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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영 칼럼] 밤의 감흥 가운데서 자라는 희망

하태영 목사·삼일교회(기장)

▲하태영 삼일교회(기장) 담임목사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삶의 밤이 있고 낮이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고 싶은 밤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저녁은 해의 밝음이 가고 밤의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명암의 교체만으로도 저녁은 특별한 감흥을 준다. 또 이 감흥에는 더욱 지적인 인식이 스며있다. 저녁 시간은 하루의 끝이다. 그것에 주의하는 것은 하루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하나로 포착하는 것이다. 저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감흥과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외면화된 삶에서 귀중한 것은 이와 같이 작은 내면성의 깨달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갖가지 문제들을 짧지만 깊이 있게 설파해온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자기가 선택하는 삶’(08. 2. 13. 경향)이라는 칼럼 가운데 한 토막입니다. 외면의 세계만을 향해 치달리고 있는 오늘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그의 글이 아니더라도, 성서는 낮의 시간보다 밤의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하루의 시작이 아침이 아닌 저녁부터인 것이 그렇고, 인생의 새로운 시작인 혼례를 낮이 아닌 저녁에 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성서에서 낮은 단정히 행해야 할 시간이지만, 밤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마태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기까지의 시간을 밤(어둠)으로 묘사했던 것(마 27:45)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밝음의 시간만을 지향하고 어둠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젊은이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도, 혼기를 맞이한 이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심지어 자기 내면의 세계를 가꿔야 할 종교를 선택하는 데도 밝음의 시간에서 본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생각해보면 밝음만 알고, 어둠을 모르는 사람은 삶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기 십상입니다. 
연전에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아문학포럼에서 일본의 중견 작가 시마다 마사히코가 한 말도 새겨볼만합니다. 작가는 이제 존경받는 지식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캐릭터로 변했다며, 작가는 자신의 진실에 충실한 사람이기보다는 세상의 눈치 속에서 자신을 성형(成形)해가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눈치 속에서 자신을 성형해가는 존재. 물론 딱히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광범위하게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계화된 시장논리 가운데서 개개 인간의 소박한 삶은 여지없이 뭉개집니다. 게다가 일확천금을 부추기는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허황되게 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은 세상살이는 큰 것에 기대야만 살 수 있도록 사람들을 몰아붙입니다. ‘큰 것’이란 자연히 큰돈이거나 큰 힘일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시류(時流)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큰 것에 기대야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류에 민첩하게 영합해야 합니다. 자신을 눈치껏 성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진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판타지를 끊임없이 끌어내야 합니다. 작가가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익명의 독자를 위해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허구적인 재미를 제공하듯이, 개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비쳐지는 모습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세상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랑 받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거나 위장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세상에서 사랑 받는’ 것의 화려함 뒤에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위선과 가식과 몰인정 그리고 때로는 비극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랑 받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가을은 우리가 평소 망각하고 지낸 어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무성한 잎이 낮이라면, 지는 낙엽은 어둠일 터. 낮의 감흥은 돈으로 살 수 있으나, 밤의 감흥은 돈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구나 쉽게 말하는 희망은 낮의 감흥이 아닌 밤의 감흥을 아는 이들에게서 자라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이 글은 공동체성서연구원이 발간하는 『햇순』 (통권225호, 2014년 11월)에 실렸으며 저자의 허락을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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