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상철 칼럼] 관점, 상상, 그리고 믿음

<십계>와 <이집트 왕자>를 경유하여,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의 신학적 관점

성경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때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은 무엇일까? 예수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제외하고 그 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것을 고르라면 단연 모세의 출애굽 관련 내용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출애굽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그간 심심치 않게 제작되었다. 찰턴 헤스턴이 주인공 모세로 나왔던 <십계>(1956),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톤이 함께 부른 OST ‘When you believe’로 유명한 에니메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1998) 역시 출애굽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번에 개봉한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는 구약성서 속 ‘출애굽기’를 뜻하는 영어 Exodus를 그대로 영화제목으로 사용한 케이스다. 구약성서는 세 종교, 즉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이슬람이 공히 받드는 경전인데, 순서상 제일 먼저 창세기가 나오고,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책이 바로 출애굽기(出埃及記, Exodus)다. ‘애굽’이 한자어로 이집트를 뜻하는 말이니, ‘출애굽기’는 풀이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헐리우드는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모세를 소환하여 다시 무대로 올리는 것일까?  
왜, 다시 모세인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의 한 장면. ⓒ스틸컷

‘엑소더스’라는 말에는 일종의 주술적 의미가 깃들어있다. 서구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그 무엇을 의식의 차원으로 호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자유(Freedom)다. 프랑스 혁명의 구호들(자유, 평등, 박애)로 요약되는 근대적 가치들 중에서 자유는 더 이상 초월적 실재에 의해 포획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근대적 주체가 지녀야하는 덕목이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난 다음에서야 주체는 비로소 세계와 현실을 자신의 시선과 해석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오죽하면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엑소더스’는 ‘자유’에 대한 이러한 서구인들의 집단무의식을 기억하게하고 재생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유와 해방의 원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의 모든 숭고한 소재들이 그것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엑소더스’처럼 주기적으로 영화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에 비해 성서 속 출애굽기 안에는 영화 흥행의 필수요소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말인데, 예를 들면, 출생의 비밀, 스펙타클, 증오와 복수 같은 요즘 유행하는 극영화의 기본문법들이 그것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엮는 강력한 내러티브가 없었다면 성서 속 모세 이야기는 사장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대서사의 논리에 입각한 영웅담’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엑소더스’ 안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한 인간이 신과의 접신을 통해 슈퍼맨으로 변신하여 결국에는 기적과 같은 역사를 이루었다’는 강력한 환타지가 있다. 헐리우드는 이런 모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매 시대마다 당대와 관련된 강력한 서사와 대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찾아왔고, 이번에 개봉한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역시 그 법칙에 충실하다.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의 한 장면. ⓒ스틸컷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기에 관해서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출애굽 시기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홍해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호기심까지 실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출애굽의 주체인 히브리인들에 대한 해석도 혈통적 의미의 유대인이 아니라, 당시 이집트 및 근동 지역에서 체제로부터 배제되어 떠돌아다니던 민중을 일컫는 ‘하피루’(hapiru)라는 말에서 ‘히브리’가 유래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 사건은 인류역사에서 최초의 집단적 민중봉기 사건으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출애굽의 방식도 영화에서와 같이 60만 명이 한꺼번에 이집트에서 나왔다는 주장에서부터 몇 차례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출애굽을 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이렇듯 출애굽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출애굽 사건을 뒷받침할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나 그에 걸맞는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관련 내용과 영화상에서 드러나는 그것과의 차이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별의미가 없어 보인다.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이 분야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할 말이 없다. 아마도 그 분야 전문가들이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영화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이미 친절하게 해설해놨으리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신학을 전공한, 그리고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도모하고자 하는 나는 2014년 헐리우드의 극영화 <엑소더스>를, 그리고 그 안에 배치되어 있는 21세기 모세를 어떤 시각으로 관전해야 하는 걸까? 이러한 물음을 갖고 얼마간 고민을 하다가 나는, <엑소더스>에 나오는 모세의  캐릭터를 다른 모세 관련 영화와 비교하면서 시대마다 달리했던 모세의 초상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각 시대에 대한 징후적 독해도 가능할 것이고, 모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말이다.  
모세에 대한 초상(肖像)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의 한 장면. ⓒ스틸컷

뭐니뭐니해도 성서 속 출애굽 사건을 영화한 것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찰턴 헤스턴이 모세로 나왔던 영화 <십계>다. 학창 시절에 단체관람 가서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는데, 홍해가 갈라지던 장면에서 보였던 모세의 카리스마가 압권이었다. 영화 <십계>는 1956년 헝가리의 소련에 대한 항거가 진압되던 해에 만들어졌다. 2차 대전 이후 미ㆍ소의 냉전체제가 확립되고, (미국 입장에서) 소련의 패권주의가 확인되던 그 무렵이었다.   
반면, 에니메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8년에 개봉되었다. 1998년은 소련으로 대표되는 현실 사회주의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던 해였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비록 많은 갈등과 저항들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을 하나씩 완성해 가던 무렵이었다. 이렇듯 두 영화 사이에는 시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물심양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 차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탈이데올로기 시대로, 거대서사의 시대에서 작은 이야기들을 발굴하는 시대로,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저마다 논평을 한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출애굽 관련 영화 속 주인공 모세는 이러한 시대상의 투영이라 할 만하다. 특별히 <십계>에서 모세역을 담당했던 찰턴 헤스턴은 람보, 코만도, 록키 등 냉전시대 헐리우드 근육질 영웅들의 조상쯤 되지 않을까 싶다. 강철과 같은 의지와 불같은 추진력으로 악의 무리를 때려 부수는 불패의 영웅 말이다.   
한편, <이집트 왕자>에 등장하는 모세는 외형적 조건에서부터 찰턴 헤스턴과 대조적이다. 야리한 체격과 촉촉한 눈망울하며 어느 모습하나 혁명을 완수할 전사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1956년판 모세는 출생의 비밀을 안 다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변신하기 시작했지만, 1998년판 모세는 출생의 비밀을 알자 도망을 갔고 신탁을 받고도 주저하는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실제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묘사된 신탁관련 기사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를 보면 모세가 신탁이 내려진 이후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세와 람세스와의 역학관계를 그리는 대목에서도 <십계>와 <이집트 왕자> 속 서로 다른 모세의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십계>에서 모세의 상대역 람세스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대머리 배우로 유명했던 율 브린너였다. 찰턴 헤스턴과 율 브린너의 관계는 처음부터 팽팽했고 대화의 상대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마치 1956년 당시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집트 왕자> 속 모세와 람세스의 관계는 함께 궁궐에서 자라면서 유년기 추억을 공유하며 형성된 일종의 형제애 내지 우정 같은 것이 깔려 있다. 아(我)와 피아(彼我)간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여러 갈등이 등장하지만 단선적인 해석의 잣대로 해명되지 않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관계법칙이 1998년에 제작된 <이집트 왕자>에는 깔려있는 셈이다.
홍해와 요단사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었다. 백성들을 이끌고 바다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신을 향해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낙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십계>에서는 찰턴 헤스턴이 성경에 적혀있는 것처럼 모세가 되어 바다 위로 팔을 내밀자 바닥이 말라서 드러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로 난 마른땅을 밟고 지나갔다. 하지만, 영화 <엑소더스>에서는 모세가 팔을 바다 위로 내밀지도 않았고, 마른 땅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흐르는 물을 향해 발을 내 딛는다.   
성서에 보면 출애굽 과정에서 크게 두 군데에서 물을 건너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홍해를 건너는 장면은 출애굽기 14장에 나오고,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은 여호수아 3장에 나온다. 홍해를 건널 때의 주역은 모세이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모세는 사라지고 모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성의 주역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엑소더스>의 한 장면. ⓒ스틸컷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다시 한번 회상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갈라진 것을 보고 강을 건넌다. 반면, 광야 생활 40년 후 요단강을 건널 때는 사람들이 물이 갈라지지 않았는데도 먼저 흐르는 물을 향해 사람들이 몸을 맡긴다. 전자는 어떤 표징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행위가 있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기적이나 징표를 보고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먼저 있었고, 물이 말라 기적적으로 땅이 갈라지는 현상은 그 행위 다음에 나타난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인식론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종교적 진화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리에게 이제는, 신의 표상 따위는, 신의 감언이설 따위는, 신의 유혹과 협박 따위는, 우리에게 이제는 신의 권위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런 표피적인 것이 없어도 우리의 신앙은, 그런 즉물적인 것이 없어도 우리의 신을 향한 확신은 변함이 없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고 싶다. 
영화 <엑소더스>에서는 홍해를 건널 때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장면을 재현하지 않고, 여호수아기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홍해를 건너는 장면과 겹치게 만들었다. 성서적으로는 맞지 않다. 물이 갈라지고 난 이후에 물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흐르는 물을 향해 먼저 들어가고 난 다음에 물이 갈라지게 한 것이다. 아직 마른 땅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퍼런 바다가 우리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실의 문제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무런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흐르는 시퍼런 바다를 향해 몸을 맡긴다. 그러면서 그들은 새 역사를 스스로 창조해 갔고,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신을 마침내 쟁취해낸다.    
에필로그: 신을 만나는 자리, 혹은 신이 오는 자리
영화 <엑소더스> 속 람세스는 바다를 향해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적하는 도중에 맞닥뜨린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묻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확신한다! 이쪽이다.” 람세스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같은 시각 모세가 앞을 가로 막는 바다를 바라보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절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모르겠습니다”와 “나는 확신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종교적인 언어일까? 우리는 흔히 선(善)의 반대말을 악(惡)이라 말하지만, 악을 현실에서 구분해 내기란 만만치 않다. 어쩌면 악은 우리의 현실에서 ‘절대’라는 이름으로 살아있지 않나 싶다. 그것이 종교적 확실성이든, 이념적 맹목성이든 간에 인류가 저질렀던 모든 만행과 학살과 광기는 영화 속 람세스가 했던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절대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 아닐까?   
이제 글의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에필로그 제목을 ‘신을 만나는 자리, 혹은 신이 오는 자리’라 이름 붙였다. 문득, 이 대목에서 영화 속 모세가 산에서 신을 만나는 장면이 떠오른다. 성경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있는 야훼를 만났다고 적고 있다. 영화 <십계> 속 찰턴 헤스턴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신을 만나겠노라고 하면서 산으로 오르지만, 2014년 모세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산을 헤매다가 얼떨결에 신을 만난다. 일상의 고된 노동의 현장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신을 만났다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그것초자 신의 섭리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실에 뿌리박은 자신의 남루한 삶을 거역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았던 모세가 그 삶속에서 신적 원리를 발견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즉,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자리는, 신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내가 그 음성을 듣겠다고, 내가 그 신을 보겠다고 해서 찾아지거나 획득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람세스가 한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발언은 신이 오는 통로를 가로막는 바리케이트와 같다. 신을 만나는 자리는, 혹은 신이 오는 자리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실존적인 고민을 갖고 몸부림치는 여린 영혼이 위치한 그곳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단한 현실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이 서 있는 자리이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곳이 신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고, 바로 그곳으로 신은 찾아온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데...  
추신>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원고 넘기기 전에 첨부한다.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엑소더스>에서 모세 역을 맡았던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이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십계>의 찰턴 헤스턴 모습과 닮아가는 것이었다. ‘혹, 이 영화가 냉전시대의 영웅을 그리워하는, 전 지구적으로 수퍼파워를 행사하고 싶어 하는 미국의 집단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영화 보고 나서 집으로 오면서 살짝 불쾌했다. (참고로 나는 미국에서 10년 살다가 2014년 7월에 귀국했다. 미국은 능히 그럴 수 있는 나라다!)    
*본 글은 ‘씨네21’(NO.983, 2014.12.9.-12.16. /52-53쪽;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8721)에 실렸던 기사의 작가판 원고다. 웹진 <제3시대>에 재수록된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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