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이웃사랑은 최후심판의 판단 기준”

강남순 교수,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 (3-2)

문: 이웃과 원수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요?   

▲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CU)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좌)와 본지 이인기 편집국장(우). 

강: 원수나 친구라는 개념은 매우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다양한 권력구조 이슈와 관련된 건 다 정치적인 것이거든요. 독일의 정치 철학자인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라는 학자가 이 문제를 잘 분석했는데, 정치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친구와 적의 범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국가의 정치구조도 그렇고, 사실은 종교 안의 교단 정치도 마찬가지로 친구와 적의 범주를 끊임없이 생산하고 있지요. 이러한 구조에서 보자면,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즉 자기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끊임없이 계산된 관계 속에서는 영원히 고정된 친구나 고정된 적이란 없다는 것이지요. 즉, 원수라고 하는 것이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원수라는 인식을 뛰어넘어서라는 요구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즉 원수라고 규정하는 것을 절대화시킬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그들이 한 인간이며 한 동료라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코스모폴리탄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를 동료로 보는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태어난 곳에서 주어지는 정체성과 태양에 의해서 주어진 정체성. 태양에 의해서 주어진 정체성이란 태양 아래 있는 사람을 한 우주에 속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이지요. 그래서 코스모폴리타니즘에 대해서 ‘그렇다면 민족성이나 개별성은 없어지는 것이냐?’는 질문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러나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정체성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포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을 넓게 그리는 것입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동료인간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지요.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내 동료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을 우주적 시민성(cosmic citizenship)이라고 부릅니다. ‘우주적 시민성’은 코스모폴리타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문: 모두가 한 태양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인식은 개념적으로는 주장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사례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강: 예를 들면, 미국 같은 국가의 국민들이 이 우주적 시민성의 인식을 갖게 된다면 이민법부터 달라지겠지요. 오바마 정권 들어서 이민법도 많이 바뀌고 건강보험도 손질하려는 시도가 있어요. 그런데 주마다 입장 차이가 있어서 아직까지는 논란이 진행 중입니다. 소위 불법이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적으로 본다면 그들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나 혜택을 부여하지 않게 되지만, 동료로 본다면 정치가를 뽑는 문제에서도 달라지지 않겠어요?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이런 시각만 갖고 있어도 현상적으로 달라질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1996년도에 프랑스에서는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불법’(illeg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는 운동, “미등록 운동(sans-papiers [undocumented] movement)”이 일어났었습니다. 불법이라는 용어를 이주노동자에게 적용하면 그 사람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불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미등록(undocumented)’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문: 일종의 정치적 엄밀성(political correctness)을 표명한 것이군요? 그래서 동료인간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구요.   
강: 그렇지요. ‘불법’이라고 지칭하면 이미 그들이 범죄자라고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사회에 위협적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하지요. 하지만 ‘미등록’이라고 지칭하면 아직 등록이 되지 않았지만 내 동료라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요. 이것이 코스모폴리타니즘 시각입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독일에서 민족주의 사상이 부상하고 있을 때 ‘코스모폴리탄 권리’라고 하는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그 사람의 유명한 책이 『영구적 평화』(Perpetual Peace)인데 거기서 ‘누가 어느 나라에 속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 이 지구 표면 위에 거주하는 한, 모든 개별인간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 권리는 지역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자신이 살지 않는 곳에 가더라도 그 지역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을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환대를 요구한 것은 ‘코스모폴리탄적 환대’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군요.    
강: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한 것은 손님과 주인의 경계를 허뭅니다. 즉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환대란 환대를 베푸는 주인과 환대의 수혜자인 손님의 경계가 언제나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전통적인 경계를 완전히 넘어서요.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를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도 이러한 예수의 반(反)관습적인 환대의 실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예수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는 두 가지 행위만 했어요. 삭개오를 바라봤고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손님과 주인의 경계도 없어지고 종교적 정죄도 없이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 스스로를 초대합니다.     
삭개오의 행위 속에는 삭개오의 삶의 변혁의 주체가 삭개오임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회개하면 너의 친구가 되겠다’는 조건을 단 것도 아니고 그냥 바라만 보았거든요. 삭개오는 예수의 시선을 접하고는 아마 전율했을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그런 시선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난쟁이라는 천형으로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있었을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예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에요.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언어이지요. 예수의 말을 듣고, 삭개오는 나무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왜 그렇게 착취를 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성서를 읽는 것은 우리의 신학적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삭개오의 삶을 생각해 보지요. 당시에는 난쟁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평생 동안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사람취급 받지 못하며 살아왔겠지요. 아마 자기 가족들도 감추고 싶어 하는 존재였을 겁니다. 주변으로부터 그러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삭개오는 아마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었는데, 돌연히 예수의 시선을 접한 겁니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시선, 그래서 자신을 인간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그때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는 초청의 말을 듣습니다. 그 초청의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너를 동등한 인간으로, 동등한 친구로 삼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강남순 교수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 ‘코스모폴리탄적 환대’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말 번역에는 예수가 삭개오에게 반말을 하는데 삭개오는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는 ‘내려와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그러잖아요? 이러한 한글 번역은 존댓말과 반말이 존재하는 한국문화의 위계주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와 같은 언어에서는 반말, 존댓말의 구분이 없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낯설게 볼 필요가 있어요. 성경을 낯설게 보면서 새롭게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늘 여러 번역본을 참고해서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번역을 찾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예수와 삭개오 사이에 위계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매우 동동한 존재로 대화를 주고받는 광경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 속에서 삭개오가 자신의 삶의 변혁의 주체로 전환되는 사건을 봅니다. 예수는 그 변혁의 동인을 제공한 것이고요. 예수는 삭개오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았고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하면서 ‘내가 너를 친구로 삼겠다’는 의중을 표시했지요. 예수는 설교를 하지도 않았고, 회개하라는 정죄를 하지도 않고, 단지 이 두 가지 행동, 즉 “바라보고” 그 다음에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자신을 초대”하지요. 그런데 삭개오가 별안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개혁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의 이러한 연민의 시선, 삭개오를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시선을 “코스모폴리탄 시선”이라고 신학적으로 명명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조건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고귀한 얼굴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이 바로 그러한 시선 속에서 생겨나겠군요. 이웃사랑은 구제행위의 낭만적 개념을 넘어서는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듯이 들립니다. 물론 이웃의 개념이나 사랑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이웃사랑의 개념도 달라지겠지만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웃사랑은 최후심판의 판단 기준 
강: 교회에서는 이웃사랑을 구제와 동일시하는데 구제의 경우는 시혜자와 수혜자 사이의 윤리적 위계가 설정됩니다. 시혜자는 늘 윤리적으로 우월하고 수혜자는 열등하지요. 이런 식의 구제행위에서는 구제가 사회의 제도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를 보완하려는 행위라기보다 개인적 성격의 결함이나 게으름이 부각될 가능성이 큽니다. 코스모폴리탄적 이웃사랑은 구제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시혜자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구제 행위 자체가 시혜자가 당연히 해야 하는 책임이며 수혜자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 능력이 바탕이 될 때 구제의 시혜자와 수혜자 사이에 윤리적 위계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왜 생기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근원적으로 관심을 두고, 그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책임 있는 자세를 가지게 되지요.   
문: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별할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을까요?   
강: 마태25장에 보면 최후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최후심판의 6가지 기준이 제시되는데, 그 중에 종교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나그네를 맞아주고, 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간호하고,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아주는 일. 매우 일상적인 일들이지요. 예를 들어서 주일성수했는가, 십일조했는가 등의 종교적인 기준은 없어요. 교회에서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감옥을 방문하는 등의 행위가 통상적인 용어인양 익숙하지만, 이처럼 그런 일들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문제를 최후심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매우 혁명적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노동자들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한 예화(마태20:1-16)에서 제시되었듯이, 성과나 업적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필요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것도 전혀 자본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제 말은 이러한 일상 속에서 타자를 나와 동등한 필요를 느끼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일상성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이웃사랑이 예수 정도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타자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고 인식하기만 하면 행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문: 그 예화에서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공통적으로 지급했는데,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그것이 인간으로서 하루를 지낼 수 있게 만드는 자원이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포도원에 늦게 들어와서 일했다고 한 데나리온의 일부만 지급하면 굶게 될 것이니까 한 데나리온을 온전히 지급해서 굶주린 사람이 없게 했다라고 해석하라는 말씀이군요.  
 
강: 네, 그 예화를 읽고 21세기의 배고픈 사람은 누구일까를 재해석하고 재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놀랍게도 이것이 최후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최후심판 때 양과 염소를 구분했는데 염소 측이 ‘언제 내가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잖아요?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신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지요. 그래서 신을 느끼며 사랑하는 행위 자체는 바로 내가 그런 사람에게 행하는 일 속에서 신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하는 일 속에서 신을 느끼는 것입니다.  

문: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그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될까?’인 듯합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신들 중의 가장 작은 자들에게 베풀게 될까요?
  
▲현대 세계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강 교수는 단순히 교회에 등록했다는 것만으로 신을 사랑하는 것의 표징이 될수 없다는 지점에서 실제적인 이웃사랑의 의미를 찾아간다. 

강: 중요한 질문입니다. 해답은 사랑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기 사랑과 이기적인 것의 차이도 잘 몰라요. 그런데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알기란 더 쉽지가 않습니다.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를 봐야겠지요. 현대세계에서 이웃은 누구이며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는 매우 복잡한 물음입니다. 그저 단순히 구제행위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요한1서에도 나오는 바와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신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매우 중요한 신앙공동체이지만 그 교회에 등록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을 사랑하는 것의 표징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최후심판에서는 ‘헌금했는가?,’ ‘교인으로 등록했는가?’등의 질문이 없었습니다. 다만 주변에 다양한 배려와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푸는 책임을 다 했는가라는 질문만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이웃사랑, 타자에 대한 책임의 물음을 현대 21세기에 적용해 보자면, 전 지구적 정의(global justice)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지요.    
종교는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  
문: 사실 가장 작은 자에게 베푸는 관심이 사랑이라는 말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천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내저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나의 원수를 ‘가장 작은 자’라는 범주에 넣어 인식할 수 있으면 소위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해보입니다. 그런데, 원수가 과연 가장 작은 자로 인식이 될 수 있을는지는 의문입니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요. 
강: 맞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원수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종교를 불가능에 대한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식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느냐?’ 누구나 다 물어봅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예수의 사랑의 개념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성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종교란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이라고 봅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웃사랑, 원수사랑...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덜 악한 것, 어제보다 조금 더 정의롭고 덜 불의한 것, 어제보다 더 사랑할 것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불가능성의 축을 하나 갖고 있고 가능한 영역을 조금씩이라도 넓히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문: ‘그 불가능성을 늘 참조하면서 가능성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강: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과 갖고 있지 않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지요. 이런 마음을 갖고서 투표를 할 때 결과도 달라지고 신문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NGO를 후원하는 태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등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조금 전에 언급하신 고용허가제의 퇴직금 수령기한 이월에 대한 규정은 인권의 박탈이지요. 퇴직금은 노동자의 권리이며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가인데 야비하게 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온전히 대변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퇴직금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임재는 우리가 타자를 보는 시선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즉, 어떻게 그들을 바라보고 어떻게 그들과 연계하느냐에 의해 신에 대한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런 시각을 끊임없이 갖고서 누구라도 ‘자신은 할 일 다 했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끊임없이 내 책임성은 무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으니까 어떡하면 나의 이 제한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문: 그렇군요. 계속 말씀하셨지만, 종교인들에게는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신앙을 ‘열정을 통해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하고 계시는 군요.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강: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거스틴이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What do I love when I love my God)?” 이 질문은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지요. 사실,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를 요구하는 질문은 “나쁜” 질문이라고 저는 명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을 통해서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하나님을 사랑하세요?’라는 질문에는 단순히 예 또는 아니오라는 답변만 가능하지요.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성찰할 여지를 주지 않아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 질문을 돌려서,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로 묻습니다.    
▲강남순 교수는 이웃에 대한 편협한 사랑을 경계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지를 확인하고 있다.
제가 하나님을 ‘신’으로 바꾸는 이유는 다른 종교에도 절대자의 개념들이 있으니깐 조금 더 보편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질문에는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없어요.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별안간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소수자와 같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행위들을 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지요. 또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가서는 십일조도 잘하고 소위 주일성수도 잘하지요.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그런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어거스틴이 씨름한 물음,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성소수자들을 지옥가라고 저주하고 정죄하는 것—그것은 인간이 신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과 같아요. 최후의 심판과 정죄는 인간이 아닌 신의 역할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사실 ‘내가 나의 하나님 사랑할 때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속 정죄하고 증오하는 일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자문해볼 때,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열정을 지속시키는 방법이 있는지요? 교수님께서는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참조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참조하게 만드는 열정은 무엇이 만들어내는 것입니까? 혹시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기준대로 살지 않으면 심판 받아’라고 말하면 그런 열정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요?   
강: 그러한 종교적 협박에 의하여 신앙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사실상 신앙이 왜곡되고 말지요. 대신에 저는 시선이라는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진정으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얼굴을 보라고 합니다. 얼굴을 보면 이 세상 72억 명 각각 다른 모습을 띠고 있잖아요? 얼굴은 소유에 저항합니다. 즉,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정말 이 사람도 신의 형상으로 만든 존귀한 존재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그런 시선이 생겨야 위선적이지 않은 진정한 연민을 갖게 되지요. 연민이 영어로 compassion이잖아요? compassion은 com+passion으로서 원뜻은 ‘고통을 함께 한다(suffer with)’는 의미이지요. 연민의 시선을 가지고 그 사람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 예수가 인간과 고통을 함께 하듯이. 예수의 연민의 시선을 배우려는 마음이 그 열정의 씨앗입니다. 
제가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쓴 글 중 하나가 “침묵하는 신”이었습니다. 신이 이 고통의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구해내면 참 좋겠지요. 아마 그렇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신나서 ‘기독교의 신이 구해줬다’라고 외치겠지요. 그런데 신은 침묵해요. 그러면 이러한 인간의 고통의 현장에서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묻게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답은 ‘신은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위로하는 신. 우리는 그것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저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 이렇게 설명을 하신 분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이기적인 신앙을 가르친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개 교회에 가는 사람이나 절에 가는 사람이나 굿하는 사람이 똑같아요. 자기 복 받고 애들 대학 잘 가게 해달라고 빌죠. 차이가 없어요. 그런 매우 이기적인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에 사실상 신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페이스북에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신의 이름으로 타자를 정죄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실 이웃사랑의 가르침을 준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거든요. 예수는 용서할 수 없을 때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웃 사랑을 끊임없이 하라고요. 정죄는 유한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6가지 최후심판의 기준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에 이웃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는 합니다. 근원적으로 예수가 타자를 보는 시선을 닮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예를 들어, 거리의 노숙자를 보면서도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라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떻게 저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내가 다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저 사람도 하나의 고귀한 인간인데...’라는 시선을 갖는다면, 똑같이 동전을 줘도, 똑같이 교회가 그 사람들을 위해 일하더라도 그 사람을 동료 인간으로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시혜자처럼 우월한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 인간으로서 연민을 가지고 베풀면 똑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그 사람이 다르게 자기를 보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교회가 자꾸 이야기하고 설교하고 새롭게 상기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불가능성을 참조하면서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과정이며 이웃사랑의 과정인 것이지요.(계속) 
 
[대담= 이인기 편집국장, 정리= 이가람·백결 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재학), 사진= 지유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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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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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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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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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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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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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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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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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