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다종교세계로의 나들이] 31 "구성적 상대성이 드러내는 다종교적 체험"

정재현의 신앙성찰

1. 다름과의 만남, 우상파괴를 위하여: 파니카(3)

jungjaehyun
(Photo : ⓒ베리타스 DB)
▲정재현 연세대 교수(종교철학)

이제 자기동일성의 횡포로부터 인간과 종교를 구해내기 위해 대안으로서 구성적 상대성을 제안한 마당에 상대성을 상대주의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파니카는 매우 치밀하게 현실통찰을 전개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다룬 것은 보편성과 구체성의 관계입니다. 앞서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어떤 식으로 보편과 특수를 묶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니터의 경우는 보편은 개별자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고 하면서 역설적인 긴장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파니카는 보편과 구체를 연관시켜 말합니다. 보편의 반대말은 개별, 개체, 특수 등이 있고 구체의 반대말은 보편이 아니라 추상입니다. '보편과 특수'라면 몰라도 '보편과 구체'는 언뜻 좀 어색해 보입니다. 역설적 공속을 말하려면 대등적인 대립항을 묶어야 하는데 파니카는 이와도 달리 그러한 관계가 아니라 다소 엉뚱해 보이는 방식으로 묶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헤겔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답을 내리기보다는 일단 물음을 지니고 갑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구체적인 것 안에서 보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그리고는 이에 대해 매우 우회적인 대답을 내어 놓습니다:

논쟁의 규칙은 양편 모두에게 똑같아야 한다. 나는 나의 이웃을 팔을 벌려 안을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나를 안을 수 있도록 허락할 때에만 가능하다. 또한 나는 나의 믿음을 보편화하고 나의 종교도 개혁해 나갈 수 있는데 이것 역시 나의 이웃이 나와 똑같은 일을 하도록 할 때라야 가능하다."(파니카 48)

결국 나와 나의 이웃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만 그런 구체성을 공평하게 나눌 때 보편성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게 보편과 구체는 이런 방식으로 얽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여러 사람들이 보편과 개체, 또는 보편과 특수를 맞대응의 대립관계로 엮어냈다면 파니카는 구체들의 관계에서 보편을 도모합니다. 말하자면 보편이 구체들에 앞서 별개로 먼저 있다가 후에 구체들과 관계를 가진다기보다도 구체들의 만남에서 비로소 보편이 추구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읽는 것을 옹호하기라도 하듯이 파니카는 '진리는 소유될 수 있다는 원칙에 의거한 진리 개념은 뒤흔들려야 한다'고 기염을 토합니다. 과연 진리는 소유 대상이라기보다는 추구되어야 하는 그 무엇일 터입니다. 이는 지식과 지혜를 대비시키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식은 내용을 지닌 앎일진대 소유할 수 있고 양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내용이기보다는 형식이니 앎이기보다는 삶을 꾸려가는 틀과 꼴일 터이고 따라서 소유될 수 없이 다만 추구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론 축적도 불가하고 다만 수행될 수 있을 따름이겠지요. 지식이 더욱 채워가는 것이라면 지혜는 차라리 점차로 더욱 비워가는 얼과 꼴이며 틀일 것입니다. 이제 진리는 지식의 차원에서 명제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규정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부단히 씨름하는 과정에서 내뻗어 향해야 하는, 그럼에도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지혜에 견주어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이러하다면 소유가 아니라 추구이며 이런 이유로 어느 누구도 진리에 대한 소유권 주장으로 자기를 절대화하는 것은 오류이고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추구이니 상대성이요, 소유할 수 없으니 절대주의도 아니지만 같은 이유로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상대주의란 저마다 나름대로, 또는 심지어 마음대로, 자기 소유를 주장하고 이런 주장들이 무정부적으로 난립할 가능성을 싸안고 있는 것이라면, 상대성은 다만 추구할 뿐이니 소유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현실 통찰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만남과 대화에 대한 파니카의 지론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주고받는 관계의 상관어귀를 순환적으로 돌리면서 파니카는 열린 진리에 근거한 신앙의 역동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신을 사랑할 수 없다. 신은 나를 이웃과 접촉하게 해 주는 내 '자아'의 초월자이기 때문이다.(파니카 53)

신과 이웃 사이에 순환적인 동격을 설정하면서 자아를 넘어설 가능성을 도모하니 구체와 보편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근원이고 시작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관계에 대해서 우선권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이루는 신과 인간 중 어느 쪽도 중심적인 지위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상대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어느 쪽이나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습니다. 파니카는 신-인 상호관계를 역설하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편의 우선성을 거부하면서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는 심지어 믿음과 사랑도 먼저 전제하지 말아야 한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이를 사랑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파니카 55). 역설의 극치에 해당하는 선언입니다. 소유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추구해야 하는 진리처럼 신앙의 길도 성취하지는 못하더라도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과 구체의 만남은 단순한 동일화가 아니라 이처럼 역설적 얽힘이면서도 현실에 착지할 실마리를 잡으려는 구성적 상대성의 기획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파니카에게서는 사실상 종교간 만남 자체가 관건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씨름했던 것은 차라리 믿음의 뜻을 일구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지론은 믿음의 길에 대한 이야기이니 참으로 깊은 신앙성찰입니다. 이를 폭넓게 펼치기 위해서 '다종교적 체험'을 다룹니다. 물론 이는 '구성적 상대성'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자리와 위치가 어떻게 전환되었는지를 살피고는 이를 '다종교적 체험'의 관점에서, 즉 구성적 상대성의 틀 안에서 신앙에 대해 새판을 짜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짤까요? 이를 예상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교리는 하나의 인간, 하나의 종교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엮어져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국 현실과 동떨어지고, 더 나아가 억압과 왜곡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자기이해가 왜곡을 거쳐 인간 자신을 억압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바탕으로 엮어진 종교체계 역시 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서 해방을 주기보다는 억압기제로 작용했다는 것이 파니카의 진단이고 현실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바로 '다종교적 체험'입니다. 낯설어 보이는 표현이지만 파니카는 이를 통해 실상 하나의 특정한 종교인에게서 벌어지는 체험의 모습이 이미 다종교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 참된 신앙에 머물기 위해서 그 신앙에 대한 위험을 받아들일 것도 요구한다. 나아가 신앙의 위기는 자기 자신의 신앙 그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 위험은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그것을 심화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위험은 ...신앙 자체의 역동성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신앙 자체의 역동성은 우리들의 이웃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종교적 세계를 드러내 준다. 우리는 이런 이웃의 세계를 무시해 버릴 수 없으며 우리들의 신앙 세계로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파니카 56)

'신앙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신앙을 이성과 대비시켜 앎의 차원으로 축소시켜왔던 중세나 지성, 감정, 의지 등 정신의 요소들로 환원시켰던 근세와는 확연히 다른 고백입니다. 이제 '살아갈 수 있을 뿐인 신앙'은 다종교적 체험으로 인하여 앎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을 만큼 모호하고 혼란스럽더라도 이를 견디어내는 성숙을 기대하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담뿍 담고 있는 전율적인 통찰입니다. 앞으로 나가기 전에 머물러 음미할 가치가 넘치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신앙을 방해할 것 같은 의심이 오히려 신앙의 역동성을 위한 근거가 된다는 역설적 통찰입니다. 의심이란 다종교적 체험이 불가피하게 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니 오히려 정직하자는 것입니다. 틸리히도 그의 작은 책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에서 이와 같은 통찰을 전개했듯이 역설에 주목하는 현대 시대정신을 진지하게 씨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서로 소통하지 않아도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역설적 통찰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역동성의 넉넉한 품 안에서 나의 신앙을 이미 그렇게 엮어가고 있는 다종교적 체험은 삶의 격랑과 파고를 외면하고 알량하게 비현실적으로 주장되는 순수성이라는 허상을 깨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상대적으로 구성되어 온 주제를 파악하게 합니다. 나아가 그런 꼴과 얼로 엮여져 오는 신앙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되새기게 합니다. 그러기에 파니카는 말합니다:

신앙의 생동성은 우리들 삶에 대한 모험에 과감하게 뛰어들도록, 아니 어쩌면 그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러한 모험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기 때문에 그 누구라도 그러한 모험에 방관자적 태도를 취할 수 없다.(파니카 57)

물론 종교는 위험과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안정화 기능을 요구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모험이라니요? 그러나 여기서 모험은 역동성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종교적 체험은 이제 의심을 넘어서 모험까지도 신앙의 넓이와 깊이에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한쪽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여기서 모험이라는 표현이 지니는 뜻을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역동성이라면 그럴 듯해 보이고 모험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운 것이 우리 정서이지만 참된 믿음의 길을 찾으려는 파니카에게서는 외면할 수 없는 다름을 향한 지름길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성적 상대성이 드러내주는 신앙의 다종교적 체험이 지니는 뜻입니다.

이인기 ihnklee@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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