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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래로부터의 기적

2016년 5월 29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4:18-20

그 때에 살렘 왕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는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천지의 주재,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아브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브람은 들으시오. 그대는, 원수들을 그대의 손에 넘겨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시오."아브람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9:11-17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시작하니, 열두 제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씀드렸다.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찾아가서 잠자리도 구하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 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거기에는 남자만도 약 오천 명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 앞에 놓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설교문

1. 예수님의 삶을 크게 나누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쫒아내신 일,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신 일,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먹는 것과 관련되어 시작됩니다. '빵집'이라는 뜻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부터 심상치 않은데,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부터 빵 문제로 시험을 받습니다(마 4,3).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다시 말해 금식과 절제를 했는데, 예수님은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던지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마 11,18-19)라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은 일(마 12,1-8)에서부터, 결혼잔치에서 술이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기적(요한 2,1-1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겨자씨(막 4,26-29), 누룩 등이 등장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은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일의 하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요 6,41; 6,48) 나를 먹으라, 나를 먹지 않는 사람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잘 먹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에서 스스로 남에게 먹힌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준비했고, 세상 끝까지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감사하며 전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절망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분이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가, 그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눌 때, 비로소 그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눅 24,30-31).

2. 오늘의 누가복음서도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5병 2어의 기적'으로 알려진 본문은 네 복음서 모두에 전승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처형당한 후,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피한 예수님에게 소식을 들은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던 무리를 예수님은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눅 9,11).

날이 저물자 끼니를 걱정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 했습니다: "여기는 빈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흩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근방에 있는 농가나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갑자기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처지라는 것을 선생님은 모르시나?"

"이 많은 사람들을 무슨 돈으로 사 먹인담?"

사정을 모르는 것 같은 예수님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제자 빌립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당시 현실을 감안한다면, 제자들이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하시자, 그들이 알아보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 빵과 물고기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공관복음서에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내놓습니다(요 6,9).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들을 떼를 지어 풀밭에 앉게 한 후,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빵과 물고기를 받아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는데,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3. 이 '5병 2어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기적능력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까짓것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늘려서 5천명을 먹이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우화적으로 해석했는데, 떡 다섯 개는 모세 5경, 열두 광주리는 열두 사도, 물고기 두 마리는 시편과 예언서 또는 복음서와 사도 서신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 '설교의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이 복음으로,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바뀌는 전 세계적인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본문 전체를 도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 이야기를 "복음의 설교라는 양식으로 군중을 먹이도록 사도들에게 보여준 모범"이라고 봅니다. 칼뱅은 그리스도가 육신적인 일을 돌보는 데까지 목자 역할을 하셨다는 사실의 확증으로 봅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이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을 기꺼이 나누어주자, 다른 사람들도 주머니에서 각자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내놓아 모두 배부르게 먹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5병 2어의 기적이야기'를 기적으로 볼 것이냐, 상징적 설화로 볼 것이냐는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의 경제학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먹을 것을 사러" 보내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고쳐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놀랬지만 제자들은 군중을 위해 빵을 사러 갈 준비를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야 했습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느냐?"

그 때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문제가 단순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빵을 나누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사다'와 '나누다'의 차이입니다. "사다"와 "나누다"의 대조는 한편으로 오직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배고플 때, 빵을 사먹을 수 있는 이른바 시장의 자유와 평등의 허위를 폭로하고, 교환가치와 매매관계에 근거한 사회적 질서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일지라도, 함께 나눈다는 것, 오래된 새로운 경제 질서였습니다.

지식과 기술이 발전하면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점차 해방되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선진 경제와 첨단 기술은 인류의 해방과 평등이 아니라, 미국의 도시사회학자이자 시카고 대학교 사회학 교수인 사스키아 사센에 따르면, 오히려 '축출의 메커니즘'을 만들었습니다. '축출'은 배제나 소외보다 더 심각한데, 소외된 사람이나 대상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센은 이것을 '축출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런 세계 자본주의의 약탈적 구조가 드러난 것은 1980년대 이 후라고 합니다. 수학자, 물리학자, 변호사, 회계사 등 세계 최고의 전문가 집단이 만든 과학적 금융도구가 '지옥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첨단의 과학적 금융 도구가 발명되고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고, 미국에서만 1300만 가구 이상이 주택을 압류 당했으며,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직후인, 2008년에는 하루 평균 1만 가구가 집을 잃었습니다.

이런 위기의 근본 배경은 '시장 우상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시장으로 통합니다. 인간관계까지도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가치와 매매법칙이 지배합니다. 구매력 없는 사람의 차별과 축출은 심지어 생물학적 운명으로 규정됩니다. 금수저, 흙수저 논쟁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이기적이고 부패한 지배계층에게가 아니라, 시장과 금융조직이라는 거대한 체제와 구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세계 경제체제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합니다. 누가 이 세계적인 위기의 책임자인지 지목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구성원들이 책임의식을 느끼기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스템 뒤에서는 개별 인간의 고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습기 살균제가 다수의 목숨을 빼앗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이 되는 일이면 양심도 파는 그런 일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약탈적 금융 메커니즘 안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시스템 뒤에 숨어 안보이고, 축출당한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변두리로 계속 밀려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경제체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약탈적 식민지 배, 거기에 기생했던 유대 지배층, 이자로 먹고 살던 도시의 대토지 소유자들과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던 소작농, 조세 저항운동과 농민들의 반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개파, 첼롯파 등 서로 다른 이념 집단들의 갈등도 깊었습니다. 민족의 해방과 체제 혁명을 우선해야 한다는 집단과 개인적 경건과 금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야 한다는 집단 사이의 갈등 사이에 예수님과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적 경험이 그렇듯이 해답은 전적으로 구조적 개혁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개인적 변화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같은 최첨단의 금융구조 안에 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헤지펀드도 금융파생상품도 인터넷도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이 시장과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매가 아니라, 나눔을 새로운 경제적 관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런 나눔이 5천 명에게 한 끼 정도 먹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과연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못하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8억 7천 만 명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것, 7억 8천 만 명의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구의 생산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물에 대한 접근권을 인권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글로벌 기업 네슬레 회장의 말 때문인지.

독일 여성 건축가 마르그리트 케네디는 우리 시대의 '금융시스템은 지금까지 그 어떤 전쟁보다, 그 어떤 환경의 곤궁보다, 그리고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 많은 죽음과 빈곤 문제를 낳고 있다. 이 시스템은 실제로 거의 모든 전쟁의 뿌리이고 수많은 대립과 사회 붕괴의 원인이다'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돈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서 우리들 자신의 참된 변화라고 강조합니다'. 돈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말씀이나,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말씀도 돈이 영적인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정신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정신의 개혁이 시스템의 개혁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시스템의 개혁보다 더 어렵습니다.

기적은 국어사전을 보니,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고 풀이 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면 이것은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적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먹을 것이 충분한데도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1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것도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니 기적보다 더 기적적인 일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의 국내 총생산(GDP) 총액은 30조 달러이고, 전 세계의 수출입액은 8조 달러에 지나지 않는데, 2000년 기준, 세계를 돌아다니는 돈은 300조 달러라고 하니, 도대체 262조 달러는 어디에 숨어있기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데, 전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한 나라의 운명은 물론 개인의 목숨까지도 좌지우지 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니 기적보다 더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예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원하셨다면,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곧 사탄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이미 돌로 떡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목격한 대중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6,15).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한 어린이가 자기가 가진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소금에 절인 두 마리의 생선을 내놓지 않았다면 과연 예수께서 기적을 베풀 수 있으셨을까? 물론 예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기적을 만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어린이가 아니었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위에서부터, 초현실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에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보리떡 다섯 덩이와 소금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넘었다면 5병 2어는 이들을 먹이기에 충분한 양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초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했을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무슨 감사기도를 드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서는 다만 예수께서 감사 기도를 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에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충족되었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았을 때, 우리 형편보다 훨씬 못한 사람을 볼 때,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because of'의 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현실의 모든 악조건과 불행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런 감사만이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나눌 때,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시스템의 개혁보다 더 위대한 정신의 혁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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