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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13 복음주의가 보는 다원주의: 동질화
정재현의 신앙성찰

입력 Dec 09, 2015 03:32 PM KST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베리타스 DB
1.  복음주의/배타주의(4) 

이제 5장으로 넘어갑시다. 5장의 제목은 ‘복음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이 장 제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종교다원주의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자유주의적 정치 의제에서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는 관용에 관한 본질상 정치적인 판단에서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신학적인 선언으로 슬그머니 이동하는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의 종교 외에 다른 종교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전적으로 지당하고 용납할 만한 요청에서, 다른 종교들을 모두 같은 것으로, 혹은 ‘궁극적인 신적 실체’에 대한 똑같이 타당한 표현으로, 혹은 공통적인 구원에 이르는 똑같이 타당한 방식으로 취급하라는 더욱 급진적인 요청으로 나아가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가? (223) 

이렇게 지적한 뒤 논의를 좀 더 세세히 하기 위해 ‘기술적 다원주의’와 ‘규범적 다원주의’를 구분합니다. 
삶의 현실로서의 다원주의와 이데올로기로서의 다원주의, 즉 다원주의를 장려하고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과 규범적인 진리를 천명하는 일 ... 전자는 논쟁의 소지가 없다. 그런데, 전형적으로 규범적 다원주의자들은 전자의 당위성을 슬그머니 후자에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의 논의에서는 전자를 ‘기술적 다원주의’라 하고, 후자를 ‘규범적 다원주의’라 부르겠다. (224)  

‘기술적 다원주의’는 다종교상황이라는 현상을 단순히 분석하고 서술하는 입장입니다. 즉, 현실적으로 이미 여러 종교들이 혼재하고 있음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규범적 다원주의는 여러 종교들이 공존, 혼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의 다수성, 다양성과 그 개별적인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맥그래스는 이렇게 다원주의를 구별한 후 기술적 다원주의는 단순묘사이니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규범적 다원주의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왜 규범적 다원주의는 그럴까요?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맥그래스가 5장에서 말하는 다원주의는 여러 형태의 다원주의들 가운데 초기 다원주의, 즉,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다원주의입니다. 앞에서 말했듯 이것이 다원주의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원주의는 서구 그리스도의 배경에서 시작했지만 비서구 그리스도교권으로 확장되었고 나아가 비서구 비그리스도교권과의 대화를 통해 더욱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굳이 그 안에서도 가르자면 이렇게 셋인데 이들의 주장이 각양각색입니다. 
가장 앞서 등장한 서구 그리스도교 다원주의가 규범적 다원주의를 주장하는데 심각한 맹점에 빠집니다. 여러 종교들을 꼭 하나로 묶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시작에서 같든, 끝에서 같든, 어떤 방식에서든지 같고, 더 나아가서 ‘하나’로 엮어내려 하는 것입니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일원성에 대한 지향성, 동일에 대한 지향의 집요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원주의를 말해봤자 모양새는 일원성에 대한 집요한 지향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러 종교들의 시작이 같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은 존 힉입니다. 그에 따르면 여러 종교들은 하나로부터 발원하여 여러 문화와 역사, 전통 속에서 다양한 종교로 갈라졌습니다. 이를 신 중심적 다원주의라고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다양한 종교들의 종착지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구원 중심적 다원주의라고 하는데 이 흐름을 대표하는 사람은 존 캅입니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신학과 접목시킨 과정신학의 대표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과정철학과 신학을 접목시켜서 보니까 이 세계의 실재뿐 아니라 신까지도 고정적 실체라기보다는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구도에서도 여전히 하나로 귀결시키려는 성향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를 구원과 연결하면 구원에서 하나로 모이고 하나를 이룬다고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함께 살핀 바와 같이 이러한 다원주의들은, ‘하나’에서 시작하든, ‘하나’로 끝나든 ‘하나’가 결정적인 가치를 갖습니다. 그래서 이를 ‘일원적 다원주의’라고 부릅니다. 표현이 마치 ‘둥근 사각형’처럼 모순개념의 조합인데 현실에서는 엄연히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초기 다원주의는 포괄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포괄주의 역시 다종교상황에 대해서 인정하되,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나’가 될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맥그래스는 포괄주의와 함께 이러한 다원주의를 열심히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그 자체로 정당합니다. 그는 포괄주의가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초기 다원주의, 즉, 일원적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맥그래스가 다원주의에 대해 가하는 비판의 초점이 일원성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들도 하나의 신을 향하는 길이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입니다. 결국 맥그래스 비판의 초점은 ‘다원성’이 아니라 ‘일원성’입니다. 맥그래스는 획일화하려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에 대해서 ‘아니다’라고 하며 맞섭니다. 이 점에서 그의 비판은 적절합니다. 서구 다원주의자들은 이 비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원주의라는 기본적인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지적인 대응이다. 즉, 신앙의 다원성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지적 · 문화적 생활에서, 또한 특히 종교들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226)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다원주의가 새롭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현상’으로서 그러하다는 것은 ‘기술적 다원주의’가 타당하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그렇게 살았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으로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종교와 신앙도 그러했으니 서로 다른 믿음으로 믿고 살아왔습니다. ‘신앙의 다원성이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라고 한 것은 서로 다른 종교와 신앙이 이미 함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인정이고 기술입니다. 그런데 맥그래스에 의하면 이렇게 서로 다른 믿음으로 믿고 사는 것이 눈앞에서 엄연하게 벌어지는 사실이기는 하지만 결코 정당하지는 않은데 이 시대가 바야흐로 이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니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름이 현상이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데 다름을 옳다고 하니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판단이 나올 수 있을까요? 같음은 옳음이고 다름은 그름 또는 틀림이라는 집요한 신화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 같음은 자기와의 같음이고 다름은 자기와의 다름입니다. 언제나 기준은 자기입니다. ‘자기라는 인간’입니다. 이런 자기가 꽤 오랜 세월동안 그러한 다름을 같음으로 묶어 왔고 같음 안에 들어오지 않거나 잡히지 않는 것은 쳐내었습니다. 그런데 다름을 쳐내는 것, 이것이 바로 배타입니다. 복음주의가 배타주의가 될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맥그래스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결정적인 비판을 선언합니다.   
따라서 (규범적 다원주의에 의하면) 어느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진리’를 독점한다는 주장은 지적인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 의미심장한 사실은 규범적 다원주의로 인한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226)  
앞의 문장은 다원주의가 주장하는 내용이고 뒤의 문장은 그러한 주장의 결과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생략된 문장은 단 한 줄입니다. 밝히자면: “이러한 형태의 다원주의는 단지 믿는 바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것을 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상당히 규범적인 성향을 띤다.” 규범적 다원주의라는 말뜻을 다시 설명했을 뿐입니다. 특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니 위의 인용구절에서 앞뒤를 바로 이어 뜻을 풀어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리의 독점권을 지적인 파시즘으로 비판하는 것은 진리의 희생이다’라는 내용으로 정리됩니다. 말하자면 진리는 독점되어야 하는데 이를 독재라고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달리 읽을 길이 있을까요? 아니라면 어찌 해야 할까요?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봅시다. 한계를 초월하려는 성정이 향하는 힘이 종교에서는 ‘신’으로 표상되고, 학문의 영역에서는 ‘참’으로 그려집니다. 참에 대한 물음으로 ‘무엇’이 먼저 나왔고, 그 후 인식 주체인 ‘누가’의 등장과 함께 무엇과 누가에 관한 관계인 ‘어떻게’가 전개되었습니다. 그 다음 ‘누가’를 토대로 한 ‘무엇’과 ‘어떻게’의 묶음이 이어졌고, 그것에 대한 비판과 공격으로 ‘왜’가 등장했습니다. 이 ‘왜’ 물음을 일으킨 ‘누가’는 ‘언제/어디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진리라고 불리는 참은 어떠한 위상을 지니며 그 모습을 어떻게 엮어갔을까요? ‘무엇’ 물음으로만 충분했던 고중세 시대의 ‘참’ 그림과 ‘누가’와 ‘무엇’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어떻게’ 물음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공유되었던 근세에서의 ‘참’ 그림, 그리고 모든 여섯 개의 의문사를 유기적으로 다 동원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참’ 그림은 같을 수 없습니다. 제일 앞의 ‘무엇’ 물음에 대한  대답은 확실합니다. 나머지 다섯 개의 의문사를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것들을 고려할수록 ‘무엇’은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만일 가능하다면 완벽한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그것은 ‘누가/언제/어디서’에 닿을 수 없습니다. ‘무엇’은 초시공적인 차원에서나 가능한 진리 선언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근세의 ‘어떻게’ 물음에서 비롯되는 인식론은 앎이라는 것이 누구나 이미 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었으며 현대는 모든 물음이 삶에서 유기적으로 얽혀져야 비로소 대답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마당에 맥그래스가 생각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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