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김이곤 설교] 나를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창세기 45: 1-8; 50: 15-21; 요한 3:16-17)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이 말은 형들에 의하여 노예로 팔려 혈혈단신으로 애굽에 끌려 내려 왔었지만, 이젠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받은 덕분으로 그 모든 시련을 다 극복하고 일약 이 애굽 대제국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이 그의 형들을 향하여 말한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말은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겼던 저 철천지 원수였었던 그 형들이, 그것도, 총리의 은잔을 훔쳐서 도망치다가 잡혀 온 죄인으로서 그리고 이 하늘같이 높은 총리가 감히 동생 요셉인줄도 모른채 그저 장차 받을 큰 형벌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요셉 총리 앞에 부복하고 서있는 그런 살벌한 국문장과도 같은 그 자리에서 저 하늘같이 높은 총리인 자신이 바로 다름 아닌 요셉이라는 것, 형들이 그 옛날 잔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겼었던 그 요셉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면서 외쳤던 말입니다.
    아마, 인간본능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자제하기 어려운 본능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보복 본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의 꿈 이야기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소원이 네게 있으면 무슨 소원이든 한가지만 말하라고 하셔서 그 한가지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 드릴 때, 솔로몬은 다른 그 어떤 소원 보다도 단지 “지혜로운 마음”만을 원한다고 말씀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놀라시면서, 이럴 때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란 “장수의 욕망” “물질적 부유의 욕망” 그리고 “원수갚고 싶은 욕망”, 이 세가지인데, 솔로몬이 이 세가지 중 그 어느 하나도 요청하지 않고 오직 “지혜로운 마음”만을 요청하였다 하여 그를 크게 칭찬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원수 갚고 싶은 보복본능이 인간의 세가지 근본적 욕망 중의 하나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긍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만큼, 보복 본능은 인간심리의 가장 저편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근본 심성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상황도 바로 이러한 상황, 즉 인간이면 누구이든 한번 쯤은 통쾌한 보복을 한 번 해 볼만한 그런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은 혈육을 이어받은 동생인데, 그런 그 동생을 단지 아버지의 사랑을 다른 형제들보다 좀 더 받는다는 그 지극히 주관적인 잘못된 오해 하나 때문에 그 동생을 극도로 미워하여 마침내는 부모 모르게 노예상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던 저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와도 같은 바로 그 형들이 이제는 그 운명이 극전환되어 가난하고 배고픈 참으로 불쌍한 유랑민의 신분으로 이 곳, 망망대해 같은 광대무변의 사막길을 헤치고 이곳 애굽 땅에까지 양식을 구하러 찾아 왔고 또 설상가상으로 그들 앞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동생이 막강한 풍요의 나라 애굽 대 제국의 총리가 되어 자신들의 생명 여탈권(與奪權)을 쥔 군왕에 가까운 권력과 위엄을 가지고 도도하게 그 권위를 떨치며 그들 앞에 좌정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총리 각하가 애지중지하는 은잔을 훔쳐 갔다는 혐의까지 받고서 죽을 모습이 되어 요셉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조금만 마음을 잘못 먹으면, 이 천한 유랑민들의 벌레같은 목숨 쯤이란 한 순간에 날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 처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이 힘없는 유랑민들이 그토록 자신에게 무자비했던 원수같은 그 형들이라면, 막강한 권력의 신분에 있                               2
는 요셉으로서는  왠만한 성품 만으로도 충분히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명분있는 멋진 보복의 칼을 형들을 향해 높이 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감히 이런 상황에서 보복의 칼을 들지 않고 그 원수같은 형들을 사랑으로 껴안을 자신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웁게도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이 확신에 차서  내뱉은 말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전혀 이외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리로 가까이들  오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애굽에 종으로 팔아 넘겼었던 바로 그 동생 요셉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일 때문에 너무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마소서. 저를 이곳에 보낸 자는 실제로는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계획하셔서 장차 우리 가문을 살릴 자가 되게 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 곳으로 보내셨을 뿐입니다.  .... 그런즉, 저를 이리로 보낸 이는 실제로는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이 일로 더 이상 근심하지는 마소서” 라는 간곡한 말로 달래며 위로해 주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실로, 놀랍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놀라움은 오히려 이것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동생을 조금도 사정을 봐 주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륜을 어긴체, 감히 인신매매에 부쳐 애굽 노예상에게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그 파렴치한 반 인륜의 그 악행, 그 비극적 사건은, 분명, 형들이 저질른 악한 소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오히려 그 행위를 한 자가 “실제로는”(!!), 형식논리로 따지자면 형들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셨다라고 말하고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충격적인 말입니까? 즉 이 모든 일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가                               3
릴것없이 그 모두가 오직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攝理)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선포가 참으로 놀랍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동생을 이방 나라에 노예로 팔아 넘겨 인생 최대의 불행을 겪게 만든 저 반도덕적 악행이 그리고 과거, 요셉에게 내렸었었던 저토록 잔인한 불행이 실제로는 심성이 나쁜 형들의 소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기 보다는 실제로는!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그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그 점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신앙의 세계에서는 전혀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신앙논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민간신앙에 의하면, 빛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어둠은 악마로부터 오는 것이고, 행복은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불행은 악마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하는 그런 것인데, 형들이 저질은 저 잔혹한 불행과 비극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요, 그것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일이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납득하기도 어렵고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 선포 속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일반적 신앙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심오한 신학적 역설성을 지닌 신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주 역사의 기원이란 오직 “하나”라고 하는 것, 즉  둘이거나 셋이거나 또는 그 이상이거나 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고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모든 세상사들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릴 것 없이 전적으로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지 결단코 그것이 그 무슨 선한 신과 악한 신과 같은 두 신에 의하여 선한 것은 선한 신으로부                               4
터, 악한 것은 악한 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구조가 그 무슨 선한 일은 선신으로부터 나오고 악한 일은 악신으로부터 나오는 그런  이원구조(二元構造)의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복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불행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부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가난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건강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질병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평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전쟁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빛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라는 따위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약본문은 같은 혈육의 동생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겼던 그런 반 인도적인 저 악랄한 비극과 불행도, 단순하게 그저 형식논리로만 보면, 분명 형님들이 꾸민 악행으로 보이지만, 또는 악마의 장난 같은 것으로도 보이지만, 성서적 신앙의 눈으로 보면, 실제로는, 형님들이 저질은 일도 아니고 악마의 장난도 아닌, 그것은 전적으로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 뿐이신 한 분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속한 일이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즉 선도 악도,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생명도 죽음도 실상은 모두가 다 하나님 한 분 그 분이 홀로 주도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신 32:39; 사 45:7; 삼상 2:6-7; 시 139:12).  말하자면, 주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지만 거두어 가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욥 1:21)입니다. 살리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지만 죽이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인간 생사여탈(生死與奪)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29)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편 139편 시인은 매우 역설적으로  이렇게까지 고백한                               5
바가 있었습니다: “주님에게는 흑암이 숨기우지 못하며 밤도 대낮같이 환합니다.  주님에게는 빛도 빛이 아니고 어둠도 어둠이 아닙니다. 빛도 어둠도 주님에게는 다 하나일 뿐입니다”  (시139:2,7,12)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경우와는 달리 빛도 빛이 아니라는 것이며 어둠도 어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더 어려운!!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즉 만일 세상의 모든 일이,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평화든 환난이든 그 모두가 모두 다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즉 역사의 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라면, 그것이 정녕 그런 것이라면, 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그 근본 참 뜻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 하나님의 일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으며, 우리가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또한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전혀 오히려! 이 세상은 온통 혼란과 비극 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악하고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악이 개재된 세상사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은 도데체 무엇이고 또 도대체 어디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들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 뜻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세상이 이 지경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신의 재앙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도데체 무엇을 의미                               6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긴박한 최대의 물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나!!, 성서는 이 물음에 대하여 결코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아니 하였습니다. 매우 분명한 한 대답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또한 끊임없이 매우 확실한 언어로 예부터 지금까지 줄곧 증언하여 왔었습니다. 즉 그 대답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45장 5절 하반절과 7절에서 두번 반복해서 요셉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셨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강조된 말은, 논의할 여지 없이,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라는 말씀과 “생명을 보존하여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기 위하여”라고 하는 반복된 그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본질상!! 우리를 심판하시는 신이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서라도  살리시려고 하시는 생명창조와 생명보존의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 그것은 결코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을 위한 예비단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비록 심판의 하나님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교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지내 왔던 숨겨진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진리가 유대 사                               7
람들에게는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 즉 걸려넘어지게 하는 것(trap)으로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모리-아”(μωρία), 즉 바보스럽고도 어리석은 것(stupidness)이으로 잘못 이해되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으로 본 이 세상의 그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칭하는 그 손자병법적 진리”가 실제로는 인간구원을 가로막는 진짜 “스칸달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오해는, 분명, 성서의 하나님이 지닌 생명 창조와 생명보존의 속성(屬性)에 대한 큰 오해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은, 본질상, 생명창조와 생명보존의 신!!이시지 결코 그 무슨 우리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시는 그런 분, 죽은 인간 영혼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저승마왕은 아니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다름아닌, 성서적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요 우리의 본문이 말하려는 바의 주요 강조점이라 하겠습니다. 참 신앙인은 비록 이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게 보인다고 말할지라도, 아무리 사탄의 잔혹한 심판이 난무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거기에는, 십자가의 사랑과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들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성서의 하나님은 본질상 결단코 우리 인간을 심판하시는 신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비록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인간을 기어히 구원하시려는 분,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 넘기는 그런 극악한 악행으로부터도 결코 그 무슨 절망적인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감히 우리를 살리시려는                               8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섭리가 그 배후에 들어 있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하고 있는 성서의 하나님이신  야훼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롬 12:21).  하나님은 역사의 패배자가 아니라 역사의 유일한 승리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악을 악으로 이기시는 “힘의 논리의 신”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극복하시는 형식으로 악을 이기시는 분, 십자가 죽음의 패배를 부활의 능력으로 이기시는 승리의 신“이시라는 것, 이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단지, 신앙의 걸림돌만 될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즉 성서의 하나님이신 생명창조의 주 하나님은, 본질상,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려는 분이시다는 것이 우리 본문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가지의 뜻!, 그것은  그러므로, 심판이 아니라 <생명구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 역사는 비록 악이 난무하는 세계요 정말 세상 살맛이 안나는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이 역사를 악하다 하여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은 더더욱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성서가 말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끈질긴 사랑의 하나님을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결단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하여 이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한 3:17)라는 말로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이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그러한 극한적인 비극적 악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이 결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9
또 그것을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름 아닌 기독교적 역사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생명을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징벌해 버리시거나 포기하시거나 하지 아니하시고 그 생명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붙드셨다가 마침내는 구원하시려는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의 하나님, 구약의 수세기 역사를 통하여 전승된 그 야훼 하나님은, 그러므로, 전쟁을 좋아하는 신이시거나 인간심판을 통하여 자신의 무료(無聊)함을 달래시는 인간 신화가 만들어 낸 그런 신화적 신이 아니라 이 역사의 고난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십자가 사랑의 방식으로 마침내는 기어이 이기고야 마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을 믿는 신앙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신학적으로는 흔히 신정론적(神正論的) 신앙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러한 신앙은, 논의의 여지없이,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기원을 결코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철저히 일원론적(一元論的)으로 이해하여 역사의 주를 오직 야훼 한 분 만으로!! 이해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를 나눈 형제를 노예로 파는 그런 반 인륜적 악행 속에서도 선의 불길을 일으키시어 그 악을 사랑으로 불태워 버리시는 사랑의 신이실 뿐입니다.  요셉을 애굽 노예상에게 팔아 버리는 이 잔악한 형제갈등의 반윤리적 악행 속에서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사랑의 생명이 싹트게 하시고, 찢고 싸우고 전쟁하며 핵폭탄을 던져서라도 자멸하자고 하면서 자살 사이트를 크게 열어 놓고 죽음을 독려하며 공멸의 종말을 향하여 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경쟁하듯 달려가는 저 무지한 인생들의 그 절망적 미래를 한사코!! <생명사랑>의 묘약(妙藥)으로 치유하시어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계시                               10
는 분이 바로 다름 아닌 성서의 하나님 야훼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시라 하겠습니다.  이 신비한 비밀을 선포하는 일을 저는 가끔 유머스럽게 표현하여 “천기누설하는 일”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복음 선포”는, 그러므로, 다른 말로 말하면 “천기누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감추어진 참 신앙을 분명하게 간직하고 사는 자는 항상 승리감을 가지고 행복감을 갖고 삽니다.  마치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숨겨 둔 채 온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농부(마태 13:44)처럼 큰 감격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도 또한 이 확신 때문에, 이렇게 외친 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죽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1).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사의 배후에서 우리의 눈으로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도록 빠른 속도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과 발을 능히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는  자를 가리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신앙인 엘리트>또는 <엘리트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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