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타스

[데스크시선] 내 손 안에 있는 진리

입력 Dec 07, 2015 09:16 AM KST
▲단지 도구에 불과한 내 손 안에 있는 핸드폰 같은 것이 어느새 나 자신을 규정하는 목적이 된다. 주객의 전도다. ⓒ베리타스 DB 


요즘 출퇴근 때 늘 목격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전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고개를 15도로 숙이고 이마에는 내천(川)자를 그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어떤 사람들은 전자책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가십거리를 탐독하고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증권시황을 검색하고 어떤 사람들은 게임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카톡을 주고받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온라인쇼핑을 하고...하고 있는 일은 모두 다른데 자세는 거의 동일하다. 그 집중력은 옆에서 감히 말을 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배나온 중년 남자가 임신부들을 위해 핑크색으로 구분해놓은 좌석에 앉은 사실도 까마득히 잊은 채 줄곧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핸드폰에 집중하는 이 모습은 전철을 내린 뒤에도 이어진다. 핸드폰을 보며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의 어깨를 치는지도 모르고 지나가는가 하면, 갑자기 서는 바람에 뒷사람이 부딪히기도 한다.  

이렇게 핸드폰에 몰입하는 사람들의 시야가 좁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동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 무엇에도 기댈 것 없다는 표정으로 주름살 사이사이에 하루의 노고를 채우고 있는 백발노인이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임신부나 사회적으로 보호해야할 사람들을 위한 분홍색 경구를 읽지 못한다. 심지어 누가 앞에서 다가오는지도 볼 수 없어서 타인에 대한 민폐의 수준을 넘어 자신을 위험하게까지 만들기도 한다. 이 정도면 핸드폰이 사람을 통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체가 자신이 소유한 대상에 구속되는 것이다. 소유란 통제가능성을 전제하지만, 소유대상에 대한 몰입은 그 주체를 이처럼 대상화해버린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객전도는 오늘 한국의 전철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고 현재 한국교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한국교계가 몰입하는 핸드폰은 그들이 손 안에 쥐고 있다고 믿는 ‘진리’이다. 그들은 소위 진리의 형상을 도구로 소유함으로써 그것에 몰두하고 그로 인해 존재와 대상이 역전되는 현상을 노정한다. 그 진리의 형상이 존재를 구속하는 것이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진리’로 설정하고서 그 규정에 따라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안식일의 정신을 훼손하면서도 세리 및 죄인들, 그리고 이들과 어울리는 예수를 비하하고 급기야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태도는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나의 논리와 다른 것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짓밟고,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일 뿐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공표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교계에서 ‘진리’를 근거로 돌출행동을 저지르는 경우는 개인을 넘어 교단차원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한번은 한국교계의 장자교단이라 자부하는 한 교단의 총회에서 가톨릭의 이단성을 심사하겠다는 결기찬 발언을 한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다. ‘장자교단’으로서의 교세를 손에 쥐고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손에 쥐고 있는 교세에만 몰입했기에 나온 발상이다. 개신교의 역사, 가톨릭의 내부개혁에 대한 몰이해,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사회의 시선 등은 그 어느 것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있기에 나온 발언이다. 그리고 교묘한 논리로 대형교회 목회자의 비리와 교회의 세습과 역사해석의 국정화를 옹호하는 그룹들은 ‘진리’에 몰입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한국판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쥐고 있는 ‘진리’가 핸드폰 정도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에도 그것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전단한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루소가 그랬던가?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은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다고(『에밀』). 이 말에서 ‘아는 것이 적은 사람’이 문젯거리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학문의 적음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에게 진리인 것은 남에게도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진리란 손 안에 쥐고 휘두르는 무기가 아니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앎이 적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거울이며 그 깨달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게 하는 동력이다. 이 힘을 따르는 것이 앎을 키우는 길인 것이다. 내 손 안에 든 핸드폰으로는 이 진리를 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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