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기독교인은 술을 마시면 안되나요? "술은 선악과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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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출처= 크리스천포스트)
▲수녀복을 입은 두 여성이 2014년 3월8일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캄룹스에서 벌어진 2014 팀 호튼 브라이어 컬링대회에서 퀴벡과 마니토바 선수단 사이의 우승결정전이 벌어지는 동안 맥주를 마시고 있다.

젊은 남녀 크리스천들의 고민을 실제적으로 구성해 나름의 대답을 시도하고 있는 손성찬 목사(람원교회 청년부)가 '남녀 사이 스킨쉽' 문제에 이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또 다른 문화인 음주 문화에 대한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풀어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손성찬 목사가 19일 자신의 SNS에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도 되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했다.

손 목사는 이 글에서 무엇보다 술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술은 '선악과' 같은 금제의 물질이 아니고, 결정적으로 예수께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막 7:19)'고 말씀하셨다"며 "우리가 도출해낼 수 있는 답변은 성경이 술 자체를 단순한 음식물로 치부한다는 사실, 그리고 술 뿐 아니라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사실이고, 단지 사용하는 자와 사용법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손성찬 목사의 글 전문.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도 되나요?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는 단 한 번도 입에 술을 대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성찬식 한 번도 참여 안하셨어요?' 성찬주도 주(酒), 즉 술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누가복음 7:34). 먹보에 술꾼이라고 공격받았음을 피력합니다.

비록 모함이지만, 예수께서 술을 꽤 잘 마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끔 일부 답답한 인생들이 이것을 가리켜 '포도즙'이라고 항변하는데, 전통에 근거하여 성경을 재해석해버리는 어리석은 짓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즙과 포도주를 나누는 경계 도수는 어떻게 정할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 솔직하게 고백해봅시다. 성찬식 때 마시는 교회 성찬주가 좀 맛있나요? 솔직히 한 잔 더 받고 싶다는 생각 해봤잖아요.

술은 '선악과' 같은 금제의 물질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마가복음 7:18-19). 바리새인들과의 정결례 논쟁 중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1차 폭탄을 투하셨고, 나아가 더 이상 이딴 논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포하심으로 평정해버리십니다. 즉 우리가 도출해 낼 수 있는 답변은 성경이 술 자체를 단순한 음식물로 치부한다는 사실, 그리고 술 뿐 아니라,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로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사용하는 자와, 사용법의 문제일 뿐이지요.

예전부터 '약술'이라 칭하며 반주를 즐겼던 우리네 문화라든가, 오히려 적절한 음주가 혈액순환에 도움된다는 연구결과, 무엇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병을 위해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술을 선악과처럼 다룰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결국 그 위에 덧 씌워진 프레임에 대한 해석 영역이지, 선악을 다툴 깜이 못되는 그저 음식일 뿐입니다.

때문에 굳이 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집약한다면, '절제된 자유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교회는 술을 비관용적으로 다루어 왔을까요? 우선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금주법은 한국의 복음화를 이끌었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금욕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신앙 성향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허나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우리네 역사적 상황과 더 긴밀히 결부되지요. 급격한 강제적 개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누적된 사회의 피로도는 도박이나 아편, 지나친 음주로 표출됩니다. 보다 더 원활한 통치를 위한 일제의 조장도 있었지요.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러한 한국적 상황 가운데 한국인의 심신과 신앙을 훼손시키는 몇가지 악습들을 선정합니다. 음주만이 아니라, 도박과 아편, 그리고 축첩제도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단호하게 교회법으로 금지시키고야 맙니다.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 개인신앙과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를 좀먹는 심각한 죄악으로 부터의 탈출을 위함이었습니다. 즉 금지자체가 아니라 거룩함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그 사회적 해악이 해소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멍멍이가 되도록 마셔도 누구하나 제지하지 않습니다. 길바닥에 김치전을 부치며 누워있어도 괜찮습니다. 심지어 음주 후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해 지나치게 정상참작을 해주는 관행을 보면 우리네 문화가 음주에 대해 얼마나 관용적인 문화의 사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대주의적 접근은 아니지만, 술을 유흥의 도구가 아니라, 단지 음식의 하나로 대하며, 가족중심으로 건강하게 형성되고, 절제하지 못하는 이를 중독과 치유의 관점으로 보는 서구사회의 음주문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또한 철저히 유대의 문화적 요소를 반영하는 성경이 '절제된 자유'를 선포하는 의미에 대해서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극히 메마르기에 늘 음용수가 부족한 팔레스틴에서. 식수의 대체재는 그 땅의 주산 과일로부터 나옵니다. 그렇게 채집하여 저장한 과일은 고온건조한 그 땅의 기후로 인해 쉬이 발효되고 이것을 식수의 대체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술을 긍정적 의미보다 부정적 뉘앙스로 언급하는 구절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그리고 현대 경건한 유대인들이 포도주를 1/4 정도의 농도로 희석시켜 마신다는 사실은 여운을 남깁니다.

따라서 음주문제는 철저히 '아디아포라'(성경에서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은 행동들)의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디아포라 영역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바울의 귀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전서 8:9; 13).

비록 성숙한 시각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일들이 있다면, 그들을 존중하여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단순한 음식이기에 먹어도 된다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단순한 음식이기에 타인을 위해 안먹을수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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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스틸컷)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

많은 논의를 뒤로한 채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 던져봅니다. 간하배(Harvie M. Conn) 선교사라는 분의 일화입니다. 그는 본래 고국에서는 파이프 담배를 즐겨 폈던 분이셨으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은 일체 주초를 하지 않다가, 임기가 끝나 고국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즐기셨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한국제자가 찾아왔는데, 교수실에서 담배를 피는 선교사님 모습을 보고 놀라, 그에게 '저는 평소 선교사님을 흠모하고, 선포하시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이렇게 담배피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불편합니다'라고 돌직구를 날렸답니다. 저 같으면 사이다 한병 원샷하고, 손에 든 파이프 담배로 골을 쪼개버렸을 터인데, 이 어마무시한 양반은 그날로 담배를 끊었다고 하네요. 쿨내가 진동합니다. 자발적 족쇄입니다.

여기에 누가 감히 돌을 던지겠습니까?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덕'이라고 합니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보고 또 맛보도록 돕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바울은 아니지만(그렇게까지 못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결혼도 했구요), 간하배도 아니지만, 저는 그리스도인의 금주를 아직은 긍정합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미 형성된 금주전통의 영향력이 여전하고, 나아가 여전히 변함없는 우리네 부정적 음주문화 때문에 그러합니다. 물론 감사한 것은 더디지만 서서히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카페와 커피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혹시 전통을 도그마화하여 이를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는 유아기적 발상에 머무시는 분들이 없었으면합니다. 그럴 깜이 못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금 짖궂은 생각이지만, 만약 율법주의적 개념으로 금주를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마트에서 술을 한 번 구입해 오라고 주문해 보고 싶습니다.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니까요. 요리에 첨가할 수도 있구요.

그런데 이를 본능적으로 꺼림칙하게만 받아들인다면, 도그마화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술은 마시지 않으나 술 마시는 것 가지고 남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 그리고 술은 마시지 않으나,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쳐묵쳐묵해서 남산만하게 나온 그 배때지가 하나님 앞에 더 악한 탐욕의 상징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오히려 반대의 흐름이 더 거세보입니다. 과거에는 음주자를 맹목적으로 정죄했다면, 최근에는 오히려 금주자를 하찮게 여기는 모습이 언뜻 보입니다. 어떤 초교파 교회에서 술 안 마시는 교역자를 가리켜 비아냥대며 '너 합동이지'라고 했다는 말이 들리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여전히 술을 불편히 여기는 초신자나, 그런 문화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들이 분명 꽤 있습니다. 그 전통 자체가 악함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다면, 이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태 역시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도그마화 하는게 문제이지, 이를 역도그마화하여 무조건 매도하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성경의 명시적 가르침을 잊지는 맙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 '다만 이와 같이 집사들도 ...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디모데전서 3:8). 술은 단지 음식일 뿐이지만, 그 특유의 희락적 특성과 해악성이 상존합니다. 우리 모두 압니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잃게합니다. 더욱이 필름이 끊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격을 스스로 상실시켜 멍멍이로 만들고, 나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할 임무가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리를 포기하는 큰 실책입니다. 때문에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만 하는 중직들에게 술에 인박이지 말것을 주문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제 결론은 이러합니다. 우선 저는 돈 문제라면 모를까, 고작 먹고 마시는 하찮은 문제로 누군가와 싸우기 싫습니다. 제발 기독교를 음식 가지고 쪼잔하게 구는 그런 종교로 만들지 마십시요. 그런데 열나게 설명해도, 어차피 자기 맘대로 하더군요. 그렇다면 마시고 싶을 때까지 마시세요. 그러다가 만약 개인적 중독, 혹은 공교회적 덕 차원에서 불편함이 느껴지는 때가 온다면, 그 때는 절제하십시요. 그리고 술이 자신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들을 지나치게 망치고 있다면 과감히 끊길 바랍니다.

아니면, 주도(酒道)를 존중하며, 마셔도 좀 간지나게 마십시다. 제발 꽐라 될 때까지는 마시지 마십시요. 그리고 만약 안 마시고 있다면 굳이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좋지 않은 문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여전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최소한 개교회 내에서만이라도 공동의 논의와 합의를 가짐으로써, 제발 쉬쉬하다 고작 먹는 것 가지고 서로 얼굴 붉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제안하고 싶습니다. 술을 단지 음식의 영역으로 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성찬문화의 회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일예배 공동체와, 가정교회의 의미를 담당하는 소그룹에서 초대교회 전통과 같이 성만찬의 요소가 회복된다면 자연스레 술에 대한 시선과 음주 문화가 바뀌어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랍니다. 언젠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이 술 얘기 나오면 눈치게임하듯 서로 민망해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편하게 교제하며 기분좋게 한 잔씩 하는 날이 찾아왔으면 합니다. 그 때 누군가 저에게 가장 좋은 술 한 잔 사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취하게는 마시지 않을듯 합니다. 전장의 장수에게 취함이란 가당치 않으니까요.

# 10년 전에 쓴 글인데, 논지는 비슷하나 결론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낌. 10년 뒤에는 조금 더 바뀔 듯

이지수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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