와 무의 근원적 실재이면서, 만물의 생성원기요 창생원리요 화생능력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버금가는 궁극적 실재이다. ‘도’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말씀’ 곧 로고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를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만, 동시에 이사야가 말하듯이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다”(사45:15). 성경도 하나님의 양면성을 말한다.  마틴 루터는 ‘계시하시는 하나님’ (deus revelatus)이 동시에 곧바로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고 강조했다. 도덕경에서 도는 유이면서 무이다. 도의 본체는 도리어 항상 ‘텅빈충만’으로서 ‘항상 이름 할 수 없는 이’(도상무명)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머리털까지도 사 세고 있는 양 하나님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다. 하나님은 그 깊음과 높음의 본체를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신비자’로서 경외함이 더 옳은 자세이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생각하는 ‘무로부터의 창조신앙’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덕경에서는 ‘창조’라는 개념자체가 낯설다. ‘창조’ 라는 말을 쓸 땐, 창조하는 주체자로서 창조자와 지음 받은 피조물의 관계가 날카롭게 구별된다. 그러나, 도덕경에서는 요한복음에서처럼 ‘지은바 되었다’는 개념을 갖지 않는다. 그 대신 낳았다고(생) 표현한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았다고 이해한다.

2. 지은 것과 낳은 것

지은바 된 것이 아니라 낳은 것이라는 표현은 도덕경의 실재관과 그리스도교의 실재관을 대조시킨다. 그런데, 진실은 ‘지은바 된 것’과  ‘낳은바 된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 이해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더 적합한 제3의 길이다. 우선 앞에서 인용한 도덕경 제42장 첫 구절에서 도가 낳은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둘’은 무엇이며 ‘셋’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문가들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도’ 그 자체는 유와 무를 다 포함하지만 그 존재방식은 ‘텅 빈 충만’같고 ‘무한한 잠세태(가능태)’에 가까운 형이상학적 궁극실재이다. 무엇이라 형용하거나 개념규정 할 수 없는 궁극실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하나님’이다. 상대적으로 말하면 존 힉(John Hick) 교수가 말하듯이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진다”. 이름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잠정적으로 수많은 이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체험된 하나님의 특성을 묘사한 별명이거나 아호와 같은 성격의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 중 어느 하나를 절대화 할 때, 그 이름은 영원한 정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명가명비상명). 야훼나 여호와라는 이름도 예외가 아니다. 그 이름은 성경적 하나님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참 하나님은 고유명사를 가지실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백성이 시내산과 광야생활과 고난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신적속성을 히브리어로 계시 받은 것이다. 번역하면 “스스로 있는 자,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자, 만유를 있게 하시는 자”라는 뜻이다.

‘텅빈 충만’으로서 궁극적 실재가 우주만물의 원기로서 자신을 스스로 변화시켜 나타낼 때 ‘하나’라고 이름한다. 이 ‘하나’에서 둘이 낳게 되는데 도양철학에서는 ‘천지’ 혹은 ‘음양’으로 설명한다. 이 둘은 변증법적 상호 모순개념 이라기보다는 ‘상보적’개념이다. 그래서 이 ‘둘’에서 음양 혹은 천지를 통전하고 자신 안에 품게 되는 제3의 실재를 낳게 되는데, 도덕경에서 말하는 ‘충기’요, 인간학적으론 사람이 그것이다. 그래서 ‘셋’은 ‘천지인 삼제’라고도 본다. 음과 양과 충기, 혹은 하늘과 땅과 사람, 그 셋의 협동적 일함에서 만물을 낳는다고 도덕경은 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 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지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진리) 그 자체가 지닌 덕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리되는 것이다. 도덕경에 의하면, 대자연으로서 ‘천지’는 사랑이라든지 긍휼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는 어짊을 지닌 자비한 분이 아니라고 노자는 말한다(천지불인).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천지는 냉혹하리만큼 엄정하고 그 누구를  편애하거니 악인을 징벌하지도 않는다. 죄 없는 순진한 아기들과 민초들이 자연재난과 전쟁과 폭군의 폭력 앞에서 홍수처럼 쓸려 죽어 나간다. 과연 천지는 자비심이나 긍휼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은 ‘천지’의 제1차적 공덕과 목적인은 생명을 낳고 양육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렇게 느꼈다. ‘도’의 궁극적 존재이유도 생명을 낳고, 보호하면서 기르고, 마침내 여물게 하자는 것 아닐까? 요한복음의 로고스론은 어떤가? 요한복음 저자는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함께 있었다는 것, 만물이 지음받을 때 그 ‘말씀’ 없이 지은바 되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함께 계셨다는 것, 그렇기에 ‘말씀’ 곧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로고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만든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중간존재, 도우미, 창조수단, 생성원리가 아니라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 노자도덕경 표현으로 말하면 “도생일”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분’이란 것이다. 예수를 메시야가 되게하시는 ‘그리스도성’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신 분이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낳으셨지만, 영성적 본성(성결의 영)으로는 아브라함 낳기 전 부터 있었고, 하나님 품 안에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낳으신 외아들 ‘독생자’ 라고 요한복음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현대생명과학과 깊은 사상가들은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생명의 대파노라마를 ‘창조된 것’, ‘생성된 것’, ‘스스로 자기조직화 한 것’, ‘대자연이 낳은 것’,  ‘존재 잠세성이  발현된 것’등등 어떤 표현으로든지 그 중 어느 한가지로서 존재와 생명의 신묘한 현실과 실재를 온전히 설명 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존재한다는 것,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낳은 것이면서 창조된 것이다. 이른바 ‘창생’이다. 창조성과 그 스스로의 발전성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다.  이른바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사건발생적인 ‘창발적 현상’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해서 틀린 말도 아니고, 도가 천지자연과 만물을 낳았다고 말해서 틀린 말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 이론이나 신학적 도그마가 아니라, 그가 (그녀가) 얼마나 생명과 빛을 놀랍게, 소중하게, 감격하고 감사하면서, 경외하면서 받아 살고, 오롯이 때 묻지 않게 지키며 살고 있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과 빛이라는 두 어휘는 요한복음서에서 핵심적 단어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세상의 생명이고 빛이라고 증언하며, 예수가 세상에 오신 목적도 생명을 주어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고, 빛을 주어 바르게 보면서 살도록 함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요한복음처럼 ‘지음받음’(being made, 라틴어 creatus)을 강조하면 지은자와 지음받은자 사이의 구별성이 들어나고, 도덕경에서처럼 ‘낳음’(being generated, 라틴어 generatus)을 강조하면 동일성이 부각된다. 전자에서 영성은 ‘찬양과 감사’가 살아나고, 후자에서 영성은 ‘깨달음과 동체대비’가 살아난다. 전자에서는 ‘자연의 역사화’가 강조되고, 후자에서는 ‘역사의 자연화’가 강조된다. 그러나 실질적 종교들의 영성생활을 들여다보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대립이라기보다는 함께 공존하고 있다.

3. 태양의 존재유비로 본 하나님( Godhead/ 성부), 로고스(Logos/ 성자), 지혜자(Sophia/ 성령)

헬라철학의 자궁에서 발생한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론’을 발전 시켰다면 유대교 지혜문학전통에서는 오래전부터 지혜전승이 계승되어 왔다. 유대교 전통에서 ‘지혜’(히브리어hokhmah, 헬라어sophia)는 단순히 세상경험을  많이 쌓은 지혜자나 도인이 갖춘 통찰력이나 관조적 지성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스토아 철학에서의 로고스처럼, 태초부터 창조자와 함께 있어서 창조사역에 동참한 신적존재로서 고백한다(잠언 8:22-31). 요한복음이 서론을 로고스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리스도 공동체가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도 유대교 지혜전승이 그 토양으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양식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계에서 은유나 상징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려는 방식을 신학에서는 ‘존재유비’(analogy of being)라고 부른다.  예들면 위대한 예술작품을 보면 그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품성과 기능을 짐작하여 알 수 있다는 방식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처럼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롬8:20). 요한복음이 말하는 도(로고스), 유대교 율법이나 잠언이 말하는 지혜가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의 신성 그 자체와 어떤 관계라고 이해해야하는가를 태양의 존재방식을 유비로 들어서 이해하면 아래와 같다.

현대지식에 의하면 지구의 모든 동식물 생명체는 태양에너지의 산물이다. 태양은 간단히 말해서 광원, 광선, 광열로서 존재한다. 태양광원은 핵융합반응을 통하여 우주공간 속에서 불타고 있다. 그러나 우주공간속에 태양이 불타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태양광원에서 쏟아저 나온 광선(빛)이 지구에 닿고 눈의 시각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도 아침 해가 뜬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열이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태양의 광원, 광선, 광열은 체험되는 현상으로서는 서로 다르게 구별되지만, 그 본질에서는 같은 것이다. 태양 광선(빛)은 지구에 다다라서 현존하는 태양광원이며 태양을 드러내주는 것이고, 지구에 쏟아져 내린 태양열은 만물의 생육과 발전을 돕는 생명의 근원적 에너지가 된다.

하나님 그 자신을 ‘광원’이라 하고,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부하나님’에 해당한다.  광원과 함께 광원 안에 이미 광선(빛)이 첨부터 있어왔고, 태양광원이 있음을 광선이 알리듯이 ‘로고스’는 성부하나님의 계시의 빛이요, 자기현시의 원리이다. 로고스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체로서 나타났기에, 예수 안에 그리스도성을 ‘성자 하나님’이라 교회는 예전에서 고백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유비는 동질성, 친화성을 넘어서, 지음 받은 관계가 아닌 낳음 관계를 말하려는 가족관계의 은유적 표현이다. 광선이 있는 곳엔 반드시 ‘광열’이 따르고 광열은 생명을 육성하는 권능(에너지)의 원천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되었다. 이 성령은 고대 유대교에서 지혜(sophia)로서 나타난다.

광원, 광선, 광열은 각각 따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태양의 세 가지 존재방식이자 나타나는 현상이듯이, 로고스(말씀)는  ‘한분 하나님’의 신적 존재양태 중 한가지이고 자신을 드러내고 일하시는 현상적 모습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신적 실재의 영묘한 본질과 본성을 자연계에서 비유를 들어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가 절감하지만, 요한복음 제1장 제1절의 끝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를 이해 해보기 위해서 억지로 존재유비로서 태양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말해본 것이다. 그러나, 로고스(말씀)는 단순히 태양의 광원을 알게 하는 광선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 기능만이 있는 것 아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증언한다. 그 말의 참 뜻을 다음 제4강에서 집중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니 영광이 주 하나님에게만 세세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편지에서 쓰고 있다(롬11:36).(계속) 
 

위 글은 지난해 가을 5회째를 맞은 <갈릴리복음 성서학당>에서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발표한 강연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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