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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26 "절대가 아니고도/아니어서 참된 종교"

정재현의 신앙성찰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3.1. 다원주의(3) 니터: '참된 종교'

앞서 배타주의와 니터의 입장을 비교했다면 이제 니터가 포괄주의와도 분명한 경계를 짓는 이야기가 뒷부분에 나옵니다. "비록 그리스도교가 자기를 '참된 종교'로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교는 보다 폭넓고 진정으로 참된 종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니터 66). 앞서 트뢸취가 말했던 '생성 중인 그리스도교'를 떠올리게 하지만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트뢸취는 그리스도교가 역사 안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지만 여전히 최고정점에 위치한다는 것을 말했다면, 니터는 앞서 말했던 '특수한 형식'이 보편을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면서도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특수한 형식들 사이에서 임의적으로, 선험적으로 최고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포괄주의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포괄주의에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리스도교가 정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포괄주의를 이어받았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포괄주의와 선을 긋고서 니터는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하나의 특수한 계시자에로의 전체적인 위임은 다른 특수 계시자들 가운데서의 보편적인 하느님을 위한 전체적인 개방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니터 66).

아마도 니터의 이 논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 밀집된 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말을 꼬아놓은 듯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한 감을 잡아놓았다면 이해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보편적인 하느님이 '특수한 형식'에 자신을 위임하는데 있어서 일부를 유보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쏟아 붓듯이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형식 속에서만'이라는 조건은 중요하지만 '특수한 형식'이 시공간적으로 하나만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또 다른 '특수한 형식'에게 보편적인 하느님이 여전히 전체적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위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이라는 제한이 '하나'로 제한한다는 것이 아니라 '특수'로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편성은 인간과 세계에 대하여 보편성 자체로서 관계하거나 접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원주의의 착상은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여러 종교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으로 향하는 동등한 길이라고 말하는 초기의 유치한 주장을 극복해야 하지만, 인간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에서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절절한 절규가 우리 시대인 현대의 시대정신을 촉발시킨 결정적 동인이었다면, 이제 니터는 이런 맥락에서 신중심주의를 제안하면서 오히려, 아니 당연하게도, 종교의 위치를 겸손하게 현실화하자고 주장합니다: "신중심주의에로의 지향운동은 바로, 그리스도교는 자기를 하나의 '참된 종교'로 생각하기 위해 자기를 '절대종교'로 간주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니터 67). 드디어 참됨과 절대성이 갈라집니다. 절대성은 신중심주의와 연관 짓고 참됨은 종교와 연관시키니 범주오류 뿐 아니라 나아가 절대성을 함부로 종교나 신앙에 들이댔던 종래의 신성모독이라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입니다.

니터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신의 절대성입니다. 신의 절대성은 종교의 절대성에 관한 주장을 부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회중심주의적 사고로부터 그리스도교인을 해방시킵니다. "자기를 절대종교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뒤 이어 "우리의 그리스도교 의식-일반적으로는 서구의 의식-은 참된 것을 절대자와 동일시 해왔다"라는 자기고발로 보다 선명해집니다. 지금까지 '참된 것'은 곧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내 그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참됨은 곧 절대적인 것으로 그려져 왔습니다. 니터는 이러한 오해가 왜곡된 진리관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양자택일(entweder-oder)의 대상으로서 생각된다. 그리고 진리는 우선, 다른 양자택일들이 -비록 단순히 익명적이라 할지라도- 진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제시를 통해 규정된다. 진리는 절대 안전해야만 하며 이것은 진리란 배타적이든 포괄적이든 간에 절대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터 67)

여기서 핵심개념은 안전입니다. 진리의 절대성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안전, 안정욕구를 보장해줄 것은 절대라고 간주되어 왔습니다. 진리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안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진리 자체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인간 역사에서 진리라는 이름으로 안전욕구충족체계가 형성되어 왔고 흔들거리는 상대적인 것, 가변적인 것은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안전욕구와 관련해서는 절대가 절실했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안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안을 찾아 긴긴 세월을 엮어왔습니다. 그러니 급기야 종교가 절대성을 표방하고 나서게 되었고 '절대종교'라는 '둥근 사각형' 같은 괴물이 등장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니티는 이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인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만들어내고서라도 붙들어야겠으니 종교에게 그 역할이 요구되었고 결국 종교가 그 위치를 자임하면서 '절대종교'라는 해괴망측하고 신성모독적인 발상이 역사를 지배해 왔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대종교가 벌여온 인류사의 폐해는 이미 지적한 대로 심각한 것이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니터는 주장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적이시고 그렇게 절대적인 신은 당연히 보편적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오직 특수한 형식으로만 만날 수 있으되 그 하나의 특수한 형식을 다른 특수한 형식을 배제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이런 비판을 깔고서 니터는 이제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종교들의 가치를 경험하는 종교다원주의 세계 속에서, 모든 현실의 과정적이고 관계적인 특성을 인식하게 되는 역사의식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그 낡은 안정을 포기하고 종교적 진리를 포함한 새로운 진리이해를 맞이하도록 부름 받고 있지 않은가? (니터 67)

이 물음에서 오히려 니터의 핵심적인 주장이 집결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앞서 정리했듯이 니터의 논의를 한 문장으로 만들어봅시다.

과정적이고 관계적인 현실에 대한 역사의식은 낡은 안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진리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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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상호 현실 대화

이제 니터는 현실에 주목합니다. 좀 더 솔직해지려고 애쓰는 흔적이라고 봐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미 그렇게 유한하니 삶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 현실은 그렇게 과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사회와 역사의식을 거치고 유한성으로까지 개체화된 상황으로 내던져진 인간은 불가피하게 서로 얽히는 관계를 토대로, 관계로부터, 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깨달음이 현실을 그토록 관계적으로 보게 했습니다. 이렇게 상대적이지만 그렇게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 관계하는 현실에 맞닿는 진리는 마땅히 종래의 억압적인 절대성을 떨쳐버리고 새로이 엮어져가야 하는 것이니, 이는 상대들이 서로 만나 상호관계를 이루는 대화에서 도모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의문문으로 표현된 니터의 결론적인 선언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의 요소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덧붙인다면,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를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배타주의는 과거에 근거합니다.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확연합니다. 포괄주의는 미래에 근거합니다. 포괄주의는 미래를 선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역사가 2천년이 아니라 2만년이 지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정점에 있습니다. 이와 견주어 다원주의는 현재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미래는 불확실하며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진리는 주어지는 것(given truth)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truth in the making)에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안전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진리 이야기, 세계 이야기, 인간 이야기를 엮어왔는데 그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해 왔다는 통찰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다양한 사상들은 이렇게 만들어져 가는 과정 중의 진리를 말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대체로 일종의 '합의'(truth as consensus)가 있고 방향성이 있습니다.

니터도 이런 맥락에서 대화로 구성되는 진리(truth as dialogue)를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는 통일적 다원주의가 대화적 진리관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짐작하건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수렴하게 되면 통일성을 도모하게 될 것이라는 착상을 추구했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 논문에서는 이를 자세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그의 짧은 글을 맺으면서 깊은 통찰이 담긴 진리공식을 윌프레드 칸드웰 스미스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모든 궁극적인 사실들에 있어서 진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있지 않고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에도에 있다"(Wilfred Cantwell Smith, The Faith of Other Man [New York, 1972], 17; 니터, 69에서 재인용). 참으로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고전형이상학과 근세 인식론을 떠받치는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 양자택일을 요구받았던 실상의 대조가 이제 현대 반형이상학에서 이렇게 한데 얽혀 '역설'로 구성되어야만 그나마 참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심오하고도 예리한 통찰입니다. 그러나 이는 스미스의 고유한 착상이라기보다는 현대 사상가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는 진리관입니다. 또한 굳이 거슬러가자면 동양에서는 이미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는 혜안이요 서구에서도 특히 신비주의 전통에서 집요하게 전개해 온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여기서 끝일까요? 역설적인 구성이면 삶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가요? 니터는 이 글에서 역설적 통찰을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해서 우리는 좀 더 물어야 합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를 포기한 진리, 절대성을 포기한 진리는 어떻게 삶에 뜻을 지닐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니터 자신이 이야기한 '통일적 다원주의'는 자신의 이야기 저변에 깔려있는 '대화로서의 진리관'과 온전히 상응할까요? 이래서 우리는 다원주의자 한 사람을 더 살피고자 합니다. 레오날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에게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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