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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영성순례기] 사춘기 아들과 함께 가는 길

이대희 목사·강릉선교감리교회 담임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3)

 
▲순례 일곱번째날,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가는 여정중에서 등 뒤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빛을 받으며 산솔Sansol 마을로 들어서는 순례자들.
▲무어인과 기독교인들간의 전쟁이 격렬했던 카스트로헤리즈, 16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산 후안 교회.

변방 강릉의 넉넉하지 못한 목회자의 가정이 안식년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경제적 부담이 적지 않다. 더군다나 단란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축복으로 자녀가 셋이다. 중학교 2학년 아들 세빈, 초등학교 6학년 딸 세린, 초등학교 2학년 딸 세령이. 안식년을 지내기로 기도한 후에, 그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 또한 기도제목이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후원하는 선교지를 돌아보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정말 푹 쉬거나, 교환 목회를 해 보거나, 산티아고를 순례하거나 하는 등의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같은 지방의 Y형님 내외가 불현듯 산티아고로 떠난 것이다. 목회 여정의 숨고르기를 그 길로 택한 것이다. 한편으로 우려도 되고 부러운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들이 순례의 행진을 하는 기간 동안 나 또한 그 길을 마음으로 함께 걷고 있었다.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티아고 걸을 수 있겠소?” “네, 그리로 가고 싶으면 가요.” 놀라운 대답이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선뜻 동의한 것이다. 17년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아내를 다 알지 못했다. 산티아고 길을 걷자는 제안에 대해 별로 좋은 마음이 아닐 줄 알았는데 그처럼 쉽게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마음은 산티아고로 가득 찼다. 까미노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까미노에 관련된 서적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해 관련 자료를 탐색하기도 했다. 영상자료를 구해 시청까지 했다. 까미노에 빠진 것이다.
 
▲순례 열다섯번째날, 카스트로헤리즈에서 프로미스타가는 여정중에서 보카디야 델 카미노 마을을 벗어나와 카스티야 운하를 향해 가는 길.
▲순례 열여섯번째날, 카리온의 산타 마리아 알베르게(공동숙소). 침대 위에 널려진 짐들에는 순례자들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순례 스물네번째날, 아스토르가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가는 여정. 엘 간소 마을에 들어가기 전 해발 1,000미터 고원의 가을 들꽃.

어느 정도 까미노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2012년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부터 마을을 걷기 시작했다. 2킬로미터, 4킬로미터, 5킬로미터, 7킬로미터 조금씩 거리를 늘렸다. 발에 물집도 나지 않고 다리 근력도 좋아진 것 같았다. 까미노에 관련된 책들을 보면 저자들은 보통 1년 또는 2년을 까미노를 걷기 위한 준비를 하였는데, 평소 운동에 관심하지 않던 내가 두 달 정도 마을 걷기를 통해서 까미노에 나선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난다. 까미노를 쉽게 보았던 것이다.
 
까미노에 대한 가이드북들은 대부분 38일 내지는 40일 여정을 권장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33일 여정인 가이드북을 구했고 그 일정보다도 더 앞당기려 했으니 정작 까미노 앞에 섰을 때, 나의 교만한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를 밝혀 준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 만고의 진리이다.
 
▲순례 스물여덟번째날, 오 셰브레이로에서 트리야카스테라를 향해 가는 여정. 순례자의 어깨 위에 걸린 바이올린. 순례자는 해발 1,300미터를 넘어 저 아래 마을로 향한다.
▲순례 스물여덟번째날, 오 셰브레이로에서 트리야카스테라를 향해 가는 여정. 피요발 마을로 내려가는 해발 1,000미터 고원의 목장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는 소떼.

중학교 2학년 세빈이는 까미노에 동행하기로 하였다. 둘째 세린이와 막내 세령이는 인천에 있는 K형님댁에 부탁을 드렸다. 동행할 세빈이가 염려가 되었다. 아빠의 목회여정이 그렇게 순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빈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 것이 사치스러웠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제 사춘기를 지나며 나만큼 키가 훌쩍 커버린 아들과 동행한다고 하니 감사하였다. 그럼에도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그 800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좀 심란해졌다.
 
그러면서도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져가자고 제안했다. 아이는 바이올린과 함께 하겠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연주곡도 골랐다. ‘아리랑’, ‘You raise me up’, ‘Amazing Grace’, ‘버터플라이 왈츠’, ‘Yesterday’, ‘Moon River’ 등이 그것이다. 그 바이올린이 때로는 기쁨도 되고 즐거움도 되었다. 그러나 그 바이올린이 어려움을 주기도 하였다. 어쨌든 아들은 800킬로미터 까미노를 바이올린을 짊어 메고 완주하였고, 많은 순례자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로 위로하며 기쁨을 주었다. 순례자들은 바이올린을 짊어 맨 세빈을 ‘crazy boy’ 라 불렀다. 세빈이에게도 그것이 큰 성취감을 맛보게 하였으리라. 까미노를 완주한 후 바이올린 케이스를 살펴보니 세빈이의 등에 접촉한 부분은 하얗게 닳아 있었다. 계속.(사진제공= 이대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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