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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선] 한국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다시 밟을 것인가?

입력 Jul 26, 2017 07:22 AM KST
한국교회 개혁
(Photo : ⓒ ko.wikipedia.org)
▲17세기 일본의 에도 막부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적발해내기 위해 사용한 것과 같은 후미에

종교개혁500주년을 맞는 한국교계는 나름의 기념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기념세미나에서는 교회개혁의 과제를 도출하고 교회 내의 적폐를 청산하자는 구호를 목청 돋우어 외친다. 장로교의 분열, 독재정권에 부역한 사례, 목회자의 재정 전횡 및 성적 타락, 교회세습, 신학교의 파행적 운영 등 참회하고 개혁해야 할 과제가 부지기수다. 구체적인 행태들이 드러날 때는 몸 둘 바를 알지 못할 정도다.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를 의심해야 할 정도다.

물론, 개혁이라는 것 자체가 비판적 시각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청산 대상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오히려 교회가 더러운 발로 예수의 얼굴을 밟고 있다는 인식이 시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사회에 구현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바야흐로 발자국 투성이의 후미에('밟는 그림')를 교회 문짝에 걸어두고 있다.

후미에는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가 『침묵』을 저술할 때 중요한 창작동기이자 작품 속의 모티프로도 활용했다. 이것은 17세기 에도 막부가 가쿠레키리시탄('숨은 그리스도인')을 적발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만든 일종의 동판(혹은 목판) 그림이다. 이 그림 앞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고민하면서 혹자는 발을 들었고, 혹자는 밟기를 거부하고 순교를 선택했다.

엔도 씨는 300여 년이 지난 뒤에 나가사키의 한 천주당에서 후미에를 발견하고 그곳의 성상이 밟혀서 윤곽이 흐려진 반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형상을 보고 『침묵』을 창작할 영감을 얻었다. 그는 막부 권력에 의해 서슬퍼렇게 검열이 시행될 때 예수회 사제들이 교인들의 강요된 순교를 막기 위해 후미에를 밟고 배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결단과 그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내외적 상처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후미에는 밟은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배교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당시 사제들의 신앙적 고통을 반영하고 있기도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 초 천주교 박해가 시작될 때 후미에와 같은 방식으로 천주교인들을 적발해낸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박해가 심하던 시절에 예수께서 발에 밟히는 일은 그분께서도 기꺼이 용납하셨다. 그래서 『침묵』에서 후미에 앞에 선 로드리고 신부에게 예수께서는 그것을 밟으라고 이르셨다. 물론, 기치지로처럼 위기 때마다 후미에를 밟아서 목숨을 여러 번 구한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박해는커녕 대형교회들이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선교대국으로 성장한 현재, 발자국으로 뒤범벅이 된 예수의 성상이 교회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침묵』 속의 신부는 신앙의 모범과 성도들의 목숨과 신앙의 신비 등 신앙적 고민에 눌려서 인간의 무력함을 그 발자국에 실어놓았는데, 한국교회는 무엇 때문에 예수의 얼굴을 밟았는가? 일반시민들이 교회문짝에 걸린 후미에를 보고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로 지목되고 있는 사안들을 보면 그 발자국이 찍히게 된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교계 내부뿐 아니라 시민단체에서도 지적하는 개혁과제는 선거부정, 재정비리, 성적 타락, 교회세습, 이단시비 등이다. 그 발자국들은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면서도 물리치신 물질욕과 명예욕과 권력욕을 과시하는 데다 든든한 재정과 유명세와 종교계의 감투로 인간의 강함까지 증명하고 있으니 배교의 증거로 비친다.

그 발자국의 세세한 면모를 들여다보면, 한국교회는 예수의 얼굴을 밟은 데다 짓이기기까지 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이치에 회유되었다는 증거이다. 목자가 봉급 명세서와 잔치자리의 상석과 영적 권위의 허울에 '협박'을 당해 삯군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양떼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견주며 이 둘 사이의 경계를 묘하게 줄타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처보다 신앙적 결단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육신의 정욕을 따르도록 회유하고 유혹하는 세상 속에서는 그분을 구호로만 따를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그분의 얼굴을 밟지 않는 길이다. 이런 신앙적 결단 없으면, 기치지로처럼 후미에를 자주 밟게 되고 또 그럴 일이 자주 생기게 되어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도 501주년의 1년 전에 있었던 행사로만 기록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발자국이 선명한 후미에를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아니면 영화로운 예수의 얼굴을 남길 것인가?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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