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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학당] 요한복음과 도덕경(5): 간사함 없는 것이 참 신앙인 표징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1] 참 이스라엘의 핵심으로서 ‘간사함이 없음’과 도덕경에서 복귀어박(復歸於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자문위원)

오늘의 말씀공부 본문은  요한복음 1: 43-51절에 나타나 있는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묵상할 요절로서 47절 말씀이다. 그리고 연관시켜 음미할 도덕경의 말씀은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28장에 나오는  몇구절이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1:47b)
 지기웅 수기자 복귀어영아 (知其雄 守其雌 復歸於嬰兒)
 지기백 수기흑 복귀어박 (知其白 守其黑 復歸於樸)

[2]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를 보도한다. 갈릴리 어부 베드로, 안드레,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의 적극 권유를 받아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체념과 일반상식에 주저하던 나다나엘과의 면담 장면을 부각 시킨다.  초대교회 12사도중 이름있는 사도들 예들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거명하면서(마4:18-22, 막 1:16-20, 눅 5:1-11) 12제자들 중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형성된 권위있는 제자들의 이름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요한복음엔  없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독특한 멧시지를 전하려 한다. 나다나엘은 열두 사도명단 중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좋은 친구 빌립의 강한 권고를 받고  나사렛 같은 시골에서 유명한 랍비 한분 어쩌면 메시야 일런지도 모르는 기이한 분을 한번 만나보라고 소매를 이끌리며 다가오는 나다나엘에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 예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성으로서 ‘간사함이 없을 것’을 꼽은 것이다. 율법을 잘 알고 있다거나, 지성과 감성과 영성이 얼마나 발달되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가 만났던 당대 사람들이, 특히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해지고 강팍해지고 비굴해지고 탐욕과 권력욕에 물들어 있었으면 시골뜨기 청년 나다나엘의 순박함 속에서 그렇게 감탄의 말씀을 예수님은 발하는 것일가?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찬 말씀을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d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1:47b) “그 사람 안에 간사함이 없구나!” 라고 말하시는 때 ‘간사함’(guile/ 헬 dolos)이란 도덕적 의미에서의 악함보다는 다른 뉴앙스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간사함’(guil)이라는 단어는 교활, 음흉함, 간교, 책략을 부림등을 내포한 인간 마음상태의 변질된 품성을 뜻한다. 

나다나엘은 무식할 수 있다.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릴리 나사렛 시골마을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식견도 부족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모르는 그저 보통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의 인간 본래품성을 변질시키고도 남을 만한 온갖 세상 시련, 유혹, 가난, 권력자들의 협박과 회유, 종교지도자들 감언이설과 세상풍조의 지조없는 변심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인간품성을 꼭 지키고 있었다. 생물세포 안에 들어있는   DNA 형질은 맷돌에 밀알을 넣고 가루로 만들어도 부셔지지 않듯이,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함석헌이 말하는  맨사람 ‘씨알’ 이었다. 

심안과 영안으로써 사람의 속을 꿰뚫어 읽으시는 능력을 지닌 예수는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에 앉아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때묻지 않는 ‘간사함이 없는 순수 인간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예수를 팔아먹고, 로마총독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민중을 선동했던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고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름과 명예를 보위하는 ‘하나님의 친위부대’라고 자처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로마정치 권력에  아부하고 협력하고 타협하면서 이권을 얻고 실속을 차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인간품성 속에서는 영악함, 음흉스러움, 간지, 책략, 자기합리화의 자기변호, 자기밥그릇 먼저 챙기기, 양심이 화인 맞은 듯한 도덕적 불감증을 본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세상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대상으로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의 공통적 특징은 그들 인간 품성속에 ‘간사함이 없음’이 아니라 ‘간사함이 있음’이라는 것이다. ‘간사함’은 그야말로 영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간사함’으로 보이지 않는 재주와 책략이 있다. 도리혀, 그들이 진리파수자요 정통복음 수호자요 능력있는 목자이라고  자기도 그렇게 확신하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믿도록 하는 놀랄만한 재능이 있는 것이다. ‘간사함’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언어엔 온갖 그럴사한 위장과 빛나는 꾸밈과 현란한 수사학과 심지어 온갖 철학과 신학의 교리신조가 동원된다.

그러나, 번쩍이는 금속이라고 모두 금이 아니듯이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그들이 주장하는 ‘선교’는 선교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교권주의자들이 되어 있어서 기독교라는 종교조직단체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수호하는  전진기지라고 착각한다. 세상은 모두 변하는데, 중세기 봉건영주처럼 변할줄 모르는 동키호테적 작은 교황들이 되어 그 권력과 명예욕을 즐긴다. 

[3] 복귀어영아 복귀어박(復歸於嬰兒 復歸於樸)

노자 도덕경엔 인간의 꾸밈, 허위의식,  겉치례, 사회적 페르소나, 문명의 인위적 조작이 결국 인간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고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소박한 통나무 원목에로 돌아가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복귀어영아, 복귀어어박’이라는 유명한 도덕경의 구절이다.

생물체에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특징이 생물학적 유전자 특성의 발현이든 전통의 관습이든 양성엔 특성이 있는 것으로 노자는 보았다. 그래서 자웅(雌雄)은 칼 융박사의 아니무스/아니마 라고 명명한 두가지 심리적 생리적 속성처럼 특징을 갖는다. 도덕경은 숫컷의 성격(雄)과 암컷의 성격(雌)를 미리 어느 한쪽이 다른 것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보는 성차별을 말하는 고전이 아니다.

생물체의 행동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때, 남성적인 것 웅(雄)은 굳세게 움직이고, 성급하게 나아가고, 어떤 때는 공격적이고, 물리적 힘으로 승부를 보려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여선적인 것 자(雌)는  태어난 어린것들을 보살피고 길러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유연하고, 조용하며, 겸허하고, 부드러우며, 인내하고, 보다 자기희생적이라는 것이다.

‘知其雄 守其雌 復歸於嬰兒’라는 짧은 구절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사람, 진정한 영성적 사람, 진정한 신앙인 이스라엘 사람은 생명이 지닌 굳셈과 강함을 알면서도 유약함과 부드러움과 겸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어른이면서도 어린애다움의 순진무구함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知其白 守其黑 復歸於樸’이라는 잛은 구절도 기독교인들이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밝은 것을 알고 어두움것을 지키면서 원목의 소박함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밝고 흰것을 안다’(知其白)는 말은 리성, 지성, 지식, 논리, 이론, 교리, 경전을 잘 안다는 뜻이다. 이에 대조하여 ‘어두운것 검은 것을 지킨다’(守其黑)이란 말은 리성과 지식으로 혹은 이론과 교리로 다 알수 없기에 깊은 침묵과 묵상과 골방의 기도를 통해서 다 알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움과 현묘하심 앞에 겸손과 침묵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다듬어진 각목같은  가구만드는 재료가 아니라 산에서 막 잘라낸 원목처럼 목질이 아직 흩으러지지 않은 나무 본래의 질박한 특성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박(樸)이란 용도에 따라 재제소에서 기계로 규격대로 잘려지거나 다듬어지기 이전의 나무껍질도 벗겨지지 않은체 있는  질박한 나무의 특성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서 본 인간 품성 “그 안에 간사함이 없도다!” 한것이 바로 ‘복귀영아, 복귀어박’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소천했을 때, 심지어 정치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무언중에, 종파심과 정치적 당파심을 떠나서, 이심전심으로 통해던 정서적 감정표현은 ‘바보같은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느낌이다. 그들의 종교적 지도력이나 혹은 정당지지도에 따라서 정치적 개혁노력을 아쉬어 하지만, 그 본질 속에는 더 깊고도 이상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출세하지도 못하고 무한경쟁 시대에서 재산도 모으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김수환추기경과 노무현 대통령 속에서 ‘바보스러움’이 주는 어떤 동병상린과 인간성의 따뜻한 온기와 애정과 잃어버린줄 알았던 자기속에 있는 그 어떤 귀중한 인간성의 본질적인 것을 새삼스럽게 챙겨보려 했던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오늘날 왜 보통 사람들은 기존의 정단정치에 기대를 접고 정치현장에서 검증이 충분하게 되지 않는  안교수, 박변호사에게 큰 기대와 호감을 갖는가? 그들 속에서 영악하거나 교활하거나 지극히 계산적인 것이 아닌 ‘복귀어영아, 복귀어박’을 보았기 때문이다. 숫컷이 지닌 강점을 잘 알고 충분한 숫컷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암컷의 약함, 부드럼, 낮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날 왜 세상 사라들은  기독교 교회와 복음선교와 교단발전을 위해서 그들나름대로 자기희생적 열심인데 오늘의 한국 기독교나 그 지도자들에게 기대를 더 이상 걸지 않고 도리혀 식상해 하는가? 비록 수만명 수천명의 목회를 하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오늘날 기독자의 지도자상 안에서 ‘복귀어영아, 복귀어박’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너무 잘났고, 너무 위대하고, 너무나 해처럼 밝고, 너무나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자상하게 속속들이 다 알고, 남성상 처럼 거인주의와 공격적인 적극신앙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대기업가들의 성공사례와 종교계 지도자들의 성공사례의 기준과 지표가 비슷한 것에 잠시 한때 놀랐지만 숭고한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들으면 서운하다고 할런지 모르나,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면서 느낀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평하기엔 너무나 영악한 지도자들, 계산적인 지도자들, 책락가들이 다 되어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과 도덕경을 강해하고 있는  필자나 이 땅의 모든 목사, 장로, 신학자들이 정말 자기를 뒤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이다. “네 속에 간사함이 없이 맑고 투박한 마음을 지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하면 ‘원목나무의 목질의 소박함’에로 모두 돌아가라는 것이다. 회개와 개혁의 본질은 그 점에 있다. 그 것 없이는 모든 노력이 헛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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