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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11 복음주의가 보는 근대: “자기도취”

정재현의 신앙성찰

▲정재현 연세대 교수. ⓒ베리타스 DB
1.  복음주의/배타주의(2) 
근대 사상가들을 ‘문화의 노예’라고 했던 맥그래스는 이이서 제퍼슨, 하르낙을 언급합니다. 그는 이들에 대해서는 “둘 다 똑같이 연구자의 선입견이 연구 결과를 결정했다”(34)고 평가합니다. 이러한 식의 비판이 반복해서 나오다가 다음의 구절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이러한 접근에는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가 내재되어 있다. 즉, 그것은 자신의 모양(likeness)을 숭배하려는 욕망이다”(34). 물론 근대성에 대해 ‘자기도취’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면 적절하기도 합니다. 근대정신을 특징짓는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취하는 대상화란 주체의 의도와 능력에 따라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니 엄밀하게 말해 주체화적 대상화이며 이는 곧 타자의 자기화이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알기 어려울 때에는 심지어 타자에 이름이라도 붙임으로써 자신의 방식으로 타자를 길들입니다. 이 방식이 극대화된 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당연하고도 불가피하게도 타자의 자기화는 나르시시즘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불안하여 견디지 못하니 잘라내고서라도 자기화로 몰아가면서 나르시시즘에 이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근세는 결국 인간중심주의로 기울어졌고 급기야 인간의 신격화라는 비판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상적인 실험들은 그러한 나르시시즘의 몽상을 깨는 작업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앎의 주체로서 인간이 벌여내는 짓거리인 자기도취적 성향에 대한 맥그래스의 비판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맥그래스가 ‘자기도취의 시대’라고 비판하는 근세는 인간의 인식행위인 ‘앎’에 주목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앎’이란 앞선 고중세 시대가 신을 말하던 틀과 꼴로서의 ‘있음’에 대한 것입니다. ‘있음’이 그대로 새겨졌다면 굳이 ‘앎’에 주목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있음이 그대로라기보다는 앎에 담기는 대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앎의 주체로서 있음에 대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 사조가 신학에 적용되면서 그 초점이 신으로부터 신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고중세 시대에는 신론이 한창 발전했지만 근세에 와서는 신론 대신 신앙에 관한 논의가 펼쳐졌습니다. 즉 인간으로 초점이 전환된 것입니다. 인간이 앎의 주체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불가피했습니다. 인간의 자기이해가 그렇게 달라졌으니 신에 대한 논의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神)에서 신앙(信仰)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이를 말합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신앙에 관한 논의로 전환된 후 나타난 사조는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사조인 정통주의, 경건주의, 자유주의입니다. 16-17세기는 정통주의가 지배적이었고, 17-18세기는 경건주의, 18-19세기는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흐름이었습니다. 한 세기씩 겹치는 이 일련의 흐름은 지성, 감정, 의지라는 정신요소를 축으로 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통주의는 지성에 뿌리를 둔 신앙 유형이라면, 경건주의는 감정에서 우러나는 믿음 형태이며, 자유주의는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처럼 앎이 정신요소에 따라 지성과 감정, 의지로 갈라지면서 그렇게 신앙에 대한 사조를 엮어낼 정도로 앎이 주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다고 하늘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발버둥 친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구조의 불가피성을 새기는 것과 이를 근거로 인간이 둘러싼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은 전혀 다르지요. 그리고 실제로 전자에 머무르지 않고 후자로 뛰어들은 사례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맥그래스가 근대정신을 자기도취라고 비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맥그래스가 근세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어떻게 비판하는가요? 근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식주체이게 하는 이성과 의지가 발현하는 도덕 윤리에 맞추어 예수의 인간성을 그려냈다고 비판합니다. 근세에는 이 기준에 맞추어서 성서에서 전해지지 않는 그림을 그려냈고, 예수의 생애를 복원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 18세기에 나오지 않았나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의 결론은 무엇인가요? ‘모른다’였습니다. 탐구불가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완전한 인간상을 그렸습니다. 이성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 도덕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선 등 온갖 가치의 정점을 설정한 뒤 예수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려냈습니다. 나사렛에서 BC 4년에 태어난 그 인간, 그 특수하고도 개별적인 인물과는 별도로 이미 완전한 인간이라는 틀이 짜여집니다. 이 틀은 인간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입니다. 그 희망사항이 점차 심화되고 고조되면 당위의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즉 희망이 당위가 됩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인간정신의 세 요소 중 근대정신을 가장 크게 지배한 것이 바로 의지였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전시대에서의 의지는 죄에 대한 신정론적 설명의 근거로 사용되는 부정적 의미를 지녔지만, 근세의 의지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그 가치와 위상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근대인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여긴 당위가 BC 4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란 존재에 투영되고 이제는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위상을 덧입습니다. 희망에서 당위를 거쳐 현실에 이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주체로서 대상을 주관적으로 그리니 결국 대상에 대한 직접 경험이기보다는 앞서 선험적으로 그린다는 것입니다. 주관, 선험, 대상이라는 이 시대를 결정짓는 요소들이 희망을 당위로, 나아가 당위를 현실로 이어가도록 그렸습니다. 맥그래스는 이런 근세의 이야기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모더니즘의 근본 주제는 통제하려는 욕망이다. ...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를 자율적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뿐이다”(35).  
‘통제,’ ‘자율,’ ‘의지’라는 말, 이 모두가 근세의 언어입니다. 이는 각각 포괄주의의 요소들인 ‘대상화,’ ‘주관,’ ‘선험’과 맞아 떨어집니다. 실제로 포괄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저 용어들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저 셋이 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상사에서 초시공적으로 자체, 실체, 객관을 강조했던 고전적인 그림에서는 저 셋이 별다른 위상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완성된 형이상학적 그림이 좋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이 이 땅, 이 시간을 사는 인간과 연결이 안 되자 이 그림이 뒤집어지고서는 인간이 전면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통제, 인간의 자유, 인간의 의지가 부각됩니다. 맥그래스는 근대를 이끄는 과학기술이 그 견인차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과학 기술의 출현은 서구 문화에서 ‘지배’라는 주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서양 철학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니체의 저작에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니체의 철학은 서구 사상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내 맘대로 할 거야” 라는 풍조가 가득한 문화적 환경을 만드는 데 적잖게 일조하였다. ... 니체에게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38).  
이 문장은 짧지만 근세에 관한 맥그래스의 입장을 잘 드러냅니다. 그는 앎이 없이 있음 그대로 신이 새겨질 수 있고 또한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말하자면 ‘무엇’ 물음에 대한 대답 하나로 충분한데 근대인들이 ‘어떻게’를 들이댄 것이 갈래로 쪼개고 뒤흔드는 것으로 보여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 ‘있음’ 그대로 예수도 보고 복음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세 전기에는 앎의 주체가 등장하여 믿음의 꼴을 엮는다 하니 그대로의 하나님이라는 구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도 과학기술이 앞서 이를 부추기니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그대로의 신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맥그라스가 근세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배’라는 말과 ‘해석’이라는 말이 같은 맥락에서 한데 묶여 취급되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지배’는 근세 언어이고 ‘해석’은 현대 언어입니다. ‘지배’와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인식’입니다. 인식은 앞서 말한 대로 주위 세계를 앎의 주체가 취하는 대상으로 보고 주체의 방식으로 새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다분히 지배의 생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고 자기화가 가리키는 것처럼 자칫 자아도취에 빠질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석은 인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해석에 대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나올 때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런데 해석을 지배와 이으니 맥그래스가 인식과 해석의 차이를 외면하고 나아가 근세와 현대도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도 여기서 좀 더 깊이 살펴야 하는 것은 사실과 해석의 관계입니다. “니체에게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 명제는 엄청난 분석을 필요로 하는 말입니다. 해석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자세히 다룰 기회가 많이 있겠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사실’에 대한 이야기만 간략하게 하고 넘어 갑시다. 단도직입적으로 맥그래스에게 묻습니다. 그렇게도 믿을 수 없는 해석과도 다른, 아니 해석에 앞선, 아예 해석이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사실은 이미 ‘사실’이고 더욱이 ‘해석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데에 조금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다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성찰인데 ‘있음’만 붙잡으려는 무의식적 존재성향 때문에 안타깝게도 도무지 이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꾸준하게 할 터인데 우선 시작하는 마당에 이 정도만 해 둡시다.  
또 하나, 짚고 가야 할 것은 “내 맘대로 할 거야”라는 풍조비판입니다. 이 역시 자아도취적 성향을 지닐 수도 있는 근세의 인식구조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맹점을 성찰한 현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도 역시 고전형이상학의 눈으로 이후 시대를 보니 근세와 현대 사이의 혁명적 전환이 시야에 잡히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혹자는 “내 맘대로 할 거야”라는 근세문명에 대한 조소적 표현이 인간의 욕망에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성찰을 위한 화두로서 욕망이라는 것이 근세에는 아직 전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체의 통제, 자율, 의지의 기저에 있는 무언가가 욕망임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그 이후에, 즉 현대였습니다. 삶을 보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물론 죽음과 얽힌 삶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죽음과 얽힌 삶을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앎의 주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저리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맥락에서 욕망이 등장합니다. 욕망은 의지와는 매우 다릅니다. 근세 언어인 의지는 인간이 주체로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의 근거가 됩니다. 잘난 주체의 기질이고 요소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인간이 어찌 해 볼 수 없이 오히려 인간을 몰고 가는 힘입니다. 마치 ‘등 뒤에 꽂힌 칼’ 같아서 그것이 이끄는 대로 몰려갑니다. 다만 인간이 그러한 욕망과 다소간의 조율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의지를 행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욕망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잘난 주체’일 수 없습니다. 이게 근세와 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앎의 주체인 인간은 그저 단순히 ‘누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얽힌 삶을 사는 사람은 더 이상 그저 단순히 ‘누가’일 수 없습니다. 이제 죽음과 얽힌 삶을 사는 ‘누가’는 그저 ‘누가’가 아니라 ‘언제/어디서’ 안에서 살면서 바로 이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누가’입니다. 현대인의 자화상에 관한 이야기이니 본격적인 논의는 필요한 대목으로 미루겠지만 하여튼 “내 맘”이라는 말은 근세적 의지의 언어일 수는 있지만 현대적 욕망의 언어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묻건대, 과연 누가 내 맘대로 하고 있는가요? 복음주의자(배타주의자)일까요? 포괄주의자일까요? 다원주의자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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