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데스크시선] 교회분쟁의 원인들

지난 7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7민사부는 KJ교회 H 목사 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평양노회와 Y 목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시당회장 파송결의 무효 확인 등’ 소송에 대해 H 목사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H 목사 측이 “작년 Y 목사를 KJ교회의 임시당회장으로 파송한 결의는 무효이며 Y 목사는 KJ교회 임시당회장으로서의 지위가 부존재함을 확인한다”는 내용으로 소송을 제기한 대로 법원은 위의 파송결의가 효력이 없으며 Y 목사가 임시당회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은 올해 통합총회의 결의로 Y 목사에 이어 KJ교회 담임으로 위임된 J 목사의 지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J 목사는 위임식까지 치른 상태라 매우 곤혹스러울 것으로 짐작된다. 이 판결에 따르면 이후 총회 측이 재판국을 통하여 전달하는 어떠한 방침도 총회 측의 몽니로 간주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H 목사 측은 총회의 비논리적 전횡을 사회법을 이용하여 제압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한 용사로서 승리의 미소를 지을 일만 남은 듯하다.   

이미 언론을 통해서 소상히 알려진 이 사건을 서술하면서, 사건 속의 고유명사를 굳이 영문의 첫 글자로 바꾼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교회 분쟁의 보편적인 특성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갈등과 분쟁이 없을 수 없지만, 근자에 들어 목회자들이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례가 늘어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성도들끼리 분쟁이 생기면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목회자들이 서로 혹은 총회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사회법의 판단을 요구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도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허물고 있으나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을 폭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보다 이성적 판별을 통해 상대방이 잘못했음을 주장하려고 하니 사회법적 판단을 복음의 정신보다 더 신뢰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쟁에 대해서 바울은 일찍이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립보서 3:19)라고 지적했다. 바울의 지적을 현재 분쟁 중에 있는 교회 현장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이 그 분쟁의 원인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표면화되지 않은 맘몬(Mammon)의 조종을 받고 있다. 돈과 권력은 매우 교묘한 합리화의 기제가 있어서 관심을 쏟는 모든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둘째, 분쟁 당사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인간의 기본심성 중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는 사람들의 행태가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셋째, 서로 상대방이 옳지 않다고 믿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첫째, KJ교회의 분쟁은 애초 H 목사의 재정비리에 대한 의혹 때문에 시작되었다.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맘몬의 마수가 분쟁의 사단이었다. 이어 맘몬은 총회 정치꾼들을 자극해서 담임목사가 공석인 교회를 점거하려는 야욕을 부추겼고 급기야 KJ교회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던 H 목사 측으로 하여금 물리력을 동원해서까지 교회당을 점거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파송된 임시당회장 모두를 정치꾼으로 매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총회의 권력을 등에 업고 ‘무주공산’을 침탈하려는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이 이러한 사태를 촉발하게 만든 중요한 기폭제였다. 반면에, H 목사 측은 대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교회건물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사전포석의 목적과, ‘내’ 교회를 가까운 발치에 두고 대학교 강당을 빌려서 써야하는 ‘광야생활’에 대한 피해의식과, 뉴타운 개발 및 미아역 역세권의 입지가 제공할 포기할 수 없는 예상수입에 대한 기대 등 때문에 폭력사태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마태복음 6:24)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돈 때문에 분쟁이 벌어지면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에스겔 36:20)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디모데전서 6:10)라고 하지 않는가? 거의 모든 언론이 주목했던 지난 4월 28일의 교회당 점거사태는 그들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을 증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총회와 H 목사 측은 사실상 교회 건물을 사이에 두고 교회를 깨버렸다. 목자들이 벌인 분쟁의 와중에 양들만 상처를 입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재물에 마음을 뺏기게 되면 결국 이러한 파국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만일 H 목사 측이 교회당의 점거를 포기하고 ‘광야생활’을 계속하기로 선택하는 결단을 했더라면 그들은 당분간 오해와 불명예의 어둠을 견뎌야 했겠지만 그 결단 때문에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본을 보인 성도들로 인정받고 존중받을 뻔했다.     
둘째, 이 모든 사태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세상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분쟁을 이어갔다는 것은 수치심이 분쟁의 양당사자들에게 소실되었다는 증거이다. 아니면 수치심은 애초에 내건 ‘합리적인’ 명분에 의해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졌을 수 있다. 바울이 분쟁 중인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의 수치심을 먼저 자극하려고 한 것도(“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고린도전서 6:5) 수치심은 자신의 본분을 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맹자도 “수오지심 의지단야”(羞惡之心 義之端也)라 했는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므로 수치심은 성급하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행동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수치심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덕목인 것이다.  
KJ교회의 사태는 시간이 지나면 안정되겠지만, 그 때 맘몬의 추동을 받아 형제끼리 다투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총회법의 권위를 무시하고 유순한 목회자를 앞세워 폭력을 주도하고서도 자식에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의 그 부끄러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은 이제라도 가말리엘의 권고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사도행전 5:38-39)      
이것이 하나님을 진정한 심판의 주체로 믿는 행위이다.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과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도 말한다(고린도전서 6:7-11). 이것은 사회법적 정의의 관념으로는 이해할 수도 판별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수치심은 이 영역을 점검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회개할 수도 있다. 
셋째, 교회 내의 대립과 갈등의 과정에는 ‘거룩한 전쟁’에 대한 자의식이 개입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나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는 하나님의 이름만한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양보와 희생을 생각할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총회는 임시당회장을 계속 파송했고 KJ교회는 그에 대해 찬성/반대파로 분열되었으며 급기야 사회법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KJ교회당 안에서도 역시 정의를 내세운 ‘거룩한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러한 충돌은 각자의 판단이 이성적으로 옳다고 믿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이성적 명분에 따라 ‘거룩한 전쟁’을 수행했지만 서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세워 충돌한 그 결국은 이성과는 모순되는 파국이 초래되었다. 
그 파국은 총회가 정치꾼들의 집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고, KJ교회는 총회법을 무시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미래의 파장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된 처지로 드러났다. 결국 양 당사자가 모두 ‘거룩하지’ 못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사회법정에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으니 바울의 지적대로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한’ 행위도 잘못한 것이지만 그 일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행함으로써 마침내 교회에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는’ 실태를 폭로하고 만 것이다(고린도전서 6:5-6). 이것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무시당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지난 4월 28일 용역을 동원해서 교회당을 점거하는 과정을 채록한 비디오 자료에는, 교인 중 몇 명이 용역 한 명을 붙들었는데 그 용역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자 주변에 있던 사람이 교회에서 담배 피는 것을 탓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회당 안에서 담배를 피워 문 자체가 그 곳이 교회가 아니라는 선언인데, 교회에서 어떻게 담배를 피느냐고 핀잔을 주는 장면은 폭력 사태로 이미 정의가 소실된 현장에서 정의를 강변함으로써 정의 자체가 희화화된 것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나 자신이 허물 많은 사람이기에 이 사태에 대해 정죄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지만, KJ교회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배를 자신들의 신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자랑으로 여기며 사회법의 논리를 따라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행위는 적어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시 돌아봐야할 문제라는 점을 알리고는 싶다. 사실, 바울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빌립보서 3장18절)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하는 말은 이 모든 사태의 과정이 진정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대로 한 것인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변성음을 따른 것인지, 자신의 욕망의 목소리를 듣고서 따른 것인지를 관계자들이 반추해보길 바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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